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는 '만약'과 선택의 기로가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이 지독한 '만약'들." p233

인간에게 '만약'이라는 게 없다면 어떨까? 아주 냉정하고 날이 선 것처럼 단정해 버리는 듯한 <만약은 없다>라는 이야기를 던졌던 저자가 그 두 번째 일기를 펴냈다. 전작을 읽지 않지 않았지만 충분히 '죽음'과 그 '경계'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

 

<지독한 하루>는 인간이 세상에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불공평한 일들로 점철된 삶을 살지만 딱 하나 '죽음'은 모두 공평하다는 말이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촌각을 다투는 그 경계에서 죽음이 아닌 생존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의사의 심리나 고뇌가 인간적임을 느끼게 해준다. 사실 뻣뻣하고 권위적이며 무례했던 의사는 나에게 재수 없는 부류 중 하나였다.

 

27년 전. 중환자실 천장만 보면 1년여를 살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베드 채 실려 나가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나 리넨이 머리끝까지 올려지고 곡소리를 뒤로 한 채 실려 나가는 '죽은' 사람들을 보며 부디 살던 곳보다는 좋은 곳으로 가라고 짧은 기도를 하며 차례를 기다릴 때의 심정이 고스란히 살아나 흐릿해지는 활자를 읽어 낼 수 없어 토막내서 읽어야 했다.

 

그 혼잡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얼마나 더 훌륭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p66

이 짧은 문장이 조금 전 아내와 사소한 말다툼을 후회로 뒤덮어 버렸다. 하필 이런 요동치는 감정 끝에 눈에 들어온 타이밍이라니. 혼잡하지도 종종거리지도 않았지만 왜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내 감정만 쏟아내고 말았을까. 오랜만에 남편과 나설 외출에 달떴을 아내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했다. 언제쯤이면 그런 일들을 후회 없이 해낼 수 있을는지. 아내의 눈을 마주하기까지 감정은 줄곧 흔들렸다.

 

<거기 119죠?>를 읽는다면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들이 그러고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의 갑질적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문장들 속에서 그들에게 쫓아가 아구창을 날리고 싶은 생각에 감정이 부들부들 떨린다. 언제까지 이런 불평등한 계급적 사회에서 살아야 할까.

 

"너를 두고 어디 안 갈게. 잠시도 안 갈게. 이제 평생 너를 두고 어디도 가지 않을게… 미안하다. 아빠가, 미안했다. 이제, 행복하게 살자." p186

눈물이 쏟아졌다. 목이 꺾여버린 아이. 점점 성장하지만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아이의 축 늘어진 무게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27년 전. 내 목도 그렇게 꺾였고 내 어머니는 축 늘어진 내  몸뚱이를 붕 띄워 휠체어에 태우고 차에 태우고 했었다. 그때의 일들이 방금 전에 일어난 일처럼 오롯이 전해져 책장을 덮었다.

 

그만큼의 시간이 지난 지금, 치열하던 삶의 경계를 벗어나 나는 살아있고 사회복지사로 살고 있다. 그래서 주제넘지만 아이의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내 잘 못"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불시에 터져버린 사고였고 아이의 장애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이다. 원망도 죄책감도 안고 살지 말기를. 나 역시 그렇게 살기 위해 애썼다고. 그래야 조금은, 아주 솜사탕처럼 느낄 수 없는 무게만큼이라도 가벼워진다고 말이다.

 

이 책은 응급실 자동문을 경계로 생사를 가르는 응급실 의사의 처절한 일상에 대한 기록이며, 타인의 삶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노고를 조롱하는 부끄러운 민낯이며, 인간의 존엄을 위한 외상응급센터가 정치적 논리에 외면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에 분노하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병원에서 무례한 양아치들이 활개를 치게 만들면 안 된다는 점에 동조하게 한다.

 

지독한하루, 만약은없다, 남궁인, 문학동네, 응급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