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빌제와 그의 후계자들(1882-1887), 한스 폰 뷜로(1887-1892), 아르투어 니키슈(1895-1922),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922-1945), 보르하르트와 첼리비다케, 그리고 다시 푸르트벵글러(1945-1954),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55-1989), 클라우디오 아바도(1989-2002), 사이먼 래틀 경(2002-). 이 책은 베를린 필의 지휘자를 중심으로 시대별로 이야기한다.

    마지막 사이먼 래틀이 계약이 끝난 것을 제외하면 이 책은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라는 인적 구성과 정치와 사회의 복잡한 요소들이 얽힌 시대가 공존하는 지점 한복판에 서 있는 지휘자에 관해 인용자료와 그것을 선택한 저자에 의해 알 수 있는 것과 짐작하는 것들을 오간다.

     베를린 필 상임 지휘자가 음악과 단원 혹은 인간에 대해 보인 태도, 사회분위기와 오케스트라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른 음악적 정체성에 관한 의식과 방향성, 음악을 하는 사람이 다수가 모였을 때 벌어지는 일들과 그들 역시 삶을 살기 때문에 수익이나 연금을 보장받기 위해 노력하는 전략들, 상임지휘자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지휘자들의 암묵적 혹은 가시적 경쟁구도 등. 독일에 존재했기 때문에 전후에 여러 비판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오케스트라. 근처에 존재하는 빈 필과 다른 오케스트라와 차별을 보이면서도 독자적으로 매력을 보여야 했던 곳.

      "베를린 필 연주회의 청중들 간에는 푸르트벵글러 신봉자와 나란히 열광적인 발터파가 생겨났다. 그 결과 베를린에서도 푸르트벵글러와 발터가 지휘하는 정기 연주회가 있는 월요일에 다른 공연장은 한산했다(p.93)." 지휘자 혹은 협연자를 놓고 보이지 않는 경쟁구도가 생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특히 논란이 많은 시점인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의 지휘자였던 푸르트벵글러와 그 시대의 지휘자들에 관해서는 함부로 옳다 그르다를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혼재한다.

    "베를린 필은 그들이 예상했던 문화성 산하의 부처가 아니라, 괴벨스의 국민계몽 선전성의 피고용 단체가 된 셈이었다...(중략)...푸르트벵글러의 입장에서는 오케스트라의 합병 철회가 특별히 중요했다. 통합 당시에 이미 많은 나치당원이 베를린 필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p.106-107)."

    "이렇게 해서 베를린 필과, 그 나름의 책략을 썼지만 딜레마에 빠져든 예술 감독에게는 벼랑 끝에서의 정치적 줄타기가 시작된다. 외국의 시선에 비친 푸르트벵글러는 친나치주의자였다...(중략)...그의 레퍼토리만 보아도, "영웅적이고 위대한" 베토벤, 브루크너 같은 작곡가의 "거대한 스케일", 슈베르트나 브람스의 "민족적 요소", "총통"이 즐기는 바그너의 "막강한 " 가극 등이었다...(중략)...그런가 하면 그는 독일 내에서는 거꾸로 나치 친화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곤욕을 치렀다...(중략)...예술가라면 본질적으로 결코 악인일 수 없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겟지만, 그는 작곡가 막스 트라프 같은 나치 당원이든 아널드 쇤베르크 같은 유대인 음악가든, 똑같이 진심을 다해서 변호했다(p.109-111)."

    "푸르트벵글러 외의 수많은 지휘자들도 나치에의 정치적 가담여부를 판정하는 재판에 시달리는 판이었다. 로베르트 헤거는 나치 당원이었으며, 한스 폰 벤다는 히틀러가 악의로 자신에게 음악 총감독을 시켰다는 얼토당토않은 진술로 발뺌을 하려고 들었다(p.152)."

 

    상반된 시각과 그의 여러 선택들과 말들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은 결국 이렇게 될 수 있다. "한 지휘자가 음악의 상징이 되고, 음악적 영향을 넘어서서 온 국민의 정신적 생활에 지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뒤늦은 시대에 태어나 세계가 그에게 끊임없이 부과하는 정치적 한계상황과 대결하며 이를 간단히 피래할 수 없었던 것- 그것이 푸르트벵글러의 운명이었다(p.192)."

