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샤마의 얼굴에는 조금 전 선원의 얼굴에

   나타났던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이 집에서,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들려온

   새로운 소리에 기이하고 부드럽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전에도 이걸 들은 적이 있는데,

   오래 전에, 아주 오래전에,

   어디서였지?‘

- 이자크 디네센, ‘불멸의 이야기’ 마지막 부분 중에서 -

            


 지금 인용한 이자크 디네센의 ’불멸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누가 만들어내었는가와는 상관없이 이야기가 독자적으로 생명을 얻고 그렇게 그 이야기를 짓거나 옮기는 사람들은 죽어서 사라지지만 이야기는 그와 관계없이 별개로서 영원히 생명을 이어간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성석제의 ’왕을 찾아서’도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소설은 건달들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그러한 이야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에 불과하다. 사실 그 근저에 있는 것은 디자크 아넨센이 주목했던 이야기가 사람에게 주는 매혹과 그 매혹이 커져서 더이상 사람의 힘으론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커져버린 이야기가 가진 힘이다. 다시 말해, 성석제의 ’왕을 찾아서’가 근본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야기’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럼, 그것은 어떤 이야기인가?

 ’내가 사는 ’도시’에서 지역으로 가는 길에는 세가지가 있다.’

 이렇게 소설에서 직접 언급하는 것 처럼, ’왕을 찾아서’에는 대표적인 세 명의 인물이 나온다. 하나는 ’왕’인 그렇게 이미 신화가 되어버린 ’마사오’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가는 자인 ’박재천’이며 마지막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이며 또한 이야기가 다시 새로운 신화로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역사가’로서의 ’장원두’다.
 각각의 인물이 대표하는 것은 또한 이 소설이 핵심적으로 다루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은 총체적으로는 거대한 ’이야기’의 범주에 속하지만 각각 그 특성에 따라서 이야기의 한 분류라고 할 수 있는 ’신화’ ’이야기’ 그리고 ’역사’를 다룬다.

 ’왕을 찾아서’는 신화와 이야기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소설이 표면상 건달들의 세대 교체를 다루듯이 그렇게 신화들의 세대 교체를 다루는 소설이다.

 그럼, ’왕’인 마사오가 대변하는 ’신화’란 무엇인가?

신화(Myth)는 뮈토스(Mythos)라는 말에서 나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뮈토스란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렇게 신화도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유독 구별해서 ’신화’라 부르는 것일까? 그건 신화를 대표한다고 할만한 ’그리스 신화’를 생각하면 답이 나올 것 같다.  그리스 신화의 특징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이 신들을 다룬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신화가 신화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이야기를 누가 지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근원이 부재한다.  신화는 창작자가 지워진, 불현듯 홀로 존재하는 그런 이야기이다. 거기다 그 근원을 알 수 없으니 도대체 이 이야기가 참인지 그른지 사람들이 헤아리기가 어려운 그런 이야기이다. 마치 호메로스 앞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오딧세이’나 ’일리아드’를 듣고 있는 그리스인들 처럼 그 누구도 호메로스 앞에 나서서 ’당신이 하고 있는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야!"라고 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만일 누군가 용기있게 나서서 그런 말을 하더라도 호메로스는 태연한 얼굴로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지? 증명할 수 있나?" 이렇게 묻기만 하면 그를 침묵시켜 버릴 것이다.
 너무도 오래된 전설... 까마득한 이야기... 그건 그리스인들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이미 창작자들은 지워지고 그렇게 이야기만 불멸이 되어 내려오는 이야기... 그래서 후세인들은 도저히 진위여부를 가리지 못하는 그런 이야기를 호메로스는 단순히 시적으로 들려준 것 뿐이었으니까... 그리스인들은 그저 묵묵히 경청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순수하게 이야기에 매혹되고 도취되어 감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바로 신화이다.
 
 ’왕을 찾아서’ 초반 부분은 바로 그러한 ’신화의 시대’를 충실히 재현한다. 성석제는 그 초반부에서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신 마사오의 신화를 하나 하나 들려준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 이야기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않는다는 것, 온전히 그대로 믿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신화의 시대’에 장원두의 말에 따르면 ’왕’인 마사오와 쌍벽을 이룰 만큼 필적할 만한 인물이 또 하나 있었다고 한다. 그가 바로 ’유신조’ . 그를 이르는 별명은 ’대통령’이다.

 왕과 대통령은 모두 통치자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눈에 띄는 것은 유신조가 하는 행동인데 그는 자기만의 공책에 온갖 ’세상에 대한 권고, 호소, 주장’들을 쓴다. 마사오의 신화가 지배하는 시대에 유신조는 유일하게 말을 만들어내는,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여기서 ’대통령’이 무얼 의미하는 지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신화가 아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존재’에 붙이는 이름이라는 것...

