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그녀의 말에 위안을 얻었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안도감도 느끼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사랑과 그 부수적인 상황들이 일으키는 감정놀이가 시시하게 느껴질 뿐이고 세상 전부도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감정들이 사실은 한 때의 감정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세상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과 이별을 반복하는 사람에게는 그녀의 말이 여전히 유효하겠지만 사랑을 이루었거나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그녀의 말은 그저 아련한 추억 하나쯤 떠올리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도 미처 몰랐다. 내가 이렇게까지 건조해져있을 거라고는...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새삼 이렇게 글로 읽고 있는 동안에서야 새삼 깨달았다. 이제는 내가 더 이상 사랑이란 단어에 설레어 하지 않고 이별이란 단어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리움이란 단어를 봐도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슬픔이란 단어에도 희망이란 단어에도 행복이란 단어에도 그 어떤 단어에도 그 단어만이 주는 혹은 주고자 하는 감정을 더 이상 불러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래서였나보다. 라디오를 더 이상 듣지 않게 된 것이... 아니 들어도 말랑말랑한 이야기가 있는 프로그램보다는 줄기차게 클래식만 나오는 클래식 라디오에 주파수를 고정시켜 놓았던,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의 변화를 이제야 알겠다. 나는 어느새 그녀가 말하는 것들을 공감하기에는 너무 나이 들어 버린 아니 너무 지쳐버린 마음만을 갖게 된 것이다. 쉽게 체념하고 쉽게 잊으려하고 쉽게 동요하지 않으려 하는 마음... 그렇게 해야만 내가 다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울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나는 너무나 잘 알기에...

카피문구처럼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를 닮았다. 그래서 한 때는 그녀의 이야기에 아픈 마음을 달랬고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많이 변했는데 여전히 과거의 나를 닮은 그녀의 이야기는 더 이상 공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나는 변해가는데 그래서 세상의 모질고 비정한 규칙을 점점더 이해해가게 되는데 그녀의 이야기는 여전히 과거에 남아 비슷한 이야기만을 늘어놓고 있다. 그 이야기에 여전히 지금의 누군가는 과거의 나처럼 위로받고 공감대를 형성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지금의 나처럼 그런 말랑말랑한 감성에 더 이상 마음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랑말랑한 글에 더 이상 감동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데도 왜 나는 아직도 이런 글을 좇는 걸까. 그래도 조금은 덜 마른 채 감성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런 글을 보면서 덜 마른 감성조차 바싹 말리려하는 지독한 성격 때문일까. 그녀의 이야기는 새삼 내가 너무 변해버렸다는 것, 색감이 다 빠져나간 회색인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슬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변하는 것도 나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