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은 하늘이 서울에 내린 축복이다. 서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산이라 어디를 가건 쉽게 볼 수 있다. 방향에 따라 잘 깎아놓은 삼각형 같기도 하고 굼실굼실 기어가는 누에 같기도 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현대의 도시에서 한결같은 표정으로 같은 자리에 있는 '기댈 언덕' 남산은 두툼한 녹색 품으로 우리를 무척 푸근하게 안아준다.

남산을 삥 둘러 많은 사람이 기대어 살고 있다. 미쭉하고 빤드르르한 집들이 언덕을 올라타고 있는 한남동 이태원으로부터, 초록색 실몽당이처럼 군데군데 빈 땅이 더 많아 한적한 느낌이 드는 용산, 굴곡진 길들을 따라 집들이 그득그득 들어차 있는 후암동, 해방촌 등등 무척이나 많은 동네와 집들이 어미 배에 매달려 있는 강아지들처럼 모여 있다.

예장동, 필동, 남산동 등 남산골이라 불리는 동네도 남산의 넉넉한 품안에 피어난 동네다. 남산 북사면에서 서울의 중심으로 흘러내릴 듯한 지형에 모여 있는 이 동네를 조선시대에는 남촌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남산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이야 남산이 서울의 한중심이지만, 예전에는 서울의 지리적 경계는 사대문 안쪽까지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남산골은 궁궐과 먼 변두리였다. 궁궐과 가까운 북촌에는 권세가 높고 돈이 많은 세도가들이 살았고, 궁궐과 멀었던 남산골에는 자존심은 강하지만 재산도 별로 없고 벼슬도 낮거나 아예 없는 '취준생' 선비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그래서 남산골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대표적인 말이 '남산골샌님 역적 바라듯'이라는 속담과 '남산골 딸깍발이'라는 말이다. '남산골샌님 역적 바라듯'이라는 속담은 일생 매달려 공부를 해도 벼슬길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한 남산골샌님이, 혹시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기존의 벼슬아치들이 쫓겨나고 그 기회에 벼슬자리나 하나 얻을 수 있지 않나 하며 바란다는 뜻이란다. 말하자면 가망도 없는 일이 성사되길 바라며 터무니없는 요행수를 꿈꾼다는 의미이다.

'남산골 딸깍발이'라는 말은 가진 것은 없으며 자존심만 강한 남산골샌님들을 일컫는 말인데, 이희승 선생이 쓰신 '딸깍발이'라는 수필에 그 연유가 잘 나와 있다.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골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別號)가 생겼느냐 하면, 남산골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혀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이 지은 소설 '허생전'에서 주인공 허생이 부인의 구박 속에서도 꿋꿋이 7년 동안 공부했던 장소가 바로 남산골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남산골에 살았던 샌님들은 무척 독특하고 고지식하지만 밉지 않은 캐릭터를 가진 이들이었던 모양이다.

남산골은 일본이 조선을 억누르며 제일 먼저 개조한 곳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은 남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현저동으로 쫓아내고, 산 중턱까지 무지막지한 1자 계단을 설치하고는 그 끄트머리에 '조선신궁'이라는 일본식 사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남산 주변으로 일본인들이 사는 마을을 만든다. 이후 명동, 충무로는 일본인들의 본거지가 되어 그들이 끌고 다니는 게다(下�) 소리가 요란했을 것이다.

이후 해방이 되며 남산골은 빠르게 변모한다. 국가기관이 들어오고 학교들이 들어오며 또 다른 풍경이 만들어졌다. 서울예술전문학교 등의 교육기관들과 수도방위사령부, 중앙정보부 등의 정부기관들이 군데군데 들어섰으며, 서울 시민들을 위해 케이블카가 설치되고 남산타워와 야외음악당, 어린이회관 등이 지어진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군부대도 떠나고 남산 1호 터널 근처에 있었던 중앙정보부도 떠난다. 그리고 그곳들은 이제 문화적인 장소로 치환되고 있다. 마치 아린 상처를 덮고 치유하는 연고처럼 문화는 남산의 상처를 덮어주고 있다.

