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의 여자 주인공, 한중일 3국 실학자 99인 중 유일한 여성 실학자,

<규합총서>와 <청규박물지>의 저자, 자동약탕기 발명가, 조선 최초의 대규모 차밭 농장주,

백화주와 절명사의 주인공 대학자 서유구의 형수이자 스승인 빙허각 이씨의 삶과 성취,

사랑과 비애를 다룬 최초의 장편소설이라는 소개글을 보고 이렇게 대단한 여성에 대해

들어본 바가 하나도 없어서 놀랐다. 유일한 여성 실학자인데도 이렇게 하나도 모를 수 있구나

싶은 것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무지인지 역사 속에서 잊혀져간 여성의 위치 때문인지

궁금하고 이 소설이 얼마나 역사에 기반하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읽고 나서도

어디까지가 역사인지 잘 모르는 나의 무지함에 좀 씁쓸하기는 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많은 정보는 없어 역사적 인물이지는 한데 이산과의 관계가 고증을 기반으로 한 것인지

픽션인지 애매했다. 드라마 이산을 보지 않았는데 그 드라마가 빙허각의 삶을 모티브로 한 것인가

싶어 검색해봤더니 한지민이 맡은 역할은 성덕임이었다. 드라마를 안 봐서 빙허각에 해당하는

인물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드라마는 성덕임과의 러브스토리에 기반한 픽션이 주였다.

빙허각에 대한 이 소설의 내용이 대부분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고

여자로서의 삶도 정말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물론 자식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했기에

완벽하게 행복한 삶은 아니겠지만 100% 완벽한 삶은 없으니까 자신을 평생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을 만난 것만으로도 특별한 사람임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 이창수는 딸의 남다름이 앞으로 아이의 삶에 큰 보탬과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큰 고통이 될 것임을 이미 알아보았지만 다행히도 인품이 좋은 아버지 주변에는

그에 걸맞는 좋은 친구가 있고 그런 인연으로 좋은 시아버지와 남편을 만나서 천만다행이었다.

딸로 태어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녀의 자질을 어여삐 여기는 아버지의 지원으로

나중에 시아버지가 될 서호수와 함께 연행원 일행으로 연경에 가서는 청나라 황제 건륭제 앞에서

자신이 지은 이름을 당당하게 말하는 당돌한 소녀였다.

빙허각의 원래 이름은 이선정이고 빙허각은 기댈 빙, 빌 허, 집 각으로 허송에 기대어 선다는

뜻으로 그녀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겠다는 각오를 담아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이러니 세손이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선의 세손으로 태어나

폭풍 속에서 살아가며 아홉 살에 만난 세손빈 청풍 김씨는 오누이같았고, 답답한 궁에서

말귀도 통하고 영특하여 정을 느낀 덕임은 친구 같았고 선정은 자신의 마음을 우물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소울 메이트이자 여인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녀가 빙허각이 된 것은 장헌세자와

세손의 이로부터였으니까 말이다. 열한 살 난 소년 이산의 아비 이선이 스물여덟 살 나이로

뒤주에 갇혀 죽은 말, 선정은 아들을 죽일 수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를 죽음으로

밀어넣었던 형부를 통해 세상은 허공에 기대어 선 듯 자신을 믿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겨우

열한 살의 나이에 깨달았던 것이다. 장헌세자의 죽음에 오열하던 그의 부친이 아비도 어미도

너를 대신 할 수 없으니 너 자신만이 저를 지키며 마음씨 고운 선비를 만나 좋아하는 글공부를

실컷 하고 살아라며 아버지의 눈물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빙허각이라고 한 것이다.

완전 금수저인 명문가 규수 이선정은 언니 숙정의 죽음을 마음 아파하기보다

집안의 체통과 자신의 출세만 헤아리는 오라비 이병정을 보며 여자의 죽음이 고기나 가죽을

남기는 백구나 누렁이가 죽은 것보다 못하는 것에 대해 큰 슬픔과 충격을 느꼈었다.

야심가인 병정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무지개 같기만 한 아버지를

빼닮은 자식이 자신이 아니라 바로 막내누이 선정임이 부담스러웠고 외모 또한 빼어난

선정이 세도가와 혼인하여 자신의 출셋길을 환히 비춰주는 등불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서로 연모함에도 불구하고 후궁으로 들어가지 않는 누이가 못마땅했으나 선정은

자신이 세손빈과 성덕임의 뒤에 서서 지아비와 꽃구경을 마치고 술을 마시고 있는 젊은 여인을

미소지은 얼굴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잘 알았다. 그녀는 결코 남이 결정지어 주는

운명에 순응하며 사는 인생, 사랑하는 남자를 다른 여인과 나누는 것에 질투조차 드러낼 수 없는

목각인형 같은 인생을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래는 서호수의 아들 유본을

선택했고 그녀의 선택을 세손 또한 존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선정이 후궁이 되어

그녀의 명석한 재능을 나랏일에 사용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라는

허망된 생각도 해보지만, 두 사람이 올곧다고 해서 헤쳐나가기에는 간신배들이 너무나 많은

위험한 곳이고 한계가 보이는 시대였기에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던져 사랑할 남자로 부족함이 없었던 이산을 도와 조선 개혁에 동참하고 싶지만

온전한 자신의 남자가 될 수 없는 현실이 끔찍했겠지만, 서씨 집안 남자들이 그러했듯

유본이 첩을 두지 않았던 것처럼 이산 또한 그럴 수 있지도 않았을까 라는 현대적인 아쉬움이

크긴 했다. 어쨌든 후에는 서로 지우가 되어 응원했고 주상 역시 자신의 여자가 될 운명이

아니라면 식견이 환히 트인 서씨 집안 사람이 되어 빙허각의 재주를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백성이 배가 부르고 따뜻한 집에 몸을 누이며 마소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꿈을 이루는

것이 서씨 집안의 꿈이자 주상의 꿈이었는데 그것이 이어지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왜 올곧은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자식은 죽어나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손번성하는지

참 애통했다. 첩이 없어 남자들이 글공부에 열중하고, 여자들도 투기 없이 살림에 전념하여

평온하게 살아가지만 병으로 인해 자손들이 죽어나갈 때 그것이 흠이 되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공부하는 며느리를 100%는 이해하지 못해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를 시키기도 했지만

시절을 생각해보면 공부하는 며느리를 뒷받침해주는 시어른들이 있고, 아내를 자랑스러워하고

아끼는 남편, 형수를 스승으로 존경하는 시동생 준평, 신학을 가르쳐 준 당대의 뛰어난 스승들과

연을 맺은 것도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참 복이 많은 사람이구나 싶으면서도

11명의 자식 중 아홉을 잃은 어미의 마음을 생각하면 정말 남다른 운명을 지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림의 지혜가 담긴 <규합총서>, 천재 천문학자 김영이 이름을 지은 <청규박물지>, <빙허각시선집>

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이 소설을 통해 알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조선 최고의 인생의 동반자이자 친우였던

유본과 빙허각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 시대에 수학과 천문학에 뛰어난 학자가 한 여인의 삶으로도

부족함이 없었음을 알게 되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