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괴로웠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지매를 당하고 소위 싸움 잘하는 얘들한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물론 저보다 심하게 당한 친구들도 찾아볼 수 있었지만 만약 단순히 학생시절의 이지매가 제 인생의 난관이라면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하소연하지도 않을 겁니다. 아버지는 주식에 손을 대었습니다. 엄청난 돈과 퇴직금이 날아갔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술에 만취하여 집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는 화병과 그릇들을 집어던지고 자살시도를 수차례 했습니다. 저는 이지매와 집안의 파산, 가정폭력이라는 3고의 악재에 시달렸습니다. 거기다가 무서운 병마가 닥쳤습니다. 이른바 심각한 우울증과 강박증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천장만 바라보고 멍하니 수년 간 집안에 처박혀 지냈습니다. 정신병원을 8년 간 다녔고 입원만 9번, 그리고 입원기간만 만 1년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도 끊임없이 성적인 외로움이 저를 괴롭혔고, 외모가 볼품없는 저는 마음 속에서 싹트는 설레고 애틋한 감정을 많은 여자들에게 숨겨야 했습니다. 거기다가 머리도 좋지 않아 성적도 썩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단 하나, 바로 여성적인 감수성이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윤리적인 도덕률보다, 광대한 야망보다, 호기심에 가득 찬 모험심보다 더 심오하고 깊은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영혼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관념은 단지 인간이 자신의 삶이 무로 환원되는 걸 두려워한 나머지 만들어 낸 허구다. 따라서 사후세계는 오늘날에는 난센스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간은 다만 종족을 지키기 위해 자손을 끊임없이 창출하고 감각적이고 말초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욕망을 품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러나 봅시다. 왜 인간은 살려고 그렇게 발버둥치는 걸까요? 과학자들의 선진적인 유물론 즉 연역적 접근에 입각한 사적 유물론은 과학적인 사고방식만이 진실이며 미래의 해답이라고 제시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인간의 두뇌는 종족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고의 패턴은 어쩌면 생명의 노예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희노애락이란 인류라는 공동체를 위한 것이므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영혼적인 것이란 잔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인간조건의 피안에 서서, 생존과 번식의 역겹고 고루한 싸이클에서 벗어나서 모종의 선험적인 층위로서의 표상 그러니까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하나의 영혼적인 영속적 전설로 남게 되는 전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우월해지는 것 즉 부유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정신적으로 유복해져서 세계적인 지성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이성(異性)의 사랑에 목숨을 거는 것일까요? 이러한 조건에 처해진 당신은 허위의 선형적인 선을 따르는 것일 겁니다. 유일하게 영원하고 시공을 초월한 하나의 개인을 달성하기 위해선 철저히 현실배제지향의 에고이즘에 자신의 생활방식을 걸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모든 역겹고 더럽고 반복적이고 권태롭고 의미 없고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살아가기조차 숨가픈 종족번식의 도구로서의 하찮은 개인에게, 단지 주어진 시간을 운명이라는 필연성에서 연쇄적으로 하나의 시나리오를 재현하는 개인에게 지고의 형이상학성을 달성할 수 있는 알레고리가 되는 것이 바로 예술의 한 형태 즉 유미주의입니다. 오로지 그는 아름다움을 응시해야 합니다. 착란과 정신편력을 따라 현실을 버리고 픽션을 살아야 합니다. 그는 환상에 도취된 나머지 자신이 해야 할 모든 역할을 버립니다. 자신의 육체를 버리고 오로지 정신을 살아갑니다. 과거와 미래를 잊고 단지 지금을 사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지금이 곧 영원으로 치환되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픽션적 아름다움, 그것은 곧 인생의 전부입니다. 한 시인이 온갖 쾌락 중에서 최고로 꼽는 것이 이른바 미입니다.

저는 이따금 일련의 생각에 당착합니다. 나에게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예술가적 기질이 살아숨쉬고 있다, 내가 당한 모든 고통들은 다시금 영적 세계와 현실 세계를 이어주는 가교로서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나도 그러니까 한번쯤 살아볼 만한 삶을 산 것이다라고. 그래서 전 주장합니다. 종교를 버리십시오. 국가권력에 엿을 먹이고 마르크시즘을 지향하십시오. 현대예술에 자신의 정신력을 기여하십시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태도조차 사실은 인간의 생에 중요한 요소가 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미주의에 대한 고찰입니다. 꽃, 여자의 얼굴과 몸매, 아무도 없는 울창한 고요의 숲 속, 순박한 성격의 인간, 사랑의 이야기, 모성애, 과거의 친구와의 우정의 기억, 여러 가지 단속적인 추억들, 형제간의 깊은 우애, 처음 큰 맘 먹고 돈을 들여 산 오디오, 첫 월급 등…. 이렇게 보니 이런 것들은 유미주의와 교차되는 것이 아니군요. 저는 하나의 사상적 교착에 빠진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인간은 인간이길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단지 우월하거나 하찮음, 고락을 분유할 수는 있겠지만요. 저는 21번째로 돌아오는 이번 크리스마스도 혼자 보내게 생겼습니다. 동생은 고시원에서 재수를 하고 부모님 양쪽 다 맞벌이를 진행 중이고 혼자 집에 남아 고독을 씹어야 합니다. 단지 내리는 눈을 이따금 응시하면서. 이젠 삶이 지겹고 역겹습니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닥쳐오는 불행이 눈꼴시렵습니다. 인간으로 현존한다는 것 곧 도덕적 동물로 현성한다는 당위적인 우연성에 저도 모르게 구토가 나옵니다. 과거의 기억이 저를 계속 괴롭힙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기가 참 힘듭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21명의 생존자 전원의 운명이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성원 신경증으로 자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 그 상처를 지울 수 없는 겁니다. 상처는 점차 더 벌어지고 결국 그 사람을 죽음으로 이끕니다. 어쩌면 죽음이 그에게 위안이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