 즉, 성석제는 ’신화의 시대’에 이미 신화와 이야기의 대립관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이 대립관계는 소설 전체를 통해 계속 이어진다. 왜 이야기는 신화와 대립하는가? 그것은 물론 이 소설만의 편의상 구분이며 지극히 내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아무튼 그것은 이야기는 신화와는 달리 만든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엔 확실한 ’창작자’가 있다. 창작자가 있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이야기로만 생산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거기엔 분명 어떤 의도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영원히 계속되지도 않는다. 언제든 목적만 이루면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왕은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죽을때까지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왕은 ’종신직’이다. 그처럼 신화 또한 오래도록 이어진다. 하지만 대통령은 임기 때 마다 바뀌는 ’임시직’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목적만 이루면 사라진다.  그래서 이야기는 ’임시직’인 대통령에 그야말로 딱 어울리는 것이다. 소설 중반 이야기를 짓는 자 박재천의 이야기가 초반 마사오 처럼 전개되는 부분에서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의 측면을 아주 잘 볼 수 있다. 장원두는 박재천이 어떻게 이야기를 지어내어 자기가 원했던 것을 얻었는가를 상세하게 기술한다. 구슬, 우표, 텔레비젼 등등 그 모든 것에서 그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이야기를 지었다. 이렇게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가 아닌 그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된다.

 신화가 사람들을 매혹시킨다면 이렇게 이야기는 사람들을 ’현혹’시켜 목적된 것을 이루게 한다. 때문에 이야기 자체로서 존재하는 신화와는 대립관계를 이룰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을 찾아서’는 애초부터 이러한 신화와 이야기의 대립관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아직은 굳건한 신화의 시대에 이야기는 아무래도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유신조는 돌아다니며 빌어먹는 거지이고 그는 다리 밑에 웅크린 채 지낸다. 그는 그렇게 하나의 얼룩으로 마사오의 시대에 존재한다. 그런데 예리하게도 성석제는 그러한 ’대통령’- ’이야기’의 존재에 60년대에 청와대를 공격하기 위해 북에서 내려온 무장공비의 이름을 연상키는 듯한 ’유신조’를 주었다. 그리고 마사오라는 이름은 바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그토록 감추고 싶었던 일본 이름 ’다카키 마사오’에서 따온 것이다. 박정희와 유신조의 대립은 더욱 더 이야기가 신화의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려준다. 즉, 이야기는 신화의 시대에 균열을 일으키는 ’테러리스트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사오의 신화적 시대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의 복선이 된다. 어차피 시간은 계속 흘러갈 것이고 마사오는 늙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집적된 신화의 시대도 저물어 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신화의 시대에 균열을 일으키는 테러리스트적 존재, 즉 이야기가 날로 날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신조를 계승하는 ’이야기를 짓는 자’가 등장한다. 그가 바로 박재천이다. 소설 초반에 유신조의 공책을 잡는 것은 바로 박재천이다. 그리고 그 날 유신조를 피하다가 똥통에 빠진다. 박재천이 가장 증오하는 것이 바로 똥과 콩나물인데, 아이러니 하게도 현재의 거구의 몸을 만든 것은 바로 증오하는 콩나물이었다. 콩나물은 그렇게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또 양육의 자양분이었다. 그렇다면 똥 역시도 그럴 것이다. 이 똥은 바로 유신조와 이어지는 그렇게 이야기의 계승자라는 걸 뜻한다. 그렇게 박재천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힘을 키워간다.


 중반부, 그러니까 장원두가 마사오의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다시 그 옛날의 방둑으로 가는 지점에서 소설은 이제 신화의 시대를 지나 이야기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것은 일종의 ’2막’으로 신화들의 세대 교체에 있어 그 과도기라고 할 만하다.

 거기서는 이제 하나의 단일한 세계였던 마사오의 신화의 시대가 낱낱이 찢겨가고 있음을 본다.  거대한 줄기는 물론 박재천이 어떻게 이야기를 지어 스스로를 점점 키워가는가 이지만,
 그 말고도 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한다. 상수, 조창용, 양희안, 황포 등등... 이것은 앞서 신화의 시대 ’1막’에 장례식장을 찾아온 마사오의 부하들과 친구들의 일화를 묘사하는 것과 중복되는데 하지만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즉, 신화의 시대 인물군들과 이야기의 시대 인물군들의 대조이다. 그 대조를 더욱 더 뚜렷하게 하기 위해 성석제는 서술 방법마저 달리한다. 신화의 시대 인물군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온갖 과장된 미사여구들이 쓰이지만 이야기의 시대 인물군들은 그냥 보통의 서술 기법을 쓰는 것이다. 게다가 형식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신화의 시대 인물군들은 마사오를 정점으로 하나로 뭉쳐있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이야기시대의 인물군들은 늘상 대립과 반목 그리고 배신과 좌절 뿐이다. 따라서 이로서 분명해진다. 이야기의 시대, 하나의 신화에서 다른 하나의 신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시대는 그야말로 모두가 낱낱이 찢겨 나가는 군웅할거의 시대라는 것이다. 그 시대를 소설은 이렇게 표현한다.
 
