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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4.18 06:00

[노은주·임형남의 골목 발견] 서울 '피맛골'

골목은 도시의 허파. 지난해 ‘신 골목 탐구’ 시리즈에 이어 올해 주말매거진은 노은주·임형남 건축가의 ‘골목 발견’ 시리즈를 새로 시작합니다. 잊힌 골목, 추억을 자극하는 공간과 도시에 숨을 불러일으키는 골목의 역할에 대해 다시 짚어봅니다. 서울을 넘어 일본·중국·터키의 숨은 골목 구석구석을 여행하실 준비, 되셨나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은 이문설농탕이라는 곳이다. 1904년에 우리나라 요식업 1호로 등록했다고 하니(한식재단 기준) 개업한 지 110년이 넘었다. 이문설농탕은 물론 음식 맛도 좋지만 연륜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들락거렸고, 특히 조선일보에 연재되었고 후에 '장군의 아들'이라는 영화의 원본이 되었던 홍성유의 소설 '인생극장'에서 혈기 방장하던 시절의 '종로 주먹' 김두한이 자주 들락거렸던 식당으로 여러 번 나와 그 이름이 익숙해진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식당은 이름으로 얼핏 생각되는 바와 달리 동대문구 이문동에 있는 식당이 아니다. 정작 이문설농탕은 종로2가에 있다. "좀 이상하다. 이문동에 본점이 있어서 그런가?" 별 억측을 다 해보았는데 알고 보니 이문설농탕이라는 이름은 그 식당이 이문(里門) 앞에 있는 식당이라는 뜻이란다.

이문이란 조선 초기인 세조 시절에 방범의 목적으로 동네의 입구에 세운 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 11년에 한성부에 경성(京城)의 여항(閭巷)에 이문(里門)을 지으라는 지시를 내리는 구절이 나온다. 경성은 물론 서울이고 여항이란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말한다. 신하들의 거듭된 건의를 받아들여 동네의 안전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이문을 여러 곳에 설치했는데, 이문설농탕 근처가 바로 종로 이문의 자리였다고 한다.

그 문을 통해 들어가는 동네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그 이름이 피워내는 상상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이문설농탕마저 헐리고(원래 자리인 공평동에서 견지동으로 옮겨갔다) 그 자리에 큰 건물이 들어선다고 한다.

종로 부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무척 북적거린다. 한때는 고관대작들이 지나다니는 명실상부한 서울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그 중심이 여기저기로 많이 옮겨졌다. 그러나 여전히 길은 넓고 차는 많다. 그런데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한 켜 뒤로 대로와 평행하게 좁은 길이 이어진다. '피맛길'이란 이름을 가진 길이다.

광화문 앞에서 동대문 인근까지 마치 뱀처럼 구불구불 길게도 이어져 있는데 그 길에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라고 한다. 참 오래된 길이다. 길 이름은 '양반들이 탄 말[馬]을 피해 다니는 길'이라고 해서 '피맛(避馬)길'이라고 불렀고, 그 길 양쪽으로 형성된 뒷골목 동네에는 피맛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 길은 서민들을 위한 소박한 먹거리인 해장국, 생선구이, 빈대떡 등이 익으며 피워내는 연기와 냄새로 그득했고, 그곳에서 서민들은 무척 푸근하고 불콰해졌으리라.

비록 그 길이 600년 동안 역사의 뒤편에 자리해서 찬란한 햇살이나 영광을 누리지 못해 남루하지만, 그 안에는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어 사람들에게는 위안을 주었고, 역사 도시로서의 서울의 위상을 튼튼히 해주었다.

그런 면에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한양에 세운 숭례문이 서울의 정신이라면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피맛길은 서울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몇 년 전 어느 날 '정신'은 하룻저녁의 불꽃에 사그라졌고 사람들은 흰 천을 두르고 통곡을 하며 다시 살려냈다.

그러나 바로 지척에 있는 '마음'은 비슷한 시기에 조용히 사라졌다. 개발 사업에 대한 보상이 마무리되자 사람들을 몰아내고, 피맛길에 면했던 작은 필지들을 한꺼번에 모아 거대한 상업 건물로 세우기 위해 길을 둘러싸고 있던 건물들을 중장비로 간단히 허물어버리기 시작했다. 원래의 피맛길은 종로1가 청진동에서 종로 6가까지 이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거칠게 지워낸 지우개 자국처럼 여기저기 지워진 채 아주 희미한 자국만 조금 남아 있다.

건물은 없어져도 복원이 가능하지만 길은 없어지면 복원이 어렵다. 그리고 길이 없어지면 도시의 정체성은 점점 없어진다. 불에 탄 숭례문 앞에서 울고불고했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지, 600년 만에 없어지는 저 길에 술 한잔 권하는 사람 없다. 나는 간혹 가방과 카메라를 챙겨들고 남아 있는 피맛길로 가서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곤 한다. 바늘이 하나 부러져도 조문을 하는 게 우리의 정서 아닌가. 그리고 그런 정도의 예의는 갖춰야 하지 않겠나 하며 마치 영정 사진을 찍는다는 마음으로….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사람의 몸은 무수히 많은 혈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맥과 정맥이라고 부르는 굵은 줄기의 핏길이 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실핏줄이 있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이 모든 피의 길이 조화로워야 하고 건강해야 한다.

도시도 사람의 몸과 마찬가지이다. 큰 길이 굵은 핏줄이라고 보면 큰길 뒤로 뻗어 있는 길들 혹은 집까지 이어지는 길들은 가는 핏줄일 것이다. 큰길 뒤로 이리저리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는 그 길을 우리는 '골목'이라고 부른다. 도시에는 무수한 골목이 있다. 그리고 사람의 몸처럼 모세혈관 역할을 하는 골목이 잘 살아 있고 건강해야 도시 또한 생기 있게 살아나는 것이다. 큰길이 과시와 소비와 속도를 위한 것이라면, 골목은 그 도시의 민얼굴이며 그 도시의 정체성이며 또한 삶의 여유를 주는 공간이다. 뒤늦은 개발로 얼마나 큰 이익이 생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계에서 넷째로 오래된 수도라는 서울의 역사성과 정체성은 점점 희미해질 것이고, 그것이 스스로 손해를 자초하는 바보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날이 조만간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