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세계명작동화를 읽고 난 후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책이 너무 재미있어’라고 말했고 그녀는 ‘그림이 너무 예뻐’라고 대꾸했다. 나는 백설공주가 독 사과를 먹고 쓰러지는 부분에 꺅!하고 비명소리를 질렀지만 그녀는 왕자님과 백설공주가 행복하게 살았대요하는 순간에 만난 파스텔톤 아우라의 그림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렇게 같은 책을 두고 우리는 서로 다른 감상을 하고 있었고 그로부터 십 수년을 훌쩍 넘긴 지금 나는 여전히 이 책은 재미있네, 없네로 편가르기를 하는 중이고 그녀는...이제 책과는 담을 쌓고 대신 매일 저녁 TV드라마를 보며 남자 주인공들을 흠모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굳이 밝히자면, 그녀는 나의 언니다.

 

식욕만큼이나 왕성한 독서력을 지녔던 나는 책을 빌리기 위해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버스를 오직 한 번만 타도 당도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도서관이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더 멀리 있는 그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유는 하나다. 단지 그곳이 훨씬 크고 책이 많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도서관에 도착해도 책을 고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책은 늘 여러 형태, 다양한 이야기, 알록달록한 그림, 그리고 야리꾸리한 제목으로 날 유혹하고는 했으니까. 그래서 내가 터득한 방법이 하나 있었다. 지금처럼 전자도서관이 아니라 대출카드를 작성해야 했던 그 당시 내가 ‘재미있는 책’을 고르기 위해 생각해 낸 묘안은 그 책 뒷면에 꽂힌 대출카드에 얼마나 많은 흔적이 남겨져 있느냐는 것이었다.(내 기억이 맞다면...)

결과는 생각보다 대 만족이었던 것 같다.

 

오늘 <위험한 독서>에 소개된 ‘위험한 독서’편을 읽고 나니 그때의 내가 불현 듯 생각나기 시작했다. 현실에 있다면 한번쯤 꼭 만나 상담을 청하고픈 독서치료사는 그녀에게 이렇게 제의한다. 당신이 어떤 책을 읽었는지 말해준다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고.그러나 구청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일한다는 그녀는 믿을 수 없이 빈약한 독서기록으로 그를 당황시켰다. 당신을 읽기 위해 막 첫 페이지를 넘기려 했던 독서치료사는 목차도, 일러두기도 누락된 배려 없는 당신 덕분에 오히려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대입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나 역시도 그 옛날, 책 뒤편의 대출카드를 보면서 급하게 휘갈겨지거나 인쇄한 것처럼 또박또박 쓰여진 이름과 날짜들의 기록들을 보면서 이 책을 빌려간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를 은연중에 상상하고는 했었다.

그리하여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었을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었던 것 같다. 그 혹은 그녀는 왜 하필이면 이 책을 골랐을까?라는 궁금증을 시작으로 이 책을 읽고 빌린 다음 책은 무엇이었을까?에 이르렀고, 혹은 이 책을 다 읽기는 한 걸까?...와 같은 그런 물음들을 재생하면서 즐거운 상상을 했던 시간들이었다. 책과 함께 돌아오는 이런 시간들은 그 책을 읽기전의 워밍업 단계라고 해두자. 지금은 그런 상상들을 할 수 없어서 많이 아쉽다는 생각을 문득 해보게 되면서.

 

자,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당신을 읽겠노라 큰 소리 치던 독서치료사는 그녀라는 책에 스스로가 이러저러한 상상력을 불어 넣고 또 그 결과에 따라 요리조리 그녀를 읽어대는 시간들이 점점 즐거워지기 시작한다. 때때로 해독되지 않는 문장들은 추리소설의 단서마냥 그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녀만큼 그는 독자들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이 위험한 독서의 끝은 아직 미완성으로 남겨 두었으니.

이제 그가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했고 독자인 내가 그들을 읽어나갈 차례가 된 것이었다.

 

한 동안 단편소설들을 읽지 않았다. 장편 소설 같은 대서사의 묘미가 없었고 또 그다지 마음에 드는 단편집들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 역시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내가 다시금 단편집을 찾아 읽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고 자극이 되었다. ‘위험한 독서’라는 글을 시작으로 ‘황홀한 사춘기’에 이르는 글들은 한 고비 한 고비 쉬어가는 맛이 청량하기 그지 없었기 때문이다. 산꼭대기를 헉헉 대고 올라가야 뜬 구름이라도 잡을 수 있는 그런 의미 없는 문장들의 나열이 없어도 쉬엄쉬엄 올라간 정상에서 나는 부담 없는 희열의 순간을 만나고는 했다. 사막에 퍼진 모래처럼 수많은 책들 속에서 오늘 한 권의 오아시스를 만났으니 이제 사막을 헤매는 기쁨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보인다. 언젠가 또 다른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된다면 오늘처럼 목마른 갈증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에 들뜨는 기분도 맛본다. 정녕 이 책은 나에게 위험하고도 짜릿한 독서기행의 시작이 되려나 보다...

