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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1841년 프랑스 리모주에서 재봉사 아버지와 재단사 어머니 사이에서 칠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도자기 공방에서 전통 도제 방식으로 처음 미술 교육을 받았다. 1862년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해 수학하며 알프레드 시슬레, 클로드 모네 같은 화가와 교분을 쌓으며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프랑스 국전에 해당하는 살롱전에 계속 작품을 출품했으나 매번 낙선하고 미술계의 혁명을 가져온 제 1회 인상주의전에 참여했다.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화가로 명성을 얻지만 류마티스를 심하게 앓아 손가락도 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고통받았다. 그런 와중에도 1919년 사망할 때까지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르누아르가 남긴 유화 작품 오천여 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성 인물화다. 그래서 이번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제목이 “르누아르의 여인들”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불행, 공포, 절망, 아픔이 없다.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이며 따스한 온기를 지니고 있다. 노동자계급 출신으로 경제적으로 빈곤한 시절이 길었는데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르누아르는 미학적 가치를 순수한 아름다움에 두었다. “그림은 예뻐야 한다”가 그의 지론이었다. 그 아름다움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소재가 여인이었다.

“걷는 법을 알기 전부터 나는 이미 여자들을 좋아했다.” 그는 성격도 온화하고 집안에 많은 여성들이 있어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호색했다는 뜻이 아니다. 여성적 분위기에 잘 어울리고 편안하게 녹아들었다고 그의 둘째 아들이자 나중에 영화감독으로 활약한 둘째 아들 장이 회고했다. 르누아르가 그린 여인들이 과연 어떤지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 몇몇을 감상해보자.

[루시 베라르의 초상, 하얀 덧옷을 입은 소녀, 1884, 캔버스에 유화]

감탄이 나올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초상화다. 엷은 미소를 지었는데 억지가 아니다. 금세 까르르 크게 웃을 것만 같다. 작품 속 소녀는 르누아르의 후원자였던 폴 베라르의 막내 딸 ‘루시’라고 한다. 초상화를 그릴 때 겨우 4살이었다. 르누아르가 얼마나 뛰어난 초상화가인지 이 작품을 보면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맑고 투명한 아이의 피부가 티 하나 없이 깨끗하다. 엷은 홍조가 오동통한 뺨에 드리웠다. 하늘의 천사가 아이 옷을 입고 모델이 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멀리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이었다.

르누아르는 1881년 이탈리아로 몇 달간 여행을 떠났다. 이 곳에서 라파엘로의 천장 프레스코화에 큰 감명을 받고 자신의 화풍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다. 원래 프랑스 고전주의 화가 앵그르를 존경했는데 앵그르가 라파엘로에 심취해 있었다. 인상주의 기법 대신 고전적으로 초상화를 그려 그의 다른 작품과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그렇지만 작품 속 소녀의 모습은 여지없이 예쁘고 또한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해 보인다. 르누아르 초상화의 특성이 살아 있다.

[두 소녀, 모자 장식하기, 1893, 캔버스에 유화]

작품 전체에 화사한 분위기가 넘쳐 흐른다. 이 작품은 이번 전시 포스터로 쓰일만큼 르누아르 인물화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다. 풍성한 머릿결에 통통하고 둥근 얼굴, 붉은 홍조가 내려앉은 오동통한 뺨이 소녀들의 발랄함과 생명력을 잘 표현하고 있다. 얼굴 부분은 세밀하지만 배경과 다른 신체 부위는 뚜렷한 경계가 없이 흐리다. 나는 르누아르가 옷을 표현하는 방식이 신비했다. 언뜻 보면 덜 그린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밀함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르누아르 특유의 밝고 화사한 색감과 재질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촉감을 재현했다. 전체적으로 몽환적 느낌을 자아낸다. 조금은 나른하여 긴장을 풀고 편안한 기분을 만들어준다. 그림 속 인물들의 티없이 맑은 행복과 몽환적 느낌이 어우러져 현실이 아닌 환상같은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르누아르는 모자를 좋아했다. 장미꽃도 좋아했다. 그의 인물화를 보면 모자와 장미가 대부분 나타나 있다. 오른쪽 등을 돌린 소녀의 모자는 인물을 압도할 정도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흰색 레이스와 리본이 풍성하며 분홍빛으로 색조가 져서 작품을 한층 낭만적으로 꾸몄다. 흰 모자를 쓴 소녀는 인상주의 화가 베르트 모리조의 딸 줄리 마네다. 마네라는 이름에 눈길이 간다.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동생 외젠 마네가 줄리의 아버지다. 르누아르는 외젠 마네가 죽자 줄리가 결혼할 때까지 후원했다. 꽃장식 모자를 쓴 소녀는 줄리의 사촌 동생이라고 한다.

