조 윈터의 어머니는 창녀였다.
이책의 첫 구절이다. 시작부터 머리속에 뭔가가 휘몰아친다.
이어지는 몇줄이 책의 시작에 끝까지 버텨내는 끈끈하고 어둔 배경을 압축해 전달한다.
1960년 서울 시내 어딘가 소란스럽고 축축하고 한기 어린 뒷골목 지저분한 시궁창에서 조 윈터의 어머니는 죽어갔다.
그녀는 원한과 증오가 뒤범벅된 고통스러운 발작 속에 아이를 자궁 밖으로 쫓아 버리듯 쏟아내며 숨을 거뒀다.
행상인 한 무리는 흑인 혼혈 아기가 태어난 모습을 쳐다보더니 욕지기를 내뱉으며 하나둘 자리를 떴다.
한 노파가 가는 끈으로 아기 탯줄을 묶고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며 생기를 불어넣은 뒤 병석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찰싹하고 때리던 노파읜 손길은 앞으로 병석에게 찾아올 무수한 손찌검 중 첫 번째 것이 되었다. 10쪽
죽음과 새생명이 교차하는 혼란 속에 겪는 자신의 유일한 뿌리인 어머니와의 단절...
더운 김을 뿜어내는 새생명을 환영의 말이 아닌 욕지기로 맞으며 차가운 거절부터 안겨주는 냉혹한 세상...
무수한 폭력을 예고하는 매운 손길...무엇보다도 이 책 전체의 가장 큰 배경이 되는 구절이 있다.
축축하고 한기 어린 뒷골목,
조 윈터라는 이름은 병석이란 이름으로 시작한 그의 삶이,
지긋지긋하게 그의 발목을 잡는 축축하고 한기 어린 뒷골목을 겨우 벗어나 얻게되는 그의 새이름이다.
이태원에서 만난 미군이 그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며 가르쳐준 이름을,
정확한 발음도 기억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
시궁창에서 시작된 자신의 굴곡진 인생을 온전히 받아들여 그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새로운 삶 또한 그 터전위에서 일궈낼 줄 알게된 이만이 그럴 수 있지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다시한번 책의 첫구절을 읽어본다.
조 윈터의 어머니는 창녀였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극작가란다.
이책 <이태원 아이들>의 작가인 데이비드 L.메스라는 사람이.
제목과 책설명에서 가진 선입견이 미국작가가 한국의 어두운 그늘,
그중에서도 정말 깜깜하기까지한 구석의 이야기를 쓰다니, 과연...
우재는 계속 비누칠을 해주고 때를 밀어 준 다음 함부로 엉켜 붙어 버린 머리 다발도 잘라 주었다.
그리고 빗으로 살살 빗어 가르마가 잡힐 때까지 계속 행궈 냈다. 병석은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36쪽
그놈의 골목길이 애들을 아무렇게나 낳으니까 씨가 계속 자라는 거지. 67쪽
극작가의 글이어서 그런지 어렵지않게 문장속에서 배경과 이야기의 진행을 읽어낼 수 있게 돕는다.
그러나 어떨 때는 배경의 설정과 서술이 무리하게 배열된 듯한 문장들이 이어지고,
무대등장의 순서를 기다리던 키다리 아저씨들-병석을 길거리에서 이끌어내고
한국에서 일본, 미국으로 향하는 길을 이어주는 후원자들-의 연이어지는 흐름도 너무 극적이다.
계속되는 우연치않은 삶의 굴곡들, 주인공이 겪는 어려움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또다른 어려움의 등장을 고대하게까지 하는 조마조마함을 갖게하는 긴장요소도 지나치게 풍부했다.
하지만 위의 두 문장처럼 주인공 병석의 몸과 마음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따스함과
그 낯설은 따스함에 반응하는 수줍은 눈물의 표현은 읽는 이의 마음에 따스한 위로를 남겨준다.
특히 골목길이라는 장소에서 시선을 돌릴 수 없게하는 표현들의 이어짐은
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놓치지않게 하면서 또한 깊은 여운을 남긴다.
골목길. 우리가 수치스러워하며 돌아보기 싫어하는 어둡고 축축하고 냄새나는 그곳은
이 시대가, 이 역사가 뿌려놓은 아픈 상처와 미처 처리되지않은 분노와 어둔 감정의 찌꺼기들,
어디서 시작된 건지 모르는 원한 서로를 상처내며 흘린 피와 살점들이 채 썩지않은채
희미한 온기를 뿜어대며 우리의 원초적인 기억을 붙드는 곳이다.
우리가 태어난 어둡고 축축한 자궁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