그런 변화 속에서도 남산골의 풍경은 큰 차이가 없다. 그 안의 내용들이 바뀌었지만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고 야트막한 건물들이 있는 풍경은, 그 밀도는 여전하다. 그래서 나는 간혹 특별한 일도 없이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내려 남산길을 터덜거리며 걸어 올라가기도 하고 중간중간 트여 있는 작은 골목들을 뒤지고 다니기도 한다. 그 길은 무척 가파르지만 동네 풍경을 보는 재미와, 시점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남산을 보는 맛이 아주 좋다.

그 한가운데에 예장동이 있다. 예장동은 동네의 80퍼센트 정도가 산이다. 나머지 20퍼센트 안에 예전에는 서울예전, 숭의여고, 리라초등학교, 중앙정보부, 그리고 KBS 방송국이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서울시가 운영하는 유스호스텔이 되었고 서울예술전문학교 자리도 학교는 떠나고 극장과 교육원이 되었다. 나는 남산길로 접어들어 KBS가 여의도로 떠난 자리에 들어선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 자주 간다. 그 안에는 나의 낙원이 있기 때문이다. '만화의 집'은 '서울애니메이션센터'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건물인데, 그곳에 가면 아무런 제약 없이 온종일 만화를 볼 수 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어린이들의 꿈은 온종일 아무 간섭 없이 만화를 보는 일일 것이다. 만화의 집에는 만화책이 칸칸이 그득 실려 있다. 그곳에서 한나절 머물며 어릴 때의 꿈을 이룬다. 한참 만화를 보다가 길가에 내놓은 벤치에 앉아 마치 동네 어귀에 세워 놓은 장승처럼 멀뚱하게 서있는 로봇 태권V 모형과 더불어 남산을 바라보거나, 한적한 길을 거닐기도 한다.

추위가 가시고 찾아올 볕이 좋은 어느 봄날, 이제는 남산골샌님들의 딸깍거리는 나막신 소리도 사라지고 일본인의 게다 소리도 사라지고 군화 소리도 사라진 위로 문화라는 포근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남산과 눈을 가늘게 뜨고 마주보며 해바라기를 하고 싶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땅속에는 무척 많은 시간이 쌓여 있다. 도읍이 된 지 600년이 넘은 서울의 사대문 안은 어디를 파보아도 주춧돌부터 시작해서 도자기, 놋그릇 등 다양한 시간의 조각이 흙 속에 잠긴 채 시루떡처럼 쌓여있다고 한다. 그래서 종로통 같은 서울의 중심지는 건물을 짓기 전에 문화재 조사가 선행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서울 명동은 땅을 파지 않아도 시간의 적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꽤 오랫동안 문화와 예술 그리고 젊은이들의 중심지였던 명동에는 무척 많은 시간이 존재하며, 무척 많은 기억이 공존한다. 그것은 대단한 역사적인 유적이나 유물이 아닌 그냥 그곳에서 한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의 기억들이다. 명동이라고 하면 은성주점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돌체다방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며, 또한 쉘부르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모두 다른 기억과 추억의 안경을 쓰고 명동을 회상한다.

나의 명동은 돌체나 쉘부르에 대한 기억은 없고 코스모스 백화점과 엘칸토소극장과 떼아뜨르 추 등의 소극장들과 음악다방들이다. 물론 그 장소들은 이제 그곳에 없다. 다만 명동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는 명동성당이 아직도 언덕에 앉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랜만에 명동에 갔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늘었고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점이 거리를 메우고 있어 예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과 활기가 그득했다.

명동의 중심에는 명동예술극장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명치좌라는 이름의 극장으로 만들어졌고 해방 후 한때 시공관이 되었다가 그 이후 국립극장이었으며, 1970년대에는 금융회사 사옥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은 건물이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유네스코 회관이 있다. 건축가 배기형이 60년대에 설계했고, 당시에 커튼월 공법이라는 새로운 기법으로 지어 화제가 되었다.