     카라얀은 지휘자가 단순히 음악 종사자가 아닌 상업적 마인드를 갖춘 음악 상인이나 모든 일에 수익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지휘자의 인상으로 남는다. "음악제의 지속적인 자금조달을 위해서 "제작용 앙상블"을 고안함으로서 연습에서 녹음에 이르는 통례 과정을 뒤바꾸어 놓았다...(중략)...연주회는 "통상적" 공무요, 오페라 반주는 개인소득을 올리는 부업이라는 이야기였다. 주정부와의 임금협약에 따르면, 공무 종사자로서 베를린 필이 담당할 의무에는 음반 녹음이나 TV녹화는 포함되지 않았다...(중략)...순수한 콘체르트 오케스트라로 빠른 템포와 경쾌한 조율에 익숙한 베를린 필은 결코 오페라 음악의 틀에 맞추어 단련된 악단이 아니엇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서 그들은 환상적인 바그너 오케스트의 진면목을 드러냈다(p.230-231)."

    "악단 창단 100주년 기념일, 정확히 1982년 6월 12일에 함부르크에서 도이치 그라모폰 사가 최초의 시리즈물로 제작한 콤팩트디스크를 소개했다...(중략)...이 디스크들을 "보트나 자동차 안에서도 틀 수" 있다는 사실에 카라얀은 대단히 흡족스러워했다. 이렇듯 마케팅의 그늘에 묻혀서 음악 자체는 갈수록 빛을 잃어갔다(p.262)."

 

    카라얀과 베를린 필, 예프게니 키신의 접점도 흥미롭다. 1988년 12월 31일 밤에 프로코피예프의 <고전 교향곡>과 열일 곱살의 키신이 차이콥스키의 나단조 피아노 협주곡, 1989년 부활절 음악제 기간에 푸치니의 <토스카> 4회 상연과 4회의 오케스트라 협주곡의 밤, 그리고 차이콥스키의 협주곡(p.278). 애증이 섞인 베를린 필과 카라얀과의 마지막 연주회에서 연주된 베르디의 <레퀴엠>과 소니 사장과 음악의 상품화를 논의하던 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7월 16일 일요일 한낮의 상황까지(p.280)묘사된 상황은 카라얀이란 지휘자를 음악적 정밀함 외에 개인의 품성과 인성, 음악을 보는 시각에서 '이 시대라면 베를린 필에 상임으로 있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긴다. 저자는 그에 관해 음악적 공은 인정하면서도 음악을 과도하게 이용한 상업적 태도와 음악인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인다. 그의 시대에 생긴 베를린 필 단원의 '탐욕'까지 문제가 될 정도로.

 
    시대와 개인의 어수선하고 복잡한 시대를 건너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선택된 과정 역시 베를린 필 지휘자를 선임한 과정에 관한 다른 지휘자 이야기만큼 재미있다. 당사자들은 엉겁결이거나 실망 혹은 분노에 이른 것처럼 보이지만. "레바인이나 바렌보임, 더욱이 마젤에 대해서는 전혀 의견의 합치를 볼 수 없던 끝에, 최소한 그들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아바도가 타협의 산물로 선택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선거 전날만 해도 뉴욕 필과 협상 중이던 아바도 자신도 적잖이 놀랐다(p.286)."

 

    이 시기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바로 그 해이다. "1989년 11월 9일 저녁, 동독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귄터 샤보프스키가 TV로 생중계되는 기자회견 석상에서 새로운 여행규정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잘못 발표함으로써 28년간 막혀 있던 베를린 장벽이 사실상 "지체없이" 열렸다...(중략)...부랴부랴 계획은 변경하여 11월 12일 일요일, 예상외의 사태에 깜짝 놀라서 동독에서 몰려드는 방문객들을 위한 오전 특별 무료 연주회를 열기로 했다. 프로그램으로는 -리허설을 할 시간이 없어서 - 바로 지난 10월에 공연했던 베토벤의 작품을 선택했다. 소니는 그날 공연을 음반으로 발매하여 수입의 일부를 동독 시민을 위한 연대계좌에 기부했다(p.291-292)." 음악과 정치가 분리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음악이 보편적인 인류애를 어떻게 발현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각주에 있는 이야기를 보면 기자가 공직자에게 던지는 게 아니라 말하는 질문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알게 된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에 대한 말 중에서 그를 나타내는 말은 이런 것이다. 베를린 청중의 좋은 점을 묻는 질문에 "말러의 교향곡 제9번이 끝나고 박수가 터져나오기까지의 시간적 간격입니다. 베를린에서는 그 간격이 명백히 더 길지요(p.293)."