 ’조직의 시대가 왔다. 칼의 시대가 왔다. 사업의 시대가 왔다. 관리의 시대가 왔다’

 오로지 하나였고 그 자체가 목적이었으며 저절로 존재했던 신화로서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합집산이 되고 수단이 되고 의도가 판을 치며 통제를 해야 하는 이야기의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박재천은 마사오처럼 가만히 있어도 신화가 된 양희안 이나 스스로 마사오가 되기 위해 어떠한 간계도 다 썼던 조창용 같은 거물은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소문을 만들고 그렇게 이야기를 지어내어 어떻게든 그의 존재감을 키워가게 된다.

  이제 최종적 3막,

 늘 각 막들은 한 개인의 이야기를 길게 서술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했다. 1막 신화의 시대는 마사오의 이야기를 2막 이야기의 시대는 박재천의 이야기를 이렇게 말이다. 따라서 3막의 시작은 역시 마지막 남은 중요한 인물인 화자 ’장원두’의 이야기가 길게 나오는 부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마사오가 박재천의 간계에 빠져 영원히 그 ’지역’을 떠나버린, 그렇게 신화의 시대가 박재천의 이야기에 의해서 완전히 종말을 맞은 그 뒤에 바로 다음 장인 - 세희와 창용의 과거가 등장하는 바로 그 장이 바로 3막의 시작이 될 것이다.

 이렇게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희의 이야기로 먼저 등장하는 것은 그가 맡은 역할이 바로 ’역사가’ 이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자신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쓰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타인을 중심에 놓고 쓴다. 그래서 장원두는 자신의 얘기가 나와야 할 부분에 세희의 과거지사를 세세하게 열거하는 것이다. 창용과의 야반도주, 대경의 세희에 대한 짝사랑 등등을... 그리고 나서 자신과 있었던 짧게 비극적으로 끝나버린 연애담을 쓰면서 쓸적 자신의 존재를 삽입하는 것이다. 그렇게 장원두는 이 소설에서 역사가이다.  이 소설의 화자가 그인 이유도 바로 ’역사가’이기 때문이다. 그건 소설에서 그 역시 직접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없는 사실을 증언할 만한 소설가적 소질이 없었다. 내 기질은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중얼중얼해 가며 사실의 전말을 기록하는 역사가에 가까웠다.’

 그런데 성석제는 초반에 장원두와 박재천이 한날 한시에 같은 사주팔자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그렇게 박재천과 장원두는 사실 하나인 존재라고...
 이야기를 짓는 자인 박재천과 역사를 기록하는 자인 장원두가 하나라는 것은 이야기와 역사가 일치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역사를 뜻하는 HISTORY도 원래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불어는 더욱 더 둘의 의미가 같다. 역사도 본질적으로 이야기이다. 최초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헤르도토스의 HISTORIES도 사실은 그렇게 이야기의 집적이라는 뜻이 강했다. 아무튼 역사가로서 장원두는 단순히 이야기를 기록하는 자만은 아니다. E.H 카 가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했듯이 그 역시 일어난 일을 가지고 그렇게 질문을 하고 응답을 하듯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자이다. 때문에 성석제는 이 둘이 사실은 공동 운명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장원두는 이미 마사오의 신화의 시대 때부터 그러한 흔적을 보여왔다. 마사오가 탈영하게 되는 이야기에서 다른 버전들을 삽입하는 것으로... 그러다 이야기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박재천이 마사오를 함정에 빠뜨리는 부분에서 나름의 창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뒤이은 세희의 과거 이야기에서는 더욱 더 일취월장해 진다.

 그는 역사가다. 그는 기록자다. 그렇게 또한 그는 목격자다.
 소설의 중반 그러니까 양희안과 박재천이 싸움 끝에 크게 다치고 병원에 실려나가 장원두가 피를 나누어 주는 장면은 지금까지 얘기해온 ’신화’ ’이야기’ 그리고 ’역사’가 그야말로 삼위일체를 이루는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양희안은 그 스스로 원하지 않았어도 사람들에 의해 마사오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렇게 그는 신화가 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역사가로서 장원두가 어떤 역할을 맡는지 확연히 드러나기도 한다. 그렇게 장원두는, 역사가는 신화와 이야기에게 피를 나누어 주는, 그렇게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인 것이다.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문자 그대로 삶을 이어가게 해주는 것으로 당연히 신화와 이야기들이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걸 뜻한다. 그는 ’왕을 찾아서’를 기록했고 그렇게 해서 신화와 이야기의 시대를 우리들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가는 그저 기록만 하지 않는다. 그는 판단 역시 한다. 어떤 시대가 좋고 어떤 시대가 나쁜가 나름의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피를 나누어주는 장면에서 장원두는 양희안에게는 기꺼이 피를 나누어주지만 박재천에게는 거절한다. 물론 그 자신 위험할지도 몰라서 그랬긴 하지만 결국 삐치는 박재천을 보고 다시 나누어주는 것을 보면 꼭 그것만은 아닌 듯 하다. 그는 박재천의 사람됨을 알기에 피를 나누어주기 싫었던 것이다. 결국 가장 나중에 실려온 대경은 신화도 이야기 그 무엇도 아니기에 피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달아나 버린다.