[어린아이의 장난감, 가브리엘과 르누아르의 아들 장, 1895-1896, 캔버스에 유화]

절로 아빠미소가 새어나왔다. 아직 어린 소녀와 갓 돌이 지난 아기가 같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 아이와 소녀 사이의 유대가 높아 보인다. 부드럽고 따스한 기류가 화면 밖을 새어나와 나에게 도달하는 느낌이었다. 그림 속 아이는 르누아르의 둘째 아들 장이다. 훗날 “게임의 규칙”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를 만들어 존 포드에 비견되는 위대한 영화감독이 되었다. 여인은 장을 돌보던 유모 가브리엘인데 르누아르의 아내 알린의 먼 친척이다. 갓난 장을 돌보기 위해 왔는데 르누아르가 그녀를 모델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소녀의 흑발과 아이의 금발, 소녀가 입은 주황색 옷과 아이가 입은 흰색 옷의 대비가 절묘하다. 소녀가 화면에서 더 크지만 어디까지나 중심은 아이다. 흰색 옷과 오동통한 젖살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소녀를 보았다가 다시 아이로 시선이 집중된다. 나이 오십이 넘어 본 아들이 얼마나 예뻤을까? 이 그림은 르누아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안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르누아르의 마음이 어땠는지 충분히 알겠다. 한편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을 보고 “그 어떤 인위적 연출 없이 제스처만으로 여성의 인내심과 고독을 가장 잘 표현한 걸작”이라고 칭찬했다. 아이를 키워 보면 평론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으리라.

[흰 모자를 쓴 젊은 여인, 1894, 캔버스에 유화]

르누아르는 남자가 성욕에 가득찬 시선으로 여인을 그리지 않았지만 작품 속 여성들은 대개 관능적이다. 그가 선호한 여인들은 통통한 몸, 둥근 얼굴, 투명하고 맑은 피부, 젊음을 공통적으로 가졌다. 이런 특징을 가진 여인들이 관능적이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작품 속 여인은 온화한 표정으로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아주 약간 교태를 부리는 모습처럼 보인다. 과한 느낌은 아니다. 귀여운 느낌이 더 강할 지경이다. 온화하고 포근한 미소와 섬세하고 우아한 모습이 작품의 아름다움을 잘 살리고 있다.

그런데 르누아르가 여성을 보는 시선은 양면적 느낌이 든다. 이전에 관람했던 타마라 렘피카 작품 속 여성들과 달리 르누아르의 여인들은 수동적이다. 작품 속에 내재된 시선은 남성의 그것으로 그림 속 여성은 노골적이진 않지만

남자에게 잘 보이려는 모습이다. 이 작품 속 여인을 보라. 귀여우면서도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이런 특성은 자신이 아니라 외부로 향한다. 르누아르의 작품을 보면서 신비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보지만 가슴 깊이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이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 시선에 소비되는 작품 속 여인과 동등해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장미꽃을 꽂은 금발여인, 1915-1917, 캔버스에 유화]

여인의 아름다움과 관능미에 숨이 멎는 듯 했다. 살짝 풀어헤친 옷자락 사이로 가슴이 조금 드러났는데 금발여인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정돈되지 않은 모습으로 편안해 보인다. 관람하던 나도 이내 숨이 터지고 금세 이완된다. 르누아르 작품에서 나오는 관능은 자극적이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더 환상적으로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나도 같이 편안하게 노니는 기분이 든다. 그곳은 르누아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행복만이 가득한 곳이다.