 

    저자는 카라얀보다 아바도에 훨씬 인간적인 면에 우호적이다. 읽는 사람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바도 시대와 함께 베를린 시는 정치적으로, 베를린 필은 음악적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나란히 달려왔다. 따라서 아바도를 향한 작별의 갈채는 분명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던 카라얀의 이후 시기에 음악의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고 오케스트라에 강한 협력정신을 심어준 지휘자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여기에는 고전파 및 낭만파 음악의 소외된 작품들을 발굴하며 레퍼토리를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노, 쿠르타크, 리게티, 림, 푸러 등 현대 작곡가들을 소개하는 데에 앞장섰던 그의 노력에 대한 고마움도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특히 감사할 점은 니키슈로부터 발터, 클렘페러, 야샤 호렌슈타인에 의해서 이어져온 말러 연주의 전통을 계승하여 베를린 필을 말러 작품에 대해서는 최고의 악단으로 만든 것이다(p.317)."

    사이먼 래틀 경은 베를린 필과의 첫 프로그램을 통해 그가 이해하고 있는 베를린과 베를린 필을 잘 설명한다. 말러 제5번을 중심으로 스물아홉 살의 영국 작곡가 토머스 아데스의 피난처를 첫 프로그램으로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제3번을 앵콜곡으로. "베를린은 60퍼센트가 독일, 38퍼센트는 뉴욕, 나머지는 거친 서부의 무법지대(p.319)"라고 표현한 래틀의 말이 투영된.

 

    특히, 단원들의 처우에 대한 인식과 주정부를 상대로 한 전략은 상업쪽에 치중한 카라얀과는 확실히 대비된다. 정치적으로 독립한다는 장점 대신 자기책임적 성향이 강한 베를린 필의 재단법인화처럼 다른 오케스트라의 이견까지 감내해야 하는 일, 오네조르크를 악단장으로 요청했으나 악단원들의 반감이 생기고 그것이 높아지자 조용하게 사임하게 한 일이 그 예다. 아바도와 대비되는 성격과 성향인데 아바도와 동급으로 매력적인 지휘자로 보인다. 물론 그도 '독일적인 음향'에 관해서는 언론의 비판을 받았지만, 래틀리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에게 들은 "천천히 서둘러야(hurry slowly)(p.346)" 하는 움직임으로 카라얀이 한 말을 마음에 되새긴 시간이 베를린 필과 함께 한 그의 시간을 증명하지 않을까. "새가 태어나면서 어떻게 노래를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새가 삶의 경험을 축적한 다음에 부르는 노래가 중요하다(p.346)."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 뿐만 아니라 소리를 형성해서 머물게 하는데 재주가 있는 오케스트라는 무엇인가 특이점들이 있다. 단, 기본적인 자질이 동일하다는 전제 하에. 래틀의 말을 인용하면, "베를린 필의 경우에는 어김없이 단원들 편에서 항상 전력을 다해서 음악에 임한다. 베를린 필 단원들은 동물 무리 같은 피동적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각자 책임의식이 투철한 실내악 주자의 자세를 가지고 연주회 무대에 오른다(p.346)." 지휘자만 이것을 아는 게 아니라 듣는 혹은 보고 듣는 사람들도 안다.

    한편, 지금 현재 우리 사회에 있는 "가짜" 학설과 뉴스(결국에는 학설도 뉴스도 아닌 거짓말)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이 책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제국시대 사회에 퍼져 있던 반(反)유대 감정은 훗날 나치 정권의 국가 사회주의, 유대인 말살정책처럼 강령화되어서 국가 차원으로 법제화된 것이 아니라, 지적 사회계층 사교계에서 험담거리가 되거나 유대인들에 대한 일종의 경쟁적 사고에서 연원된 것이었다 -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반유대주의 풍토를 고착 요인이 되었다(p.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