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디자이너 니콜라 제스키에르(44)는 이 시대 가장 만나고 싶은 패션계 인사로 손꼽힌다. 1991년 장 폴 고티에의 조수로 시작해 1997년 스페인 명품 발렌시아가에서 모터사이클 백을 내놓아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2001년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 '세계 디자이너' 상을 받았고, 2006년 타임지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올랐다. 프랑스 명품 루이뷔통에 2013년 가을에 합류, 여성복 분야를 총괄하면서 160년 브랜드 전통에 혁신을 불어넣었다. 가죽과 꽃, 갈색 모노그램 등 루이뷔통 고유의 소재는 살리되 몸매를 관능적으로 드러내는 실루엣, 이국의 향기가 강렬한 캐시미어 무늬를 보태어 "과거와 미래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디자인"이란 찬사를 받았다.

이달 초 미국 서부의 휴양 도시 팜스프링스에서 열린 루이뷔통 2016 크루즈 컬렉션 쇼는 제스키에르의 끼와 자신감이 최고조에 달한 무대였다. 황량한 사막에 우주선처럼 내려앉은 대저택에서 그는 여행지에서 입을 의상들을 선보였다. 단색 재킷 아래 부드럽게 흐르는 긴 치마의 대비가 돋보였다. 객석에선 박수와 함성이 일었고, 백스테이지는 그와 눈 맞추려는 유명 인사들로 붐볐다. 하지만 그가 프랑스 배우 카트린 드뇌브, 중국 배우 장만옥, 호주 모델 미란다 커를 제치고 누구보다 반긴 사람은 한국 배우 배두나(36)였다.

"봉준호 감독 영화 '괴물'을 다섯 번 봤어요. 특히 두나 연기가 인상 깊었어요. 무심하게 툭 던지는 눈길, 연기 같지 않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뇌리에 박혔어요. 아! 나는 그녀에 대해 얘기할 때가 제일 좋아요. 두나는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뮤즈(muse)예요."

이튿날 아침 팜스프링스 최고급 파커 호텔 1층 야외 수영장에서 만난 제스키에르와 배두나는 손을 맞잡으며 아이처럼 웃었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 봄 영화에서 배두나가 입었던 자주색 트레이닝복에서 영감을 받아 가죽 드레스 '조깅'을 만들어 선보였다.

배두나는 "작년 요맘때 니콜라를 처음 만났는데 나를 진심으로 반가워해주는 디자이너는 그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오래 만나온 것처럼 편했어요. 니콜라는 영화광에 공연, 미술, 건축을 특히 좋아해요. 두세 달마다 새 옷 40~50벌을 내놓아야 하는 전쟁 같은 스케줄에도 수시로 제 인스타그램을 드나들며 '두나! 그 전시는 어땠어? 그 공연은 뭐가 좋았어?' 물어봐요."

이날 배두나는 워쇼스키 남매와 찍은 새 미국 드라마 '센스8'의 예고편이 공개돼 들떠 있었다. 서울, 나이로비, 런던 등 여덟 도시에 떨어져 살지만 텔레파시로 연결돼 있는 여덟 인물의 이야기가 12부작으로 펼쳐진다. 그녀는 "무술을 연마해서 주먹질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한국 재벌 총수의 딸 역할을 맡았다"고 했다.

"저는 보기보다 고지식해요. 예쁜 얼굴이 아니고 연기 기술도 없기 때문에 대본을 읽으면 그걸 온몸으로 흡수해서 뼈저리게 느껴야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할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니콜라 옷과 저는 비슷해요. 니콜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기보다 원래 있던 문화나 전통을 살려가면서 새로운 지향점을 향해 팍팍 나아가는 사람이거든요."

이번 출장에서 배두나는 혼자였다.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 오디션을 볼 때도 혼자 비행기 타고 갔다. "극중 인물로 연기하고 있는데 옆에서 자꾸 '누나,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춥지 않으세요' 하면 저로 돌아가버리니까요." 처음엔 많이 울었다. 너무 외로워서. 하지만 낯선 언어를 익히는 덴 최고였다. 배두나는 "내가 운이 엄청 좋아서 니콜라와 워쇼스키 남매, 봉준호 감독 등 비범한 사람들과 일을 많이 했다"고 했다. "신기하게 그들끼린 서로 통해요. 박학다식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세계관이 넓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