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역사를 좋아한다. 플루타크 영웅전, 로마제국 쇠망사, 역사, 사기 등 세계적인 역사서들을 재미있게 읽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서를 읽은 것은 삼국유사 어린이용 다이제스트 정도였다. 내가 모르는 것인지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서로 대중용으로 출간된 것도 본 적이 없었다. 우리나라 역사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배우고 이런 저런 책이나 방송으로 많이 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해서 볼 만한 책을 검색해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징비록’이라는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성룡이 임진왜란에 대해 남긴 기록과 회고 이다. 징비는 시경에 나오는 ‘내가 잘못한 것을 징계하여 후에 환란이 없게 한다.’는 말을 줄인 것이라 한다. 조선조의 유명한 천재인 저자가 전쟁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겪은 것을 생생히 기록하여 그 수준과 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역사책이 있었다! 내가 몰랐을 뿐 유학자의 나라인 우리나라에 이런 책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한편 이런 책이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고(내가 거쳐온 교육과정에서는 그렇다)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서로 공인되지 않은 것이 이상하기도 했다. 어쨌든 반가운 마음에 책을 읽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발발과 전개를 쭉 기록한 책이다. 통신 기술도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여러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기록할 수 있었는지 정말 신기했다. 물론 유성룡은 조정의 관료였고, 여러 사람들에게 듣는 말도 있었으며, 전쟁의 지휘에 직접 관여를 한 사람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관료가 한심할 정도로 허둥되는 상황에서 전쟁의 시작과 끝부터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징비록에서 나오는 지시나 생각이 현실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

 

임진왜란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단어이다. 내가 알고 있던 임진왜란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섬나라를 통일하고 자국의 군사 세력을 소진 시키려고 조선을 부당하게 공격한 전쟁. 이로 인해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명이 멸망하는 계기가 된 전쟁’이다. 이런 일반적인 인식에서 나쁜 것은 일본, 조선은 엉뚱한 피해자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징비록에서 본 조선은 피해자가 아닌 전쟁을 초래하고 방치한 ‘방조자’에 가깝다. 일본은 조선에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루트를 내 달라’라고 했다. 이것은 만세고금에 통하는 전형적인 침략멘트이다. 유명한 사기에도 흔히 나오는 내용으로 사대부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조선은 당연히 전쟁에 방비를 시작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조선의 관료나 백성이나 ‘설마 전쟁이 나겠어’, ‘공사하고, 훈련하고 귀찮다’는 반응을 보이며 전쟁에 대한 방비를 대충한다. 그래서 부산-한양이 20여일, 평양까지는 60여 일만에 일본군이 점령해버린다. 명에서 ‘조선이 일부러 일본에게 점령 루트를 내주지 않는 이상 이렇게 빨리 오는 것을 불가능하다’며 의심해서 조사를 나올 정도였다. 그 과정을 속속들이 보면 믿기 힘든 일화들이 산재한다. 조선군은 왜군이 보이기만 하면 도망친다. 왜군에 첫 승리를 거둔 장군은 승리 직후 사형당한다. 오해로 조선군을 도륙한 장군은 상을 받는다. 전쟁이 진행되고 명나라에서 지원군이 온 때에도 싸움이 두려워 피하는 장군이나 군관이 부지기수이다. 많은 역사서를 봤지만 이렇게 무기력하고 해이한 전쟁 이야기는 처음 본다. 평양을 지킨 살수대첩이 남의 나라 이야기 같다. 해이하고 약한 나라를 다른 나라가 침략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이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현대도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는 꼭 과거와 같은 군사침략이 아니더라도 정치, 경제적인 침략을 당한다. 적을 보면 도망치는 장군과 군대를 보유한 나라, 침략을 예견하고도 제대로 방비를 하지 못한 나라는 당연히 침략을 당하게 되어 있다. 조선이 그때 망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이런 기가막힌 참상을 전한 것이 징비록이었다. 이 책이 대표적인 한국의 역사서가 되지 못한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창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럼에도 유성룡이 굴욕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후일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웬걸, 200년 후 조선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다.

 

한심한 역사를 돌이켜 보며 후손으로서 새겨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 현재 정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이에 따른 방비이다. 그러려면 임진왜란과 같은 역사를 알아야 한다. 임진왜란의 년도와 의병장 이름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의 실상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해이한 나라는 다른 나라의 밥이 된다는 세상의 법칙을 배울 수 있다. 다른 나라의 휘황찬란한 역사서의 승리와 굴욕의 역사도 많은 교훈을 준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외침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이야기, 그로 인한 끔찍한 피해는 한국의 현재와 미래와도 관련된 중요한 문제로 다가온다. 또한 왜국 일본은 아직도 황당한 발언과 행보를 멈추지 않고 있다. 다른 나라의 속내를 파악하여 방비를 하고 우리나라의 힘을 키워 애초에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런 원리는 나라뿐만 아니라 개인사에도 적용되는 내용일 것이다.

 

뼈아픈 역사를 기록한 ‘징비록’. 유성룡이 경계한 왜국은 아직도 우리나라를 우습게 보고 있다. 우리나라가 피해를 본 이야기를 읽다보면 가슴도 아프지만 허술한 대처가 황당하기도 하다. 이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