제목이 참 도발적이다. 책을 펼치기 전 제목만 보고는 성적대상으로 농락당하는 여성들의 비애를 예상해 봤고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닌 여인들의 당당한 홀로서기를 응원하는 글인가 상상도 해 보았다. 어찌되었든 결론은 주제가 그리 가벼운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책의 부제는 ‘세계사 속 여인들의 당당한 외침’임을 표지에서 발견했다. 인류 역사가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건만, 역사 속 여성들을 찾아내고 재조명 하는 작업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것 역시 여권신장의 여파로 봐야 하는 건지 아무튼 근래에 들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많은 연구가들에 의해 뛰어난 리더십과 결단력, 용기를 가진 여성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연구들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책 제목에서 보여진 대로 저자는 남성중심사회에서 꽃이길 거부했던 여성들의 당당한 외침을 담으려 했고, 기존 역사사료에서 볼 수 없었던 진일보한 여성시각을 보여주려 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자가 말한 진일보한 여성으로 재해석된 인물들이 나에게는 제대로 어필된 것 같지는 않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여왕부터 악녀로 세계사의 한 장면을 장식했던 인물에 이르기까지 가히 짐작될만한 여성들이 주로 소개되었고 그녀들의 삶을 여성적 시각으로 다시 바라보는 것 역시 그다지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는 실존 인물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의 한계가 아닐까 싶다. 이미 세상에 알려진 사료들과 서적들을 바탕으로 한 인물을 해석하는 건 큰 틀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없던 일을 지어내는 것도 안 되고 상식을 넘어서는 오류를 범하면서 과하게 진실을 추론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세계사 속에서 당당하게 군림했던 혹은 그동안 집중 조명되었던 남성들 옆에 부수적인 존재가 아닌 독립적인 인물로서 그려진 27명의 여인들을 만나보는 시간들은 즐거웠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같은 여성이 보아도 홀딱 반할만한 리더십과 야망, 결단력 등은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어울리는 멘토로서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공주로 태어난 왕자’라는 소개가 한 치 어긋남이 없었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야기는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 지도자로써 최고의 찬사를 받아내는 모습에서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국민들로부터 ‘훌륭한 여왕 베스’라고 불렸을 만큼 탁월한 정치가요 군주였다.

 

“ 그대들은 나보다 더 좋은 리더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나,

나보다 더 그대들을 사랑하는 리더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본문 중>

 

아, 이러한 그녀의 화답만 읽어도 통치자로써 얼마나 당당하고 멋진 모습일지 가히 상상이 되고도 남음이다. 그렇지만 황후를 몰아내고 자신의 권력욕을 충족시키고자 강보에 싸인 친딸을 죽이고 두 아들마저 독살한 측천무후를 통치력만으로 재평가 하자는 데에는 반대하고 싶다. 인륜을 저버린 행위는 그 어떤 정당성도 확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최고의 여자 이중 스파이라는 마타 하리를 순진하게 희생된 한 여인으로 평가한 이야기와 사랑 때문에 파시스트를 자처한 나치의 영부인 마그다 괴벨스의 삶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연민과 복잡한 감정이 생겨나기도 했다. 진실한 사랑마저도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밖에 없었던 몇 몇 여성들의 삶을 보고 있노라니 이것이 바로 여성이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아이러니인 듯도 하다.

이 책에서 언급된 세계사 속 여성들처럼 앞으로 우리 역사 속에서도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새롭게 탄생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부지런히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 읽어봐야 할 당위성마저 생긴 느낌이다. 그래, 나는 여성이다!라는 당당한 외침을 듣기 위해서라도...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는 말했었다.

