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이는 남은 생을 무척 감사히 여기며 살아갈 거라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내가 15살 되던 해 바로 이 무렵, 종합병원에서 대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가족과 주변 지인들은 당장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슬퍼하는데 정작 나는 무덤덤하기만 했다. 다행히 수술이 잘되고 회복이 된 뒤로도 오랜 습관이 되버린, '하루 두 번 약먹기'는 나를 영원히 환자인 상태로 규정하는 일종의 의식같은 것이 되버렸다. 어느 날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왜 이렇게 우울하고 비관적이야? 그런 일 겪으면 막 하루하루가 고맙지 않나?' 그러면 나는 속으로 대답한다. 죽었다 깨어난 사람에겐 다시 살게 된 삶에 대한 감사보다 회의와 허무, 두려움이 먼저 덮쳐올 수 있다고.

소설집 <맨밥>을 쓴 작가 이복구는 본인의 가족사와 월남전의 경험을 토대로 소설세계를 구축한 이로, 책에 실린 6편의 단편 모두가 자학과 죽음의 세계를 그리고 있으며 등장인물들의, 삶에 대한 처절한 비관의식이 또렷이 드러나 있는 게 특징이다. <식물의 시간>에서 3년만에 의식을 찾은 양정진과 <맨밥>에서 죽을 고비를 갓 넘긴 형은 삶의 기회를 다시 얻은 생존자들의 기쁨과는 다른, 자신을 원치 않던 세상을 향한 환멸과 고통에 사로잡혀 다시금 '자살'로써 의지적 죽음을 맞는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어떤 인물에다 나를 다시 조립해 넣고 싶어했다. 그런데 나는 전혀 그 인물에 대한 애착이 없다. 그게 문제라는 것이다. - p.60

아이는 마냥 귀엽고 순수한 존재라는 고정관념을 깨버린 <짖는 아이>는 충격적이다 못해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위선과 속물로 가득찬 어른들을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설정아래, 화자로 등장한 아이는 가정부의 폭력과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개줄에 묶인 채 진짜 개가 되어가고 인공수정의 산물인 친구 지수는 자신의 존재를 두고 심하게 다툰 후 집을 비운 엄마 아빠 때문에 추락사로 생을 마감한다.

그 소인국의 모든 것은 아이들을 위해 존재한다기보다 아빠 엄마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인형의 집 같았다. (...) 내 아이 이렇게 생활하고 있어요, 아빠 엄마 봐 주세요, 등의 행사를 준비하느라 아이들은 늘 몸살을 앓았다. - p.32

<미친 발>의 윤일도는 젊은 날 자신의 모든 청춘과 꿈을 버리고 식구들 먹여살리기에 제 몸을 아끼지 않았으나 종국엔 환경미화원이라는, 현대사회의 낭비와 욕망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신세가 된다. 한 때 꿈이었던 소설가로의 글쓰기 시도는 여동생의 어이없는 실수로 좌절되고 자신 속에 내재돼 있던 죽음으로의 욕망은 미숙의 자살로써 다시금 환기되어 그를 영원한 안식의 평온에 이르게 한다.

기억을 찾는다는 게..... 고통을 다시 갖는다는 것 밖에 더 있겠소. - p.220

 <매직 아워>는 선천적 신체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자전적 고백형식으로 진행되는 서사구조를 띠고 있다. 그는 유복한 집안의 딸 은정의 아름다움에 반해 꿈꾸던 결혼생활을 시작하지만 곧 세상 속의 타락한 인간들과 섞여 예의 순수함을 잃고 돈과 자식에의 집착으로 인해 망가져가는 아내에게서 인간 본연의 추악함을 느끼며 실망과 갈등을 거듭한다. 결국 아내의 교육열을 참다못한 아들은 자살까지 시도하고 그는 삶의 의지를 잃고 윤락가와 도박장을 전전하며 기약없는 노숙자 생활을 하게 된다. 어린 시절 자신과 같은 불구였던 학수 아재가 말한 인생의 매직아워를 찾아서.

내가 처음 이 도시에 와서 당신을 봤을 때 당신은 그냥 아름다움이었어. 그런데 이제는 내가 공포스럽게 생각했던 이 도시의 모든 것이 우리들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 같았어. - p.274

소설은 물질의 욕망과 타락한 인간 군상을 구체적 묘사와 화자의 진술로 비판하며 우리 시대의 진정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는다. 숨겨진 한국의 거장을 발견한 느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가독성 좋은 문체. 그러면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감정의 밑바닥까지 끌어모아 뭔가 울컥하는 느낌을 주체하지 못하겠는 글 전체의 분위기. 또한, 삶을 행복이 아닌 슬픔과 시련의 연속이라 보는 작가의 관점은 이야기 전체를 자살과 죽음이라는 공통 키워드로 묶는다. 자살하려는 이를 살려준 이는 그이에게 구원자일까 훼방꾼일까. 책장을 덮고 나서도 묵직한 여운을 어찌할 수 없어 그저 넘겨갔던 페이지를 다시 되짚어 간다. 20여년전, 나의 삶은 살만한 것으로 재장착된 것일까. 묻게 되는 작품이었다. 주저없이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