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이성만으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

주관이 배제된 철저한 객관성.

마치 사회과학논문을 읽고 있는 묘한 기분.

  

 차갑고 건조한 영상이나 글은 사물이나 사건을 날 것 그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깔끔하다. 감정의 격변으로 발생하는 카타르시스는 일회적인데 반해 이성의 무미건조함은 생각보다 꽤 오래간다. 감정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일상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객관화된 이성의 시선은 지옥을 방불케 하는 사건들의 진면목을 차근차근 제대로 들여다 볼 기회를 준다. 일회적인 감정의 불꽃은 쉬 사라져도 객관적 이성의 힘은 오래간다.

 

 <블랙호크다운>이라는 영화는 볼 것이 많은 전쟁영화다. 생사를 넘나들며 겨우 기지로 돌아온 주인공. 그가 본 기지모습은 바깥세상을 처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료들은 평소처럼 운동하며, 뭔가를 먹고 마시며 즐겁게 웃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부분 할리우드 전쟁영화는 영웅이 탄생하고, 그 영웅은 이름에 걸맞게 영웅으로 죽고, 그 영웅의 활약으로 전선의 교착 상태가 해결되고, 적 대공세의 예봉은 꺾인다. 이런 종류의 영화는 별 생각 없이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블랙호크다운>은 마지막 부분이 꽤 인상적이다. 감정을 자극하는 전투장면에서 긴장과 흥분의 카타르시스만 느꼈다면 영화는 비슷비슷한 동류의 영화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극한 긴장감은 기지 안의 평화로운 모습에서 충격으로 바뀐다. 그래서 전쟁의 본질이 선명해진다. 내가 겪지 않았다면 모를 진짜 전쟁의 본 모습이 보인다.

 

안전한 기지에서 편하게 생활하는 군인들의 모습은 우리가 전쟁터를 바라보는 시선과 묘하게 겹친다. 뉴스와 영상으로 소개되는 수많은 분쟁지역과 전투장면은 실제 우리 일이 아니다. 그저 매일 반복되는 세계뉴스의 일부분 일뿐. 통신기기의 발달로 우린 참혹한 영상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어쩌다 전쟁터에서 피어난 휴머니즘에 잠깐 반응하지만 그 지속시간은 매우 짧다. 어쩌다 접하는 대량 학살 또한 사상자의 숫자만 대충 기억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실제 전쟁과 우리 생활과의 객관적 거리를 느끼는 순간 전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장이 펼쳐진다.

 

 책은 시종일관 주인공의 덤덤한 시선으로 1차세계대전 참호전투를 그려낸다. 이건 뭐 그냥 객관적인 보고서라고해도 무방할 정도다. 애국심으로 군에 지원하고, 훈련받고 전선으로 향하고, 포격으로 동료들이 죽어나가고, 자신도 부상당하고, 전차와 항공기 독가스등 신무기의 대량학살을 경험하고……. 피가 튀는 전쟁터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도 느끼고(그닥 자세하게 서술하지도 않는다), 신무기와 신기술에 대한 찬사도 보낸다. 전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새로운 기술로 전쟁의 개념이 바뀌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글쓴이의 기대도 보인다. 그렇다. 인간중심의 휴머니티는 거의 없다. 전쟁을 그저 전쟁으로 기술한다. 그래서 지루한 소모전이었던 참호전을 확실히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전선이 교착된 상태에서 물자와 사람만 소모되는 건조한 전쟁. 전쟁에 대한 건조한 글. 감정의 동요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문장.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하지만 전쟁이 무서운 건 인간의 감정을 냉혹할 정도로 이성적으로 변화 시킬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누구나 인간이라면 다른 인간의 고통에 대해 측은함을 느낀다. 현대전은 상대의 찢겨나가는 육체와 사방으로 튀는 핏방울을 눈으로 확인할 필요 없이 버튼만 누르면 된다. 실제 온몸이 갈기갈기 분해되는 타인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더 많이 보는 세상이다.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감정의 자극 때문인지 우린 전쟁의 객관적인 광경에 대해 무지하다. 언론이 중대한 사건을 호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영상은 장점도 있지만 분명 단점도 존재한다. 이미지를 단편적이고, 자극적이며 매우 감정적이다. 반복되면 자극의 강도에 둔감해진다. 그래서 이성적 판단을 그르게 만든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텍스트다. 글은 감정적인 영역을 자극하는 부분에서 영상보다는 한 수 아래지만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배양할 경우 영상보다 한 수 위에 있다. 객관적 서술로 전쟁의 맨얼굴을 볼 수 있었던 흔치 않았던 독서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