나는 어두운 예술을 더 좋아한다. 폭력, 공포, 증오, 복수를 보면서 현실이 예술보다 더 나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다. 대작 전쟁영화같은 스펙타클에 취한 건 아니다. 드라마나 스릴러도 대규모 물량 없이 지옥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제일 싫어하는 장르는 동물이 나오는 가족 영화다. 약간의 어려움과 오해를 이겨 내고 가족애를 회복해 행복해지는 스토리다. 이런 이야기는 현실의 어두움에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지만 어두운 현실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별로 신뢰하거나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특히, 권위를 중시해 어떤 실수나 착오를 묻어두고자 하는 권력을 쥔 사람들을 가장 증오한다. 르누아르의 작품이 시각적 쾌감을 극도로 만족시키지만 가슴 깊이 적시지는 않는 이유는 그런 내 성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파에 앉아 있는 누드, 1900, 캔버스에 유화]

르누아르는 말년에 누드를 많이 그렸다. 이 작품은 누드이지만 옷을 입고 있는 다른 작품 속의 여인들보다 오히려 교태와 관음증적 시선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 그림 속 여인은 자연스러운 생활을 하다가 순간적으로 포착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매끈한 살결이 잘 표현되어 부드러운 감촉을 눈으로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몸의 선이 아직 어린 소녀같다. 누드화에서도 르누아르 인체 표현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명확하지 않은 배경, 배경에 녹아들 것 같은 흐릿한 윤곽, 표면의 촉감을 잘 살리는 붓터치, 환상적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붉은 색조가 작품의 미감을 증폭한다.

[인물의 상반신 초상, 1916, 캔버스에 유화]

이 그림 속 여인은 지금까지 봤던 다른 작품 속 여인과 느낌이 조금 달랐다. 교태를 부리기보다 어딘가 결기가 느껴지는 단호한 표정으로 또렷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상의는 흘러내려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화면 바깥 남성(혹은 화가)의 시선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던 이전 여인과 다르다. 그러나 온전히 주체적인 느낌도 아니다. 경계선에서 팽팽한 긴장 속에 서 있는 듯 보인다. 표현 자체는 르누아르 특유의 기법이 원숙했음을 알려준다. 류머티스로 손가락 관절도 움직이기 힘들었다는데 어쩜 이런 작품을 남겼을까? 오른팔은 배경에 녹아들어 희미하다. 옷 표현은 극도로 단순화 되었으나 화사한 색감만은 살아 번뜩인다. 실제 인체보다 훨씬 크게 그려진 팔은 조화를 깨기보다 여인의 물성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동물적 느낌이다. 성적 대상으로서가 아닌 생명체 본연으로서의 역동감이 느껴진다. 당대 비평가들은 르누아르가 인체 비례를 무시한다고 지적하며 비난했다고 한다. 풍만한 육감적 몸을도 이토록 당당한 모습이 나올 수 있다니 대가의 붓끝은 참으로 신비하다.

르누아르의 작품을 대표하는 대작 “뱃놀이 일행의 점심 식사”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는 주제와 맞지 않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그래도 르누아르가 그린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는 여인들과 함께 잠시 세상의 시름을 잊고 행복의 나라를 다녀왔다.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르누아르의 작품과 미술관 앞 작은 광장에 내리는 함박눈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 낭만적 조합인지! 기쁜 마음으로 눈을 맞으며 돌아왔다.

르누아르, 여인, 누드, 가브리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