명동(明洞)이란 조선시대 한성의 행정구역 49방(坊) 중 하나인 명례방(明禮坊)에서 유래한 것이다. 원래 이곳은 주택지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충무로 일대가 상업지역으로 발전하면서 그 여파로 다방, 카페, 주점 등이 번성한 상업지역으로 변하게 되었다.

명동의 동네 구조는 동서로 굵은 길이 가로지르고, 남북으로 다양한 폭의 여러 길이 나뭇잎의 가느다란 잎맥처럼 가지를 뻗는 모양으로 되어있다. 그중 유네스코 옆길은 가는 줄기 중 하나로 작은 좌판들과 호객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예전에 자주 드나들던 길이라 자연스레 그곳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나의 한때'는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다른 업종과 다른 가게들이 빈틈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길 중간에 만난 지 오래되어 이름도 가물가물한 동창을 만나듯 문득 옛날에 자주 드나들던 다방이 나타났다. 나는 이 다방이 아직도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내가 명동을 한참 드나들던 시절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해방 이후 문인, 화가, 음악가들이 은성주점, 돌체다방, 동방살롱 등을 배경으로 활약하던 시절이 지나고, 1970년대 오비스캐빈, 쉘부르 등 청바지와 통기타로 무장한 젊은 가수와 음악인이 새롭고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시절도 저문 다음 명동이 자본주의적이며 소비적인 장소로 더욱 공고히 자리를 잡을 무렵이었다.

당시 그곳은 문화적인 향기보다는 옷가게와 먹고 마시는 가게들이 즐비했고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했다. 그때 유네스코 회관 옆 좁은 골목으로는 칸막이가 촘촘히 박혀있고 담배연기가 박무처럼 깔려있으며, 유리 상자 안에서 디제이가 하루 종일 팝송을 틀어주는 경양식집들이 잔뜩 있었다. 그곳에서 가끔씩 함박스테이크를 먹었고 돈가스를 먹었고 멕시칸 사라다를 먹으며 맥주도 마셨다. 그 길에 그 다방이 있었다. 그곳에는 커피 위에 뚜껑을 덮듯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띄워놓은 비엔나커피가 있었고, 창문 너머엔 복잡한 거리 골목이 아니라 나무가 가득한 중국 대사관 정원이 있었다. 특히 비 오는 날 그곳에 가서 비엔나커피를 마시며, 초록이 선명해진 대사관의 정원을 보는 것은 무척 이국적이었으며 낭만적인 일이었다. 1977년에 문을 열었다니 벌써 40년이 넘은 곳인데, 우리나라같이 오래된 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나라에서 여전히 버티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여전히 사람들이 무척 많이 있었다. 알고 보니 얼마 전 무척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에 나오는 바람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다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가 조금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편안했고 비엔나커피도 여전히 부드럽고 맛있었다. 다만 중국 대사관을 새로 지으며 창 밖의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나의 안경이 너무 낡아서인지 내 눈앞의 여러 가지 풍경이 눈에 설었다.

문득 1950년대에 동방살롱 앞 빈대떡집에서 시인 박인환과 음악가 이진섭이 즉석에서 짓고 불렀다는 '세월이 가면'이라는 노래 가사의 한 부분이 생각났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명동에는 옛날을 보러 가는 사람이 있고 단지 현재만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이 섞여서 강물처럼 흐른다. 다방을 나오며 문득 고개를 들어 명동의 하늘을 바라봤다. 무수한 간판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국어·영어·일본어·중국어·프랑스어, 심지어 아라비아어까지 세상의 모든 언어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세상의 모든 색이 다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간판을 보며 너무 복잡해서 정신없다 눈을 흘긴다. 그러나 그날 내 눈에 비친 명동의 간판들은 무척 흥미로웠다. 그 복잡함과 그 현란함과 그 유치함이 가득한 다양성은 바로 명동의 얼굴이며 명동의 성격이라고 생각하며 안경을 고쳐 쓰며 한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