 그렇게 장원두가 피를 나눠주고 말고를 결정하듯 역사가는 어떤 시대가 가치가 있고 없는지 판단을 내린다. 장원두는 박재천에게 피를 나눠주기 싫어했다. 그것은 역사가로서의 그가 박재천이 의미하는 ’이야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 박재천에게서 마사오의 부음을 듣고 그의 가장 오래되고 영원한 왕이 떠났음을 알고 슬퍼한다. 그리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도중 아무나 잡고 때리고 싶을 정도로 상실에서 오는 분노를 느낀다. 그는 그만큼 마사오를 아낀다. 아니 그가 상징하는 신화의 시대를...

 그는 왜 그렇게 마사오를 사랑하는가? 그것은 마사오가 ’대낮처럼 밝고 태양처럼 비밀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마사오의 신화적 세계는 언제나 밝음으로 가득하다. 장원두에게 처음으로 성을 일깨워주고, 그렇게 정신적으로 고양시키고 그리고 떡을 줌으로서 육체적으로 양육까지 시켰던 마사오의 연인, 광자 역시 빛 광(光)자를 쓴다.(그 광자는 마사오를 마치 엄마가 자식을 부르듯 언제나 ’그 아이’라고 칭한다.) 보다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신화의 시대에서 이야기의 시대로 넘어가는 접점인 그러니까 장원두가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예전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방죽에서 그 강의 상류에 있다는 전설의 황금동굴을 떠 올릴 때이다. 그 가득한 황금으로 빛나는 눈부신 동굴... 그것이 바로 장원두가 생각하는 마사오의 시대인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 시대로 넘어가는 접점에서 마치 그것을 그대로 의미하기라도 하듯 장원두는 그 황금동굴의 금이 천천히 바깥으로 빠져나가 결국은 망해버린 역사를 기술한다. 그것은 그대로 단일한 세계였던 마사오의 시대가 점점 증가하는 이야기로 인해 사멸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옛날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다니던 그 방죽으로 생생 오토바이를 탄 일단의 년 무리들이 자기에게로 오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마사오와 유신조, 왕과 대통령이라는 신화와 이야기의 인격적 상징은 이제 이 지점에서 자전거와 오토바이라는 물적 상징이 된다. 이렇게 상징들이 물화(物化)되는 것은 이야기 시대에 접어들어 이야기의 성격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야기는 그 자체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수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물적 상징들이 모두 탈것이라는, 그렇게 어딘가로 데려가는 것들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건 그렇게 이야기 역시도 사람들을 현혹시켜 목적한 곳으로 데려가려는 수단으로서의 ’탈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에 대한 강조이다.
  이제 신화는 ’자전거’가 되어, 그렇게 느리고 답답한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밖에는 되지 못한다. 이야기의 시대에 중요한 것은 이야기에 매혹되듯이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느냐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더이상 이야기는 향유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제 시대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신화속의 황금도시는 박재천이 침을 튀기며 말하던 ’머나먼 엘도라도’가 되어 버렸다. 그가 열심히 설명하던 ’머나먼 엘도라도’는 그러나 실제 영화를 보니 완전 거짓이었다. 그러니 온전히 환한 햇볕안에 드러나는 마사오의 시대를 더욱 더 사랑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장원두가 마사오의 시대를 사랑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렇게 시대가 환한 햇살안에 온전히 노출되어 있어서 이쪽 저쪽 할 것 없이 완전히 다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휴게소의 망원경을 이쪽 저쪽 모두 돌릴 수 있는 것 처럼 그 모든 방향에서 사건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역사가의 이상이기도 하다.  역사가에게 모든 방향에서의 관찰은 또한 모든 해석의 가능성마저 가져다준다. 그렇게 역사가 자신도 그만의 이야기를 무궁무진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박재천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시대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의도를 가지고 있고 어디까지나 사람을 현혹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 마저 모조리 박재천, 그렇게 ’이야기를 만든자’에게만 있게 되기 때문이다. 소설 후반, 그저 박재천에게 끌려다니며 그가 보여주는 것만 볼 수 밖에 없었던 장원두 처럼 역사가 역시도 그렇게 되면 이야기의 창작자가 보여주는 것만 볼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역사가는 박재천에게 놀아나는 장원두 처럼 창작자에게 놀아나는 꼭둑각시가 되는 것이다.

 3막은 결국 새로이 하나의 신화가 정착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제 새로운 신화가 되려는 때 역사가인 장원두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마사오에게 하듯이, 예전의 재천에게 하듯이 그리고 세희에게 하듯이 자신의 자의적인 이야기를 끼워넣을 수 없었다. 오로지 남은 것은 그의 조종하에 무기력하게 끌려 다니는 게 전부였다. 더구나 성석제는 신화의 시대에 병원에 갇힌 마사오를 위해 사람들이 일어섰던 것과 후반부 박재천이 이제 마사오가 되기 위해 거대한 거짓말로서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을 대비해 보여준다. 여기서 신화와 이야기가 각각 가지는 ’매혹’과 ’현혹’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사람들이 마사오를 위해 일어섰던 것은 마사오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해주었던 이야기에 매혹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냥 이야기를 들었고 오로지 자의에 의해 일어섰었다. 그러나 후반의 박재천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그들을 현혹한다. 그 목적은 자신이 마사오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위해 그는 역사가인 장원두마저 이용한다.