‘소설가는 자신의 생애라는 집을 헐어 그 벽돌로 소설이라는 집은 짓는 사람이다.’라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문장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이는 저자가 16인의 반란자들이라 명명한 노벨문학상 작가들이야말로 자신의 뜨거웠던 삶을 헐어 멋진 문학적 집을 완성해냈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작품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기 이전에 그 시대를 살아가는 한 명의 군중이요, 시민이었다. 삶이라는 긴 시간을 통과하면서 보고 듣고 또 느낀 그 모든 것들은 펜 끝에서 흘러나와 동시대의 사람들을 감명시키고 그 어떤 개그프로보다 더 웃기고 기막힌 현실을 마주할 때면 조롱의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풍자는 권력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요. 광대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화형에 처해졌어요. 권력은 유머를 견디지 못해요. 하물며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통치자들조차 마찬가지요. 웃음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줘요. 나한테 주어진 노벨상은 일반 대중의 체념과 권력의 부당함을 기꺼이 보여주려 했던 모든 광대들을 위한 보상이오. ” <다리오 포와의 인터뷰 중>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부당한 권력에 글로써 저항했던 이들에게 명성만큼 끊이지 않는 것이 있었다면 바로 살해위협과 작품에 대한 자국의 서슬퍼런 검열, 그리고 때때로 조국을 등져야 하는 망명생활이었다. 심지어 이집트에서 일고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 열풍에 맞섰던 작가 나기브 마푸즈는 끔찍한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평소처럼 집을 나서던 노작가는 특정 종교 통합주의자가 목에 꽂은 비수를 피하지 못했고 결국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손이 마비되어 글을 쓰는 작가가 펜 조차 잡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오랜 시간의 재활과 연습을 통해 하루에 반시간 정도 펜을 잡아 어린아이처럼 글을 쓰지만 이제는 눈과 귀까지 멀어 작가로의 활동이 거의 불투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다양한 모임에 참석해 오랜 문학적 지인들을 통해 세상과의 소통을 멈추지 않고 있다. 불법적인 테러행위나 반사회적 행동에 대한 노기 띤 목소리에 여전히 힘을 실은 채.

 

나는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세계적인 명성과 위상을 얻은 문학 작가들에게 가지고 있었던 편협한 환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려야 했고 잠깐의 충격으로 머리가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부끄럽게 고백하자면, 나는 노벨문학상이라는 엄청난 타이틀을 거머쥔 작가들이라면 멋진 현대식 저택 안에 자신만의 멋드러진 작업실을 만들어놓고 매일 매일 글쓰기의 달콤쌉싸름한 노곤함을 즐기고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들이 말하는 사회적 정의나 비판의 목소리 정도는 문학적 매개라는 위대한 장치를 통해 너그러이 받아들여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라는 현실에서는...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혁명이야말로 21세기의 현실이라고 말한 영국의 캘리니코스 교수의 말에 이제야 고개가 끄덕여지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산권 붕괴, 자본주의의 승리와 함께 역사 속 혁명은 종결되었다고 선언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이 책을 읽고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이미 세계 곳곳에서 혁명의 불씨가 자라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음에도 나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소수 권력자들에게 편중된 부와 경제 양극화는 결국 미국 월가의 점령시위라는 형태로 발산되었고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각국에서 종교, 경제, 인종 문제로 반인류적 행위가 끊이지를 않고 있다.

이들은 이런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문학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호소한다. 절대로 좌시해서는 안 될 전 지구적 대재앙이고 그것에 경종을 울릴 수 있는 펜의 힘을 결코 놓지 않겠음을 작품으로 표현하면서. 물론 주제 사라마구 같은 작가는 이런 문제에 대한 스스로의 한계를 가감 없이 털어놓기도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은 세상을 바꿀 힘이 없어요.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행복할 거요. <돈키호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햄릿>만 봐도 그렇잖소... 작가는 메시아적이 자세를 취하면 안 돼요. 나는 약속은 하되, 거기에 어떤 희망도 심지 않아요.”라고.

 

그렇다고 문학이 가진 한계성에 조급해하며 낙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문학을 접하고 책으로 엮어진 텍스트를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수줍게나마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멋진 통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 반대편의 어느 작은 나라에서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고, 미디어가 감추었던 진실들에 눈을 뜰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내가 <천개의 찬란한 태양>이라는 책을 읽고 난 후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직시할 수 있었던 것처럼.

 

권력의 꼼수 속에 팩트만을 전달한다는 언론이 자유를 보장받기는커녕 국민의 비웃음거리로 전락된 시대이다. 이런 현실에서 이 작가들이야말로 언론과 사람들이 저버렸을 가장 중요한 사회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끊임없이 진실과 마주서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그동안 내가 그들이 활자로 부활시킨 시대의 이야기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오늘에서야 깨닫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