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신경증과 정신분열적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젊은 날이 시작할 무렵엔 조증과 간질, 범불안장애가 내 숨통을 조이곤 했다. 보너스로 마치 요즘 회자되는 프리온 단백질[광우병성 단백질]과 유사한 장기적 불면증으로 두 달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잔적이 있다.

내가 직접적으로 분명한 형태의 우울증이라고 각성했던 시기는 중3때였다. 그때 나는 친척의 광명으로 일리노이주 시카고 고모 집에서 두 달을 체류 중에 있었다. 거기서 강렬한 문화 충격과 더불어 내가 누군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한국 사회의 편협함에 대한 반발심으로 충만한 내 영혼을 가누기 위한 비법으로서, 그 모든 걸 내 내면 속에 억누른 채 이 거대한 북미를 체험하기 위해서 나는 변절했다.

첫날은 이방인의 시각에서 아무 백인이나 인사하고, 아는 채 하고 그들에게 내 물건들도 빌려주면 피상적으로나마 나만의 조증적 기질이 발발한 느낌이었다. 모든 게 유쾌하고, 이 새롭고 광활한 그리고 첨단적이면서도 깔끔한 자연으로 온통 채색된 이 땅에서 나는 지금까지 모아두었던 행복을 순식간에 소모하는, 그런 감각의 뒤틀림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모든 아름다운 전조, 즉 조증 증세는 곧 깊은 우울증이 올 거라는 신호였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깨어있는 동안 허쉬 초콜릿을 수 십개 입에 쳐 넣고, 물 대신 코카콜라 클래식이나 달달한 주스를 먹는 행위가 나의 신경에 어떤 위해를 가하는지. 나는 다만 내가 새로이 직면한 서구적 쾌락을 온 몸으로 통각하고 싶을 따름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하여튼 1달 만에 나는 가벼운 잠에도 못 드는 중증 우울증환자로 변절했고, 그 누구도 나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같이 이 땅을 밟은 동생과는 이미 절연한 상태라 한마디 대화도 불가해했으며 나의 친척 형, 누나는 자기 일에만 관심 있는 머저리, 찌질이들 이었다. 또한 그들은 미국 이민자들에게서만 유추해볼 수 있는 속물이었다. 나는 그들이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한심하다는 문제였다.

한국으로 귀국하고 나서 부모님은 내 정신질환에 대해 전면적으로 거부의 의사를 비추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일반인도 누구나 일련의 신경증을 갖고 있고, 내 우울증은 현재 매우 심각하여 약물이 아니면 고칠 수 없다는 태도적 의미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역설했다.

부모님은 비록 이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 일이 내 인생에 전환점이 되리라고는 그들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처음 접한 약은 프로작. 최초로 시판된 SSRI[일명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그리고 싸구려 신경안정제들… 그렇게 그것들을 3년을 먹었다가 파록세틴이라는 비교적 최근에 개발된 SSRI로 갈아타게 된다. 그러다가 제 갈 길을 못 찾고 방황하다가 학교 자퇴, 이런 저런 범죄도 저질러보고 오토바이도 타며 막장 인생에 도달하다가 의정부 성모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결과는 조울증. 퇴원 후 리스페돈만 8mg 먹다가 도중에 레메론과 쎄로켈로 교체, 현재는 이펙사와 쎄로켈을 먹고 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정신의학에 대해 공부하며 1년을 보내다 군대 면제를 받고, 내 본질에 대한 참다운 계시를 받게 된다. 그것은 어느 시점에서 일어난 폭발이라기보다는 점층적으로 쌓여왔던 쓸쓸한 취향의 문제라고 해야겠다. 내가 글쟁이라는 것, 내가 예술가라는 것, 내가 철저한 초자본주의의 숭상자라는 것, 내가 법을 증오하는 사람이라는 것, 나의 견지로 계산할 때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패러다임은 약학이라는 것, 그것도 항정신약물! 나는 정신과만 수군데를 전진하는 hospital shopper이기도 하다.

지금 나는 정신의학 분야 안에서는 자격증 없는 전문가가 되어있다. 내가 정신과 의사들과 다른 점은 그들이 환자들을 다루며 돈을 벌 이유로 빡세게 정신의학의 세계에 입문할 때, 나는 다만 학구적 호기심으로 정신의학의 세계에 몰입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파이프를 만나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정신병원을 퇴원하고 타성에 젖어 깊은 환멸의 강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정말 무력하고 모든 게 역겹고 나 자신이 초라했다. 한 여자를 우수어린 향수에 근거해 떠올리는 것도 바보같은 일이라 생각했을 때였다. 그저 방안에 누워있는 게 낙이었던 초라한 날들이었지만, 어떻게 하다가 파이프라는 서구적 전통의 한부분과 조우하게 되었다. 담배는 입에도 않 데본 내가 파이프에 이렇게 빠질 줄은 그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들이 나의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나는 '파이프와 연초를 수집하고 그것을 피우는 일'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친구 앞에서도, 가족 앞에서도, 나와 관계된 사회 구성원 모두 앞에서도.

사실 난 아직 초보다. 파이프도 몇 개밖에 없고 연초도 향 연초밖에 없다. 돈도 없고 정신과 의사는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매일 밤 글을 쓰며, 혹은 사념의 깊은 명상에 침잠에 파이프를 피우고, 피우는 날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솔직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내 고통에 대해 전혀 모른다. 물론 이 지극히 개인적인 지난날의 기억, 달리 말해 회고록을 작성하는 나의 무의식의 기저에는 나를 전혀 모르는 타인들과 정신적으로나마 접촉하고 싶은 욕망이 침출되어 있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하다는 건, 인정한다. 나는 이 파이프 동호회의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열망, 사교에 대한 열망, 말하자면 자아를 표출하고 싶은 내가 쓰는 이글은 일종의 심증이기도 하다.

나는 파이프가 아름답고, 고독하고, 빈티지적인 향취가 좋아서 핀다. 연초의 냄새가 좋아서 핀다. 그것뿐이다. 아니 뭐 다른 복합적인 관념 같은 게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