 현실적인 역사에서도 새로이 권력을 잡은 무리들은 종종 역사가를 이용해 그들의 정권장악을 정당화시켜 왔었다. 박재천은 바로 그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의의 여지가 없는 장원두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 결국 모든 일은 박재천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거짓의 이야기가 새로이 신화로 자리잡는 시대에 역사는 무력해진다.
 그러니 어찌 장원두가 마사오를 자신의 영원한 왕으로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한 거짓의 신화가 만들어진 지역은 이제 대낮처럼 밝지가 않다. 장원두는 이미 그걸 마사오가 사리진 그 ’지역’으로 갈 때 부터 나타내고 있었다. 그 지역으로 가는 버스의 운전사는 끊임없이 졸고 그 지역은 ’비안개’로 흐릿해져 있기까지 하다고. 마지막 그 지역을 떠나면서 그가 보는 것도 역시 그 비안개에 가리워진 ’지역’의 모습이다. 그는 한 쪽 밖에는 보지 못하는 망원경에 대해 불평한다. 박재천이 다스리는 그 ’지역’ 역시 그 망원경 처럼 오로지 박재천이 보여주는 것 밖에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감상을 말하자면 나에겐 물론 놀라운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죽 써 온 그대로 신화와 이야기 그리고 역사라는 말하기엔 아무래도 버거운 주제를 가지고 어쩌면 이렇게 탁월하게 문학적으로 형상해 놓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 왜 성석제는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일까가 궁금해졌다. 
 

  ‘왕을 찾아서’의 왕 ‘마사오’의 본명은 박정부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장원두가 그의 부음을 전해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성석제는 여기서 그의 죽음을 알려주는 사람의 목소리가 마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밀실에서 심복 부하의 총을 맞고 숨져간 어느 독재자의 장례 행렬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울음소리’처럼 과장되어 있었다고 굳이 표현한다. 여기서 ’굳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내게 이건 어떤 명백한 의도가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문장으로서 마사오가 정말은 누구를 말하는지 알려주려는 것 같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마사오란 박정희의 일본 이름 다카키 마사오에서 온 것이다. 그렇다면 성석제가 왜 이 소설을 통해 신화와 이야기 그리고 역사를 이야기 하는 가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은 풀릴 것도 같다. 
  아마도 그가 이 소설을 통해 궁극적으로 건드리고 있는 것은 바로 아직도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박정희 신화’일 것이다. 게다가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마사오의 신화가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 처럼 아주 막강한 영향력까지 미치고 있다. 급기야는 뚜렷한 아무런 성과를 내지 않았는데도 단지 그 신화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력한 대선후보로 거론되면서 압도적인 지지까지 받도록 만든다. 도대체 이 신화는 어떻게 하여 이토록이나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신화는 어떻게 해서 나타난 것일까? 아마도 이런 의문들을 소설을 통해 풀어보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소설은 15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불현듯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지만 그 어느 때 보다 시의적절하게 우리에게 온 것으로 보인다. 이제 내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대선을 위한 궤도에 올라서면 더욱 더 가열차게 박정희 신화가 재생산되고 훨훨 타오르면서 그 존재감을 만천하에 드러낼 것이다. 그 존재감에 무방비하게 압도되기 전에 이 소설로 이미 예방주사를 맞아 놓는건 어떨까? 그렇다면 아마도 정말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보다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되지 않을까 한다.

왕을찾아서

 1. 영원히 잃어버린 '소년' 시절

 은희경의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를 새해 처음으로 읽었다.
몰랐는데, 5년만의 신작이라고 한다. 벌써 5년이라니? 어느새 또 그렇게 세월이 흘렀나 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 해를 넘겼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서 있던 그 날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라는 소설에 나오는 G-그리핀의 노래 가사 처럼 난 또 그만큼 소년에서 멀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 
 혹시 린타로가 감독한 ’은하철도999’ 극장판을 본 적이 있는지?
 본 적이 있다면 그 영화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지?  마지막은 이렇다.
 어쩔 수 없이 메텔과 헤어져야만 하는 철이는 이윽고 메텔이 탄 기차가 점점 멀어지자 마구 따라 뛰어간다. 애타게 메텔의 이름을 부르며... 두 눈 가득 눈물을 흘리면서... 하지만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절규하듯 소리쳐도 메텔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우주 저 편으로 사라지는 기차의 이별을 통보하는 듯한 비정한 기적소리 뿐...
 가버린다.... 그렇게 사라진다.... 영원히...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 속에 그런 느낌이 가득찬다. 영원한 상실감... 그래서 혹시 감독인 린 타로 자신도 이 '철이'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년 시절에 대해서 울부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여기서 말이지만, 린 타로의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은 어린 시절 그 만화를 보면서 우주의 동경을 꿈꾸던, 이제는 어른이 되어 버린 그 시절의 소년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 시절 열광했었던 만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그 시절의 기분을 맛볼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메텔’은 우리가 소년시절에 한번쯤 꿈꾸어봄직 했던 이상화된 첫사랑의 ’연인’으로 ’은하철도 999’는 '소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이 모험으로 나타나 주었던 그 시절의 ’낭만’ 으로 체화된다. 그 시절 소년이었던 우리들이 어떤 것들을 느꼈는지 새삼 깨닫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우주 저편으로 가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소설 속 '태수'처럼...
그 때문일까?
실은 나도 메텔을 애타게 부르며 울면서 달리는 철이의 모습과 저 먼 우주 속으로 가느다란 실이 되어 끝끝내 사라지는 은하철도 999를 보면서 울었던 것 같다.
 이제 우리의 소년 시절은 완전히 끝났어... 하면서... 이건 진짜다.


