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해가 저물고 나면 적막한 듯 조용하다.
지나다니는 이도 없고 찾아오는 이도 없다.
해가 짧아져 6시면 깜깜해지는 요즘은 그 적막함이 더 빨리 다가온다.
일을 마치고 골목을 들어서고 마당을 들어설 때면 창문 커튼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줄기가 반갑기가 그지없다.
집에서 나 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발걸음이 더 빨라지곤 한다. 문을 열면 올망졸망 반짝이는 눈으로 나만 바라봐 주는 녀석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보물 세 아이가 활짝 웃어주며 꼭 안아 반겨주는 것만으로도 하루 동안 지친 내 심신은 금세 충전된 건전지 마냥 쌩쌩해진다.

시골마을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아이들은 아빠와 엄마가 오기를 부쩍 더 기다리곤 한다.
조그마한 동네에는 같은 또래 친구를 찾아보기가 힘들뿐더러 돌아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뿐이었다.
시골동네에 아이들보기 귀하다며 예뻐하시지만 아이들 성에는 차지 않는 듯 했다.
그 아이들이 매일같이 참아두었던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하면 저녁 시간은 이내 깊은 밤이 되어 버렸다.
아침이면 분주하게 준비해서 나가고 해 저무는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와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아이들의 허전함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매번 하게 한다.

시골 생활을 한지 1년이 지났을 무렵.
익숙해진 생활속에서 아이들의 일상중 하나는 텔레비전을 틀어놓는 일이었다.
누가 보고 있건 말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조용한 집안에서 텔레비전은 혼자 떠들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다 가끔씩 그 앞에 모여앉아 어린이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때론 연속극도 감상하곤 했다.
공중파 방송채널 뿐인 터라 별달리 볼만한 것이 없을 텐데도 아이들의 시청시간은 점차 길어졌다.
학교에서 내어준 숙제를 하고나서 남는 시간동안 아무생각 없이 텔레비전을 보게 되는 아이들.
해가진 저녁시간이면 무기력해 보이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늦은 저녁시간이나 되어야 일을 끝내고 들어오시는 아빠를 마냥 기다리다 잠이 들어버릴 때가 많았고, 집안일에 바쁜 엄마와 함께 놀고 싶어서 시키지도 않는데 집안일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시골살이를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좀더 빨리 철이 들어버린 것 같았다.

아무생각 없이 텔레비전을 보며 방바닥만 뒹굴뒹굴 굴러다니는 아이들에게 꺼리가 필요했다.
주말,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비료포대를 옆구리에 끼고 다섯명의 가족이 줄을 지어 산으로 올라갔다.
잔디가 촘촘하게 나있는 곳에서 비료포대를 움켜잡고 잔디썰매를 타는 재미는 눈썰매를 타는 재미와 다른 재미가 있었다.
룰루랄라 하하 깔깔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주말이 돌아오면 봄이면 쑥이나 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들로 다니고,
여름이면 벌레들도 잡고 들판에 핀 이름모를 풀꽃들도 뜯고,
가을이면 메뚜기도 잡고 황금빛 논 사이 둑으로 한달음에 내 걸으며 아슬아슬한 달리기 시합도 하고,
겨울이면 눈 내린 날 산등성이에 올라 비료포대 눈썰매도 타고, 바람좋은날이면 연날리기도 하며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주말이면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지만, 주중에는 여전히 아이들은 무기력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와 엄마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거실의 텔레비전을 치우기로 한 것이다. 그나마 있던 텔레비전까지 없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하냐며 울상을 짓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그날 이후 텔레비전이 있던 자리에 책장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휑하니 비어있는 책장. 그 책장에 도서관에게 빌린 책들을 수준별로 3권씩 총 9권을 꽂아두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도 책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 녀석들.
오히려 세 녀석이 모여 나름의 놀이를 만들어 놀고 있었다. 종이를 오려 소꿉장난도하고 레고와 블록으로 전쟁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 굳이 책을 왜 보지 않느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책을 빌린 지 일주일이 되면 도서관에 반납을 하고 다른 책을 다시 9권 대여해와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책이 바뀐 날 ‘새로운 책이네요’하며 인사만 건네줘도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여러 권의 책이 우리 집을 다녀갔다.
아이들의 손길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돌아간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느날 같은 책을 대여해 온 적이 있었다.
그날 큰아이가 지난번과 같은 제목의 책을 다시 빌려온 것 같다며 이야기를 건네 왔다.
제목을 읽어본다는 것을 알게 되니 책을 빌려오는 것이 그리 헛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도 이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세 아이를 모두 데리고 도서관으로 갔다.
각자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보라고 했더니 쭈뼛쭈뼛 거리며 책장 사이를 오가기만 할뿐 책을 덥석 집어오는 녀석이 없었다.
어떤 책이라도 상관없으니 손에 잡히는 데로 꺼내 가자고 이야기를 하자 이내 웃음을 보이고는 정말 제목도 보지 않고 책을 안고 걸어 나왔다.
무슨 책이냐는 것이 뭐 그리 중요 하겠는가.
책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이 중요한거지.
각각 3권의 책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고맙게도 책장을 넘겨보는 녀석들.
난감한 얼굴이 역력하다. 그림동화책만 읽던 녀석이 글만 빼곡하고 그림은 찾아보기도 힘든 책을 읽기란 힘이 들었을게다.
스스로 책을 골라왔으니 읽지 않을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도서관에 다니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책제목도 읽어보고 꺼내어 펼쳐 읽어도 보며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놓았고 주중엔 같이 놀 사람도 없고 할일이 없을 때면 책을 꺼내어 뒤적여 보곤 했다.
가끔은 텔레비전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잠시뿐인 푸념이었다.

