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방송사별로 빠짐없이 보는 작은 아이의 성화에 못이겨 일찌감치 예매를 해 두었던 영화를 오늘 보고 왔다. 봉준호 감독이 이 작품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알게 된 이후 개봉하기까지 <설국열차>에 대한 관심은 우리 부부나 큰 아이도 작은 아이 못지 않았지만 그 열성과 몰입에는 작은 아이를 따라 갈 수가 없었다. 개봉 당일에라도 달려 갈 기세였으나 가족 모두가 편안한 날짜와 시간에 예매를 해 두었는데 그래도 틈만 나면 영화관련 기사며 리뷰, 평점을 점검하는 아이를 보며 과연 우리가 영화에서 만날 세계는 어떤 것인지 자못 궁금했다.
개봉 전 부터 이 영화에 쏠린 많은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 덕분에 영화 배경과 기본 줄거리를 예상할 만한 정보들이 꽤 알려져 있고 예고편에서 본 섬뜩한 장면들, 그리고 15세 관람가 등급에 비해 꽤 잔인한 장면도 많은 편이라는 세간의 평까지 듣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직접 영화를 보면서 받은 충격의 강도는 예상보다 휠씬 더 강했다.
평소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인 영화는 장르와 상관없이 잘 보지 않는 편이라 영화에서 보여지는 폭력적인 장면들자체도 충격을 주었고 견디기 힘들었다. 몇 몇 장면에서는 중간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느낀 두려움과 충격은 영화에서 보여진 그 장면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호러 공포물에 비하면 그렇게 대단히 잔인하거나 폭력적인 것들이 아닐 수도 있다.
정말 내가 견디기 힘들어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영화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그 세계, 기차 안에 갇힌 채 끊임없이 돌고 도는 희망없는 인류의 삶이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다가 왔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얼어 붙은 지구에서 살아 남기 위해 끊임없이 선로를 따라 달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는 세계. 아무도 밖으로는 나갈 수 없이 열차 안에 갇혀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삶은 얼어붙은 지구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꽁꽁 얼어 영원히 정지된 시간에 갇힌 것처럼 끔찍해 보였다. 뇌사 상태에 빠진 채 심장만 살아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끔찍함, 그것이 영화보는 내내 나를 힘들게 했다.
기차 안의 삶, 한정된 공간에서의 정체된 삶이라는 점에서 주어진 자기 자리에서 머무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의 꼬리칸 사람들과 그들보다 휠씬 많은 것을 누리며 호화롭게 사는 앞칸의 사람들, 그들 중 어느 쪽에 속하던간에 희망이나 미래가 없는 삶이라는 점에서는 잔인하고 처절하기는 마찬가지로 보였다.
박제된 삶, 무한 반복되는 철도 위를 달리는 기차 안의 종착지가 없는 삶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무엇을 위한 삶인가?
하지만 비참한 상황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조차 누리지 못하고 있는 꼬리칸의 사람들에게 희망은 오직 앞칸으로의 전진일 뿐이었다. 그래서 17년간 이미 여러 번 반란이 있었고 모두 실패로 돌아간 그 반란들은 그때마다 많은 희생을 대가로 치루어야만 했다.
17년 전 목숨을 걸고 열차에 올라 탄 꼬리칸의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과거가 있었다.
먹을 것이 없이 갇혀 지내던 그들이 마침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야만적인 혼란상황에 빠지게 되었을 때 길리엄은 자기 희생을 통해 사람들안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일깨워 주었고 그동안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런 길리엄의 뒤를 잇는 새로운 지도자로서 또 다른 혁명을 꿈꾸고 있는 커티스, 그리고 그들의 혁명을 돕는 열차의 보안 설계자이며 또 다른 문을 여는 열쇠를 가진 남궁민수와 그의 딸. 그리고 꼬리칸의 길리엄과 대척점에 있는 설국 열차의 절대자이며 커티스와 꼬리칸의 사람들이 넘어서야 할 최후의 적, 월포드. 그들은 각기 자신들만의 철학과 방식으로 열차 안의 삶을 살아 가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집에 돌아 온 후로도 내내 이 영화는 내게 풀기 힘든 숙제처럼 부담스럽고 불편한 느낌을 남겼다. 그것이 무엇일까? 영화 속의 장면들과 단상들이 머리 속을 오가며 만들어내는 흐릿하고 불분명한 무엇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표현하고 싶지만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꼬리칸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기존 질서와 체제를 전복하고 앞으로 전진하여, 앞칸의 사람들이 차지한 자리를 빼앗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치르며 앞으로 전진하였고 잠시 꼬리칸의 사람들이 열차 안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을 때 길리엄은 커티스에게 꼭 엔진까지 가야겠냐고 묻는다.