 때문에 나는 솔직히 이 소설 읽기가 아주 힘들었다.
여기엔 이제 내게는 다시 오지 않을 그 소년 시절이 활짝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영원히 허락되지 않을 시간들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연우가 아무리 힘들어도 태수가 아무리 방황해도 채영이 아무리 고독해도... 내게 느껴지는 건, 감정에 이입되기 보다는 때로는 질투심으로 까지 변질되곤 하는 부러움이 만들어 낸 거리감이었다. 딱 김종삼 시에 나오는 화려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아 든 아주 가난한 아이 같았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 덕분에 자신의 초라함만 더욱 더 강조되는...  
게다가 위로를 바란다는 연우는 내가 보기에 정말 멋진 엄마에 듬직하고 의리있는 친구에 거기다 매력적인 연인까지... 소년 시절의 우리들이 한번쯤 꿈꾸어보곤 했을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기까지 했으니, 정작 소년시절 그 무엇하나 가져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오히려 거꾸로 내가 연우에게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2. 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해줘야 하나?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해줘야 하나?
 나는 완전히 폼 좀 잡으려다 무리해서는 결국 마라톤을 포기하고 '회수버스'에 실려오면서 차창 밖으로 열심히 완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치욕의 쓰라림을 느끼고 있는 재욱 딱 그 꼴인데 말이다. 그 때의 재욱처럼 그렇게 나 역시 완주를 해낸 연우에게 오히려 위로를 구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부턴, 채영의 아버지처럼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이미 입어버린 그리고 길들여져 벗기도 힘이드는 우리 세대의 하소연을 좀 하려고 한다.

 17살... 소설속 연우의 나이... 부끄럽지만 내겐 그 때의 추억이 별로 없다.
억지로 떠올려봐도 나타나는 건 그저 새벽별 보기 운동이라도 하듯 학교로 가고 다시 그 학교에서 학원으로 그리고 별도 없는 어둔 밤, 가로등 불빛을 축쳐진 어깨로 힘없이 받으며 귀가하는 그런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만 그득할 뿐이다. 가슴 설레는 '풋풋한 첫사랑'은 커녕 사진첩에 끼워두고 이따금 펼쳐보며 흐뭇해질 수 있는 추억 조차 변변찮다. 일본 영화에서 흔히 가장 눈부신 '여름'으로도 표현되곤 하는 십대 후반의 청춘이란 게 가질 수 있는 낭만은 그저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불확실한 미래에 모든 것을 걸고 엎드리면 내 상반신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작은 책상에 붙박히는 것 뿐이었다.
 물론 이탈과 탈주의 유혹과 욕구는 언제든 있었으나, 평범한 가정에 평범한 성격으로 태어난 죄로 그마저도 상상적으로 충족할 뿐, 부모와 선생님으로 그렇게 이중으로 둘러싼, 넘어야 할 울타리의 벽은 언제나 높았다.
 용기가 없었다고 말을 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 자신의 말이 아니라 어른들의 말을 읽고 입안에 머금고 채 되새기도 전에 서둘러 뇌리속에 새겨야 했던 우리들이 할 수 있었던게 뭐가 있었을까? 그렇게 뇌리에 새겨진 그 말들을 우리 자신의 말인양 착각하고 읊조리던 우리들이 그런 용기를 만들어내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우리에 오래도록 갇히면 우리 자체가 온전한 세계가 된다.
 연우는 스스로를 '도화선이 없는 폭발물'이라고 불렀지만, 우리는 아예 불발탄이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핑크 플로이드의 영화 'THE WALL'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의 벽돌이 되어 들어갈 자리에 딱 알맞게 들어가 하나의 벽이 되는 게 전부였었다.
그렇게 재욱이 말했던 안전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어른들이 먹기 좋은 소시지가 되는 것... 그게 흔히 '모범생'이라는 태그가 붙어지던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전부였다.
 그렇게 연우가 G-그리핀의 말이지만 어쨌든 그래도 자신의 말로, 관계로, 형형색색의 계절의 색깔로 채워가던 그 시기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우리들에게는 그저 커다란 공백에 불과했다.
 그러니, 정작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때문에 나는 소설 속 '마리'에게 더욱 더 연민을 느끼게 된다.
 '모범생'의 태그를 붙인, 좋아하는 연우와 이어지지도 못하고(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게 그저 우는 것 밖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애처롭던지.) 사실은 자신의 정답만 강요할 뿐인 엄마의 기대에 맞춰 살아야 하고 이제는 어쩌면 유일한 의지처였을 수도 있는 오빠 태수 마저 잃어버린 마리에게 내가 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커다란 위로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오빠를 잃고 난 후의 마리는 지나가는 이야기로도 나오지 않으니, 어깨라도 토닥이려 들어올린 손을 어떻게 내려야 할 지 난처할 뿐이다.

