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무더위에 몸과 마음이 다 녹아내려 무기력했다. 책읽기와 글쓰기도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좋은 책이라는 평을 많이 보았다. 여성 과학자의 삶을 뛰어난 필력으로 표현했단다. 처음 몇 페이지를 보자마자 책에 빠져들었다. 과학자로서 혼신을 다해 연구하는 저자의 열정이 놀라웠다. 내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언제 열정을 바쳐 무언가를 이루려 했지? 까마득한 과거에 어떤 일에 멋모르고 도전했다 쉽게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그 후로는 그저 방관자로 적당히 살았다. 열심히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존경하면서 정작 나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 책을 쓴 호프 자런은 나와 달랐다. 

 

 그녀는 책의 서두를 자신의 연구 분야인 식물이 얼마나 지구상에 많은지 알려주면서 시작했다. 첫 이야기는 과학자인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계산자를 휘두르던 기억이다. 저자의 삶은 과학(식물학) 연구에 온통 바쳐졌다. 북유럽 출신 가정 특유의 냉담한 감정 표현은 그녀의 열정이 오롯이 과학에 몰입하도록 이끌었다. 저자가 연구하는 과정을 서술한 부분은 시트콤 <빅뱅 이론>보다 더 재미있다. 과학 연구란 지루하고 까다로운 사전 작업이 끝도 없이 반복된다. 그 와중에 동료 ‘빌’과 일어나는 상호작용은 스트레스를 날리고 용기를 불어넣는다. 고단한 작업이 이어지는 와중에 서로 쏟아붇는 독설과 장난은 건조한 과학 연구에 인간미를 더한다. 실험실 안에서 빌과 저자가 함께 있는 장면들은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빌과 저자의 관계는 미국인들도 궁금하게 여겼다. 연인은 아닌데 연인보다 더 가깝고,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한 몸같은 사이란 어떤 걸까? 많은 독자들은 저자가 결국 빌과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거라 확신하지 않았을까? 둘 사이는 동료, 친구, 동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어 보인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관계에 대해 의아해한다. 빌과 나 말이다. 오누이? 영혼이 통하는 친구? 동지? 수사와 수녀 관계? 공범? 거의 매끼 밥을 같이 먹고, 재정적인 문제도 얽혀 있고, 서로에게 모든 것을 말한다. 여행을 같이 가고, 일을 같이 하고, 서로가 시작한 말을 대신 끝내주고, 그리고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어왔다. 나는 아이까지 낳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고, 빌은 당연히 그 모든 것의 전제조건이다. 나를 선택하면 함께 따라오는 종합 선물세트의 일부,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형제이다.”

 

 ‘知音(지음)’이라는 말에 얽힌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나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책에 나온 둘의 이야기를 읽어보라. 처음엔 의심하고 놀라다가 나중엔 부러워하게 될 것이다. 

 

 과학 연구는 새 지식의 발견이 안겨주는 기쁨으로 지탱할 수 없다. 호프 자런은 과학 연구자의 자질과 노력에 연구 기금을 따내는 능력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부족한 연구비를 메꾸기 위해 도둑질에 가까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른 연구자의 작업을 대신 수행하며 자신의 연구도 같이 하느라 일주일에 한 번 몸을 씻기도 어려웠다. 국방 관련 분야나 세인의 관심을 받는 분야(고생물학의 경우 공룡)에는 연구비가 넉넉하게 오지만 저자가 연구하는 식물학을 비롯한 다른 기초과학 분야는 수십 년째 제자리 걸음이다. 저자와 빌이 부족한 연구비 덕에 고군분투 하는 모습은 무협지에서 악당에게 쫓기는 주인공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삶이 펼쳐지다가 곳곳에 식물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가 수행했던 한 연구는 화석이 된 팽나무 씨앗을 분석해서 미국 중서부의 빙하기 사이사이 여름 평균 기온을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씨앗 화석을 분석해 수십, 수백만 년 전 기후를 알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지식은 무엇에 도움이 될까? 지금처럼 지구 온난화가 급속도로 일어날 때  생태계에서 식물은 어떤 변화를 할지 예측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초과학은 당장 직접적인 경제 발전이나 물질적 혜택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는 도움이 되며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의문에 답하고자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새로운 발전으로 우리를 이끈다. 저자가 책에서 들려주는 식물학 연구 이야기가 그렇다. 

 

 자신을 파괴하는 벌레에 대항하기 위해 버드나무는 특정한 화학물질을 분비한다. 그런데 이 벌레에 공격받지 않은 멀리 떨어진 나무도 같은 화학물질을 분비한다! 나무가 의사소통을 한다는 뜻이다. 벌레에 공격받은 나무는 특정한 휘발성 유기 화합물을 분비하고 이를 감지한 다른 나무는 유전자를 활성화시켜 벌레에 대항한다. 식물들도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며 환경에 대응한다. 커다란 단풍나무는 땅 속 깊은 곳에서 물을 길어올려 얕은 땅에만 뿌리가 있는 어린 나무들에게 나누어준다. 단풍나무 부모의 자식사랑인 셈이다. 저자가 전해주는 식물의 생태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통념을 산산이 깨뜨린다. 식물도 생명체로 주변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생존을 위해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을 동원한다.

 

 인간의 탐욕은 수억 년 진화의 결정체를 그저 식량, 의약품, 목재 세 가지로만 바라본다. 그러나 식물은 인간의 잣대로 다 잴 수 없다. 나무와 풀과 씨앗이 지구 전체 생태계와 어우러져 진화하고 살아가는 시스템은 인간이 함부로 손댈 영역이 아니다. 식물학자로서, 지구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호프 자런은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더욱 식물을 알려고 노력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 같이 않으니까. 

 

 그녀는 실패도 좌절도 몰랐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았다. 형제보다 더 한몸같은 동료에게 제대로 된 급여를 주지 못해도, 야심차게 기획한 연구에 온힘을 다해 매달렸다 결국 성과 없이 끝나도, 돈을 아끼느라 여기저기서 실험 기구를 (거의 훔치듯) 가져와 실험실을 만들어도, 햄버거 수십 개를 한꺼번에 사 냉동시켰다 먹어도 연구만 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뒤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일을 할 뿐이다. 나는 실패가 두려워서 애써 노력하지 않는게 아닐까?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 두려워하지 않고 책임을 지고 다시 일어선다면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밑거름이 된다. 잘못된 일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돌리는 사람은 실패가 두렵기 때문이다. 이때 실패는 패배가 된다. 저자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두려움 없이 묵묵히 나아갔다. 그래서 실패가 있어도 지지 않았으며 결국 성공했다.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용기에 감복했다. ‘빌’과의 관계는 인간의 절정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두려움없이 나아가는 묵묵한 발걸음을 존경했다. 저자는 한 때 문학을 전공한만큼 유려한 문장으로 자신의 삶을 서술했다. 덕분에 단조로울 수 있는 과학 연구자의 삶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다. 과학자의 삶이 어떤지, 열정은 어떻게 발현되는지, 사람 사이가 얼마나 매력적일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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