날이 갈수록 한권 두 권씩 읽은 책이 늘어나니 정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날그날 읽은 책의 제목과 출판사 그리고 책을 읽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두는 것으로 정리를 시작했다.
책을 읽고도 미쳐 적어두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쌈짓돈을 모아 한달에 한번씩 조그마한 시골서점에서 책도 한권씩 구입했다.
그렇게 구입한 책에는 애착이 가는지 읽고 읽고 또 읽어 너덜너덜해 지기까지 했다.
빌려보는 책의 목록이 한줄씩 늘어나고, 구입한 책들도 책꽂이에 자리를 채워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책도 제법 자리를 차지하고나니 어느 녀석이 어떤책을 읽었는지 한눈에 알아보기가 힘이 들기 시작했다.
늘 옆에 있어준다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터라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을 했다.
그러던 중 조그마한 색스티커를 />
큰아이는 파랑색과 녹색, 둘째아이는 빨강색, 막내아이는 노랑색의 스티커를 선택했다.
일을 마치고 거실에 앉아 책장을 쭉 둘러볼때면 푸른물결, 붉은물결, 노랑물결이 흐믓하게 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을 따로 구분하여 꽂아두지 않은터라 좀더 어려운 책에도 손을 뻗는 작은 아이들이 이해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기의 색스티커를 붙여둔 것도 눈에 띄었다.

하루의 일을 모두 마치고 거실에 둘러앉아 2~3일에 한번씩은 그림동화책을 큰소리로 읽어주곤 했다.
내용도 길지 않고 이해하기 쉬운 책들이라서 반응이 좋다.
책을 읽고나서 이어질 이야기를 상상하여 서로 말해보는 놀이는 나름 재미가 좋았다.
가장 인기있는 놀이는 책에 등장하는 동물들 중 마음에 드는 동물을 선택하여 그림으로 그리고 색칠을 한다음 오려서 책 내용을 바탕으로 연극을 하는 것이다.
짧은 이야기라 금새 연극을 끝내고 나면 역할을 바꿔보기도 하고 책속의 이야기와 다르게 연극을 꾸며보기도 했다.
아이들의 나이차가 있긴 했지만 서로 배려할 수 있고 서로의 수준을 이해하고 도와줄 수도 있어 더 좋다.
책에 거부감이 없어지는 듯 보여 기분 좋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어느날 아침 스쿨버스를 타러 나가기전 시간의 여유가 생긴날.
보통때 같으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을 아이들이 책을 보고 있었다.
한녀석은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보고 또 한녀석은 바닥에 책을 깔고 고개를 푹 수그려 책을 보고, 나머지 한녀석은 드러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렇게 변한 모습이 내 눈앞에 보여지는 것이 익숙치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과의 대화에서도 책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게 되었다.
그러던 하루.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그런다.
요즘 인기있는 프로그램과 가수들 그리고 노래를 모른다고 친구들이 이야기에 끼워주지 않는다며 하소연을 했고, 선생님이 내시는 숙제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해야하는 것도 있다며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속이 많이도 상했는지 입을 쭉빼고 앉은 모습이 이쁘기도 하고 안되어 보이기도 했다.

저녁시간 세아이를 마주하고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텔레비전이 다시 돌아와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텔레비전의 나쁜점과 좋은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다 결론을 내렸다.
교육방송에서 하는 다큐프로그램과 방학생활과 학습에 관련된 것은 마음대로 볼 수 있도록 하기, 쇼나 만화등 꼭 보고싶은 프로그램은 정해놓은 것만 한시간이 넘지 않는 범위에서 보기로 약속했다.
약속을 정해놓긴 했지만 처음부터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잘 지켜지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노력하며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길 바랬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텔레비전을 반가워하는 아이들은 무엇부터 볼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는 것처럼 아이들의 눈은 빛났고 해맑았다.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했지만, 차츰 자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시간만 되면 텔레비전을 보던 아이들이 많이도 바뀌었다.
볕 좋은 날엔 바깥놀이를 즐기고 해가 기울면 집안으로 들어와 책을 보고,
텔레비전에서 본 것들을 책에서 찾아보기도 하고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은 물어도 보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한달에 한번씩 보고 싶은 단행본의 책을 고르는 재미와 자기만의 책이 생긴다는 기쁨을 알게된 녀석들.
한해 두해 모이고 모여 거실도서관이 된 것을 뿌듯해하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는 아이.
봄과 여름이되면 곤충백과사전을 옆구리에 끼고 논과 들 그리고 산을 누비고 다니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집으로와 설명을 늘어놓는 모습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아이들이 열심히 책을 읽으며 책을 가지고 싶어하는 욕심을 채워줄수 없는 것이 늘 아쉽지만, 이쁘게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녀석들을 보면 이 생활에 늘 감사한다.

책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