 물론 작가가 이 소설에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이해가 간다. 자의든 타의든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독과 아픔들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며 나 역시 연우와 채영 그리고 엄마 신민아와 재욱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사물엔 언제나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위로 또한 시스템 바깥 뿐만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게 아닐까? 다행히 작가는 채영의 아버지와 마리의 속내를 밝혀 그 내부의 자들에게 까지 배려해 놓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소설은 내게 온전히 질투의 산물이 될 뻔 했으리라.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처럼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한 번 선택해서 간 길을 다시 되돌아 와 다시 시작하는 것은 그리 녹록치가 않다. 그렇게 한 번 잘못된 선택으로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게 되면 다시 제대로 된 옷을 입기 위해 벗는 건 그다지 수월하지 않다. 그래서 주저하게 되고 결국은 틀린 것을 알면서도 길들여지게 된다. 인간의 의지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고 일상의 힘은 생각보다 약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맞지 않는 옷은 누구보다도 입고 있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게 되는 일이다. 누군가 일부러 일러주지 않아도 자기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다는 건 절절히 느낀다. 어쩌면 시스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내부에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나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건 자기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연우도 연우의 엄마도 태수도 채영도... 물론 시스템으로 부터 이탈되기는 했지만 그건 그저 계기였을 뿐, 바깥에 머무르는 건 모두 그들 자신의 의지였다. 그들 중 아무도 시스템에 적응하려 애쓰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연우의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연우의 '심드렁'이 그렇고 태수가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이 그렇다. 채영은 일부러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재욱은 남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힙합 무대를 일부러 찾아 다닌다.

 하지만 시스템 내부에 머무르는 자들의 경우, 그들에겐 애초부터 선택이란 게 있지 않았다. 마리의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 음... 꼭 선생님 지시만 기다리는 착실한 반장 같아요. 그런 애들, 자기 생각은 거의 없거든요. 정해진 정답만 열심히 찾아요. 저희 엄마도 그래서 안 행복한 거 같아요.(P. 416) 
 
그리고 채영의 아버지 고백...

 -나는 어떤 집단 속에 있으면 무조건 먼저 유리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부터 생깁니다.... 나한테는 생존방식이랄까요, 그렇게 안 하면 불안해요. 농촌 가난한 집의 우수한 장남, 이런 얘기 좀 상투적이긴 합니다만 그게 어쩔 수 없이 납니다....하지만 어떡합니까. 어릴 때 부터 입어온 옷이 이미 피부나 마찬가지가 돼어버린 걸. 다른 옷을 입어 볼 여유가 없었던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그 옷이 살을 파고들어 흉터가 되었다고나 할까요.(P. 439)

 이 두 사람의 말에서 보여지듯 이들에겐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아예 없었다. 그들의 가능성의 영역은 외부로 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남이 입혀주는 옷을 억지로 입어야 했던 것이다. 자의라면 그나마 덜 했을텐데, 타의로 억지로 입어졌다면 그 아픔이 얼마나 더 컸을 것인가! 그 타의로 입혀진 옷을 입고  "내가 싫어하는 인간으로 늙어가는 나를 보는" 끔찍한 기분으로 살아가던 채영의 아버지는 연우 엄마의 어쩌면 그저 지나가는 말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한 마디에 그만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었던 흉중의 말을 쏟아내게 된다.
그 만큼 그 사람에게는 그냥 그런 정도의 말이라도 충분할 만큼, 진심어린 어떤 자그마한 위로라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위로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건 상관없이...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외부에 있는대로,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내부에 있는대로,
각 자만의 삶의 무게와 그 짓눌림에서 오는 아픔을 감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제목인 '소년을 위로해줘'의 소년은 '연우'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 소년은 어쩌면 나를 비롯하여 아직 날아오를 수 있는 자신의 날개를 가지지 못한,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방황하는 사람들을 가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작가는 재욱의 에세이의 결말을 일부러 이렇게 맺은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궁극적으로 우주의 어린 아들, 즉 소년들이다. 서로 위로해주자."(p.389)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게 우리는 그가 어디에 서 있든 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위로해주자,
태수가 말했듯, 아픔은 겪는 각자에겐 다 그 무게가 있으니 그 원인이나 크기는 상관말고.
그냥 위로해주자.


