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이성이 문명을 진보시킨다는 신화를 무너뜨렸다. 나찌의 유대인 말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말 그대로 인민을 갈아 넣었던 스탈린의 소련, 폭격과 원자폭탄이 야기한 민간인 학살은 인류 역사의 진보가 한순간에 폐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전후 지식인들은 어째서 지구적 규모로 참극이 일어났는지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지 오웰은 파시즘과 스탈린식 공산주의 둘 다 전체주의라며 비판했다. 발터 벤야민은 파시즘과 사민주의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 모두가 역사의 진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며 날카롭게 통찰했다. 마치 물리학 법칙처럼 역사가 인과적으로 단계를 밟아 진보한다는 생각은 파국을 향할 뿐이다. 한편,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는 이 책 <맹신자들>에서 대중운동의 본질을 고찰했다. 유럽의 파시즘이나 사회주의는 대중운동으로 시작했고 이들이 권력을 장악한 후에도 대중운동의 이념으로 사회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대중운동은 강한 태풍처럼 사회를 휩쓸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저자가 보기에 대중운동에 참여해 이끄는 이들이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인생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곧 “좌절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대중운동에 전면적으로 나선다면 이 운동의 촘촘한 조직에서 새 삶을 얻으며, 지지자로 나선다면 이 운동의 노력과 전망, 성취에 스스로를 일치시킴으로써 자부심, 자신감, 목적의식을 얻을 수 있다.” 대중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은 좌절된 자기 발전 욕구를 충족하는게 아니다. 이들은 반대로 자기부정 열망을 충족한다. “자신의 이익이며 전망이 자기를 바칠 가치가 없어 보일 때, 우리는 필사적으로 자기 아닌 다른 것에 스스로를 바치고자 한다......무언가에 헌신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하찮은 삶, 망가진 인생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무언가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숭고한 대의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에 참여한다면 자기부정이 아니라 욕구의 대체가 아닌가?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대중운동에 가담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열렬한 나치 젊은이의 말마따나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다.” 

 

 여기까지 읽고 책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나는 20대 초반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했다. 사회변동을 이끄는 강력한 힘으로 대중운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옳은 이념을 가지고 광범위한 사람들과 함께 벌이는 대중운동은 좋은 사회를 만드는 유력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한다. 최근 촛불혁명이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으로 이끌었을 때에는 적잖이 감격했다. 그런데 대중운동이 좌절해 자유를 스스로 반납한 맹신자들이 이끈다니! 받아들이기 힘들고 반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내 경우엔 나름 입시에 성공해 좋은 대학, 좋은 과에 입학하기도 했다. 현실에 좌절했기 때문에 대중운동에 빠져든다는 저자의 주장과 다르지 않은가? 그런데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대변하는 일부 개신교도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이 경우엔 저자의 생각이 맞지 않나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책의 내용을 수긍하니 대중운동에서 저자가 말한 특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지도부의 지침이 현실과 맞지 않거나 위기 상황을 과도하게 강조해도 스스로의 사고를 멈추고 지도부가 옳거니 하며 맹목적으로 따랐다. 그리고 일이 잘못되면 생각을 하지 않은 나 대신, 지도부를 탓했다.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는 점은 저자의 말이 맞았다. 특히 보수와 급진에 대한 심리적 통찰은 공감하는 바가 컸다. 뇌과학이 밝힌 과학적 연구 결과와 비슷하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현재에 기대고 매달리게 만들지만, 미래에 대한 믿음은 변화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저자는 미래에 대한 믿음에서 실현 가능성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숭고한 대의라서 실현하기 어려울 때 환상은 더욱 커지고 희망도 따라서 커지며 확신까지 준다. “맹신자가 결론의 근거로 삼는 사실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사고가 아니라 ‘경전’에서 나온 것이라야 한다.” 경험으로 판단해보면 가능하지도 논리에 맞지도 않은 일들을 철썩같이 믿는다.  왜냐하면 “보거나 들을 가치가 없는 사실에 눈 감고 귀 막는 능력이야말로 맹신자들이 지닌 불굴의 결단력과 충성심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영사가 내세우는 이중사고를 떠올리게 했다. 소설에서 당은 어제까지 오세아니아가 유라시아와 전쟁 중이라고 적에 대한 증오를 퍼뜨렸다. 그런데 오늘 사실 오세아니아는 이스트아시아와 전쟁중이며 유라시아와는 동맹이라고 발표한다. ‘이중사고’에 단련된 당원들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이를 믿고 유라시아와 어제까지 전쟁중이었다는 기억 자체를 잊는다. 사실에 눈 감고 귀 막는 능력은 기억조차 조작한다. 

 

 이 책에서 에릭 호퍼가 주장한 내용은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 대중운동에는 그가 말한 측면이 분명 숨어 있다. 자유를 얻기 위해 만든 투쟁 조직 내에서 정작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맹목적으로 강령을 따르지 않으면 운동은 금세 지지부진해지며 단결과 자기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파괴력을 갖지 못한다. 숙고 없이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 목소리를 크게 내거나 과격한 선동을 일삼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아닌 부분도 분명 있다. 이 책이 나온 시기가 이차 세계대전 직후라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맹목적인 대중운동이 가져온 세계적인 지옥도를 목격한 후다. 비판적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류 역사에서 개인이 스스로 책임지는 근대적 인간은 오직 유럽에서만 18세기 이후에 나타났다. 그전까지 전 세계에서 사람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 개인으로서 스스로를 책임지지 않았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공동체 전체가 책임을 졌다. 저자 역시 근대적 개인으로서 주체적으로 자유를 누리고 책임을 지는 인간이라는 이상에  전 인류를 귀속시키는 오류를 범한 것은 아닐까? 

 

 또, 저자는 대중을 뭉뚱그려서 일반화했다. 어떤 대중운이든 맹신적 경향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내부는 금속결정처럼 균일하지 않다. 운동 안에서 개인은 고뇌하고 변한다. 모든 운동이 저자가 말한 맹신적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저자는 대중운동이 내포한 어두운 면을 경계했다. 이 어두운 면이 전부가 아니다. 인간이 가진 양면성처럼 말이다. 우리는 저자가 밝혀낸 어두운 면을 무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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