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어떤 치욕의 역사가 있었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자세하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던 듯 하다. 그런데 돌아보면 남한산성은 이상하게 나와 인연이 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부러 찾아가보진 않았지만 학군단 후보생 시절 야간 행군을 가기도 했고, 외교통상부 워크숍 강의 때, 나와 같은 조에 있었던 한양대 다니던 형이(이름은 잊었다) 한번에는 아니지만 '병자호란 때 조선 왕이 누구인지 아는가?'란 질문에 '인조'라는 답을 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난 그때 '어떻게 저런것까지 알지?'란 생각에 충격을 받았고, 거기서 서울과 지방의 수준 차이를 느꼈다.

야간 행군에 대한 기억은 더 크다. 당시에는 병자호란의 아픔을 되새기면서 남한산성으로 야간행군을 한다고 했지만, 그 의미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거기다 야간행군이다 보니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능한 한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는 길로 걸었던 것도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생각날 것은 다 생각난다. 정확한 명칭과 위치인지는 모르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대충이나마 추측하면서 읽어볼 수 있었기 때문에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행군을 마치고 남한산성을 내려올 때, 한 문을 내려오는데 굉장히 가파른 길을 내려왔다. 소설을 읽으면서 대강이라도 대입하니 좀 더 이해가 쉬웠다. 다만 더 자세하게 느껴보려면 다시 한 번 남한산성에 올라가봐야 하겠지?

 

어쨌든 남한산성이란 책, 김훈작가에 대해 좀 더 깊이 알 수 있게 된 책이었다. 나는 칼의 노래만 '노래'이기 때문에 동음의 반복에 의한 운율을 만들어내는 줄 알았는데, 남한산성 또한 그랬다. 2권으로 판단하긴 어렵지만 아무래도 작가의 어투인 것 같다. 마음에 든다. 동음이 무조건 쓰면 이상한 것이라 생각이 아니라고 밝혀지는 것이니까.

 

그리고 강연에서 작가가 자신의 경험과 생각, 작품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소설에 들어가는 공통적인 요소는 '인간의 악과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맞는 이야기다. 칼의 노래는 아마 선조가 그 주인공이 아닐까 생각했고, 남한산성에서는... 딱히 떠오르는 이는 없는 것 같지만, 정명수도 살짝 그렇게 그려지고 있는듯 했고, 정도는 약하지만 청나라도 약간은 그렇게 그려졌다.

 

무엇보다 소설에서 굉장히 가슴 깊이 들어온 부분 중에 하나는 이것이다. 사대부의 무능력함. 권력을 가지고 높은 자리에는 있으나 그것이 그들의 출성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들의 삶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자리를 유지하고 싶다. 하지만 전쟁 앞에, 칼 앞에 소용이 없다. 우리네의 현실과 무엇이 다른가.

마지막에 남한산성의 군사들은 요구한다. 화친하자고. 사대부가 할줄 아는 것이 뭐냐고. 싸우지도 못하는 것들이 성첩에 올라와도 따뜻한 자리만 요구하고, 척화만 주장한다. 척화 주장할거면 니들이 우리를 지휘해서 직접 창을 들고 싸우라는 소리에 아무 답을 할 수 없다. 답답하다. 그러면서도 친화를 주장하는 사람은 목을 매달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화친의 국서를 쓰기보다는 죽음을 택한다. 물론 그 시대의 사상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고, 누가 진정한 신하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척화를 주장하려면 직접 싸움터로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려면 가문의 수치가 될 수 있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또한 출성의 순간에 자신의 주장과 정 반대의 상황을 맞이했을 때,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고, 눈물을 흘릴뻔한 장면은 두 명의 신하가 자신을 내어 척화를 주장한 신하로서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신하들은 품계가 높은 자들도 아니었고, 임금과 가까이 했던 자들도 아니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런 신하들이었다. 인조의 그 비참함, 충신을 늦게서야 발견했으나, 그들을 죽음의 길로 보내야하는 안타까움... 이런 것들이 두 충신의 담담함과 맞물려 더욱 가슴아픈 장면을 내어놓는다.

 

나 또한 남한산성에 서 있었다. 작가의 묘사 덕에, 나의 경험 덕에, 나의 상상력 덕에 남한산성과 행궁, 청의 군대는 내 머릿속에 항상 담겨 있었고, 덕분에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책(남한산성)과 관련된 꿈을 꾸었다(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어둠 속에서 성벽을 지나던 기억은 나를 산성을 지키던 군사로 만들어 주었고, 졸졸졸 흘러 나오는 물을 마시러 갔던 기억은 얼음으로서 성벽을 보수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군사로 만들어 주었다. 남문에 오르던 그 순간은 남한산성을 지키기 위해 들어온 군사가 될 수 있었고, 비탈을 내려오던 장면은 군사작전의 어려움을 느끼게 된 수어청의 이시백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제 학군교는 성남에 없지만 다시 한 번 남한산성에 올라 찬찬히 산성을 둘러보고 싶다. 후보생 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그리고 소설 속의 군사가 되어, 사대부가 되어, 인조가 되어 기억을 되살리며 나만의 남한산성을 세우고, 이번엔 꼭 출성해보고 싶다. 어떤 출성이건 간에, 내가 목숨을 다 바쳐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확신으로, 그리고 당당함으로 출성하고 싶다.

 

- 나만의 리뷰 中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