 3. 결여의 존재들 그리고 위로

 그건 우리가 잘 나서도 더많이 가져서도 아닌, 우리 모두가 '결여'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제목도 그렇고
 재욱이 굳이 우리를 '소년들'로 지칭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 또한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그러니까 여기서 '소년'이란 말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데, 그건 날개를 가지지 못한 '결여의 존재'라는 것이다. 소설에서 비행기, 공항, 우주정거장 등등 그토록 비상과 비행에 관련된 말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아마도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으리라. 거기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역시도 '결여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연우의 가정에 아버지가 없다는 게 가장 대표적이다. 마찬가지로 연우와 채영 그리고 마리, 마리의 엄마가 자신들을 이어주는 태수를 잃는 것도 그렇다.  태수 역시도 과거 미국에서 누군가를 잃은 경험이 있으며 연우 엄마와 재우는 소설의 후반까지 내내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간다. 그리고 채영의 아버지와 엄마는 여전히 냉랭한 관계로 남는다. 이렇게 등장인물 모두에게서 공히 나타나는 '존재론적 결여'는 우리가 위로를 해야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된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상실한 그래서 부족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의지는 필연적이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 자체가 일으켜 세워 달라는 작은 아이가 내미는 손이 된다. 거기엔 나도 포함된다. 내 존재 자체도 누군가에게 내미는 작은 아이의 손이 된다. 때문에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길 원한다면 나 역시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이렇게 서로는 서로의 손을 잡고 부족한 결여들을 메워가면서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존재론적 결여'는 잡아주는 손길, 즉 위로가 상대와 처지와 이유에 상관없이 마땅히 해야 하는 당위로 되어야 하는 것까지 요청한다.
 이러한 결여된 존재로서의 조건이 위로를 당위적으로 요청하는 것은 소설에서 연우 엄마가 자기가 가장 행복한 꿈이라고 생각한 꿈을 꾸고 난 후에 한 고백에서 잘 드러난다.

  깨어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어. 짧았고 조용했고 피할 수 없는 것, 결코 지속될 수 없는 것, 사라져버리는 어떤 찰나를 향해 가는 기분이 들어. 유한한 존재들을 스쳐가는 짧고 날카로운 빛... 그런걸까. 무력한 어린 존재가 그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는 무력하고 철없는 젋은 엄마에게 모든 빛은 내쏘며 전 존재를 의지하는 것. 그것을 바라보는 한없이 초라하고 피곤한 젊은 엄마의 가슴 뜨거운 찰나 같은 것. 연우야 생각해 봐. 눈물을 흘리며 내가 너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는 거야. 응. 너무 행복했어. (P. 404)

 나에게 있어 소설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이기도 한 이 독백은 그야말로 우리가 왜 서로에게 위로를 필요로 하고 위로를 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연우 엄마의 고백 처럼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전 존재를 의지하는 가련한 소년들이다. 그건 당신이 어디에 있어서건 상관없이 무슨 일을 하건 상관없이 그냥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무겁디 무거운 삶의 중력을 등에 지고 버텨야 하는 고독한 '아틀라스'들이다. 무거운 짐을 들고 힘겹게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 할머니의 모습 자체가 우리의 도움을 구하는 무언의 호소이듯이 날개를 잃어버린 채 내리누르는 중력으로 버거워하는 우리 '소년'들의 존재 자체가 마땅히 위로를 받아야 할 권리도 그리고 아낌없이 위로를 건네야 할 의무도 역시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으며 난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소년시절을 떠 올렸고 그 상실감에 소설 속의 연우를 질투하기도 했다. 거기다 커다란 공백으로 남아있는 내 17살.  그래서 소설 속 연우의 여정은 그의 아픔과는 별도로 나 역시 '예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바라보는 가난한 아이'처럼 괴로움의 과정이었다. 그나마 마리의 얘기가 없었다면 그나마 재우의 넋두리와 채영 아버지의 속내가 없었다면 끝까지 읽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읽으면서 왠지 어느결에  바로 앞에서 길게 인용한 연우 엄마의 말처럼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모든 소년에게 진심을 담아 보내는 위로가 느껴졌다. 사실 그 대부분은 연우 엄마, 신민아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러고 보니 왜 연우는 엄마라 부르지 않고 고집스럽게 신민아라고 부르는 것일까?   엄마라는 영역에서가 아니라 신민아라는 별개의 단독자로서 위로를 건넨다는 그런 의미일까? 하긴, 엄마라서 위로를 한다면 그건 위로에 조건을 부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위로가 전 존재적 호소이자 응답'이라는 소설의 주제에서 보자면 끝까지 신민아로 남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경구처럼 주옥같기도 했지만 공백으로 허전한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손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배는 아팠지만 소설 속에 나오는 그 누구라도 하다못해 퍼즐카페의 주인 아저씨까지 응원하고 싶어졌다.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은 마리의 뒷 얘기를 읽지 못하는 것은 그지없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모두들 마지막의 연우와 채영 처럼 봄눈을 맞으며 '돌아오지 못할 것들은 그만 보내주고(이건 나에게 하는 말 같다.) 다른 별에 온 것' 처럼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를 빌었다.
  

 




소년을위로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