그는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왜 그는 이미 멈출 수 없게 된 커티스에게 그렇게 물었을까? 그들이 혁명을 시작한 것은 결국 엔진으로 상징되는 권력을 차지하고 열차 안의 질서를 재편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난 길리엄이 인간의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진 철학자나 성직자였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리고 길리엄은 꼬리칸 사람들이 가혹한 억압에 대항하여 혁명에 나서는 것을 지지하지만 그들이 혁명에 성공해서 엔진까지 간다고 해도, 그래서 앞칸을 차지한다 해도 그들 대신 꼬리칸으로 밀려날 사람들과 다시 앞칸을 지켜 내려는 그들 사이의 대치와 폭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사회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경쟁은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어떤 방식이든 경쟁은 서열을 만들어낸다. 사회가 공정한 제도라는 틀에 맞추어 사람들을 줄 세우면 결국 누군가는 앞으로, 누군가는 뒤로 밀려 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뒤로 밀려 날수록 다시 앞으로 전진할 기회나 여건에서도 점점 멀어지게 되고 앞쪽의 사람들은 다시 뒤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뒤쪽의 사람들이 전진하는 것을 막는다.
커티스가 엔진을 차지하고 그 열차를 계속 움직이게 하려면 그 역시 윌포드가 그랬던 것처럼 '균형'을 맞추고 필요한 노동력을 얻기 위해 꼬리칸으로 밀려난 사람들에게 또같은 희생을 요구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꼬리칸과 앞칸의 사람들이 입장만 바뀐다고 해서 열차 안에서 진정한 평화, 정의, 평등이 이루어지게 되었을까? 진정으로 사람들이 필요한 희망과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
난 개인적으로 그것은 이제껏 인류가 고통받아 왔고 지금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문제의 축소판일 뿐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 속에서 우리 사회가 가진 부조리한 모순들과 갈등들이 장르의 특성 상 매우 강렬하고 충격적으로 표현되었을 뿐 영화가 말하고자 한 이야기는 납득할만한 개연성과 현실성을 충분히 지닌 것이었다. 그래서 그 영화가 내게 더욱 끔찍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영화 초반 '저렇게 삶을 이어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 열차 안의 삶은 이미 정지된 시간의 무한한 반복일 뿐인데 구태여 그 고통과 비참함을 연장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죽음이 오히려 탈출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영화가 결말에 이르자 비로소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영화의 결말이 보여주는 희망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그리고 그제서야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비참하고 끔찍한 삶이지만 이미 익숙한 상황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주춤거리게 하는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새로운 선택이, 용기가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못한 상황에 빠져 들게 할까봐 두려울 때가 많다.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또 이 길이 옳지 않다고 끊임없이 내 안의 어떤 목소리가 말하지만 모두가 가는 길에서 벗어날 때 느끼게 될 고독과 외로움이 더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그 길을 벗어나 자신만의 길, 없은 길을 헤치고 만들어 가며 가는 길 위에 비로소 작은 희망이 피어난다고 영화는 내게 말하는 듯했다.
이미 정해진 길을 따라 앞으로 가는 것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길 역시 누군가가 길을 만들기 전에는 길이 아니었다고, 늘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고, 위험부담이 있어도, 늘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해 올지라도 내 길을 내가 만들어가며 갈 수 있다면 삶은 그 모습을 찾아갈 것이라고 내게 말하는 듯했다.
커티스가 윌포드와 마주 한 상황에서 커티스가 겪은 혼란과 고통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두려움과 윌포드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선택을 했을 때 무척 안도했다. 결국 그는 그를 계속 앞칸으로 전진하게 했던 고통스러운 과거 기억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남궁민수의 예상치 못했던 선택은 답이 없을 것만 같던 영화의 결말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풀어 나갔다. 영화 초반 멈출 수 없었던 내 의문은 그 결말을 통해 답을 찾은 셈이 되었고 감독의 의도를 크게 오해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영화의 결말은 윌포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랬던 견고한 그들만의 세상, 살아 남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 유일하고 절대적인 방법이라고 믿었던 세상에 마침내 종말을 고한 셈이 되었으나 한편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고통스럽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꿈을 꾸는 혁명!
<설국열차>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 속에서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으나 오랫동안 잊혀져서 이제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던 우리 안의 어떤 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늘 익숙한 방향으로 열리는 문이 아니라 우리를 가두고 있는 장벽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에 대해, 그 문을 여는 우리 안의 혁명에 대해서 말하는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는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거리들을 많이 담고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즐기기에는 다소 불편한 영화이지만, 여러 모로 매우 잘 만들어진 멋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뛰어난 영화를 보고 김밥 옆구리 터지는 이야기 밖에 할 수 없다면 좀 안타까운 일이다. 봉준호 감독,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