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망각에 맞서 투쟁을 하면서도,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 하면서도 자신의 과거는 망각하고자 했다. 절대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잊고싶어 했을까. 혹시 가면쓴 자신의 과거가 지금의 가면과 맞지 않아 바꾸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가면 쓰는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즈데나와의 섹스조차 지식인의 가면을 쓰고 했던 그 아닌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즈데나 역시 그를 위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미리 상정하고 그 인물이 되기 위해 부단히 연기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만은 맨얼굴이길 원했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으니까.

나는 끊임없이 현재를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자 했어. 왜. 나라가 나의 과거를 지웠으니까. 티도 나지 않을 하얀 벽의 얼룩이고 누구도 보지 못할 나선형 계단의 허공이 되게 했으니까. 그래서 내 젊은 시절의 사랑도 그렇게 지워지길 바랬어.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누구보다 선명하게 살아있는 거였어. 못생긴 즈데나가. 그래서 내가 그 시절에 존재했음을 계속 계속 상기시켰지. 풍경을 바라보게 했던거야.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던 풍경을. 잃어버린 편지들에 담긴 내 젊음을 보고싶게 만든 거야. 이미 잃어버렸지만...

그는 모든 잊혀져가는 것들 가운데 흔적이 되길 원했다. 역사가 새롭게 쓰여지고 또다른 역사로 이전 것이 지워지는, 그래서 즈데나를 사랑했던 자신 마저 망각해야 하는 현실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얼룩이길 원했던 것이다. 잊혀져 가는 것들 가운데 절대로 잊혀지고 싶지 않은 욕망. 역사가 속이지 못할 감옥에 자신과 주변인들을 몰아 넣고 영원히 조명을 받고자 하는 존재증명의 몸부림. 

자신의 과거조차 잊어버렸는데 감옥에 갇히지 않으면 누가 나를 기억해 줄 것인가... 나에겐 즈데나가 가지고 있는 잃어버린 편지들도 없는데.

자식이 장성하면 부모는 늙는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얘기를 절대로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우리는 같은 얘기를 여러번 반복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싫어서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투덜거린다. 그렇지만 반성의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볼 일이 있다. 우리가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우리의 부모님은, 특히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엄마는 얼마나 많은 시간 같은 말을 반복해야 했을까? '이건 사과야. 사과, 사과 사과..사과..' 그 끝도 없는 반복 속에 나는 사과라는 말을 아무 불편없이 하게 되었는데도 지금 단 한번의 반복이 싫어서 스스로 불효자를 자처하고 있다. 엄마는 내가 아이일때는 어른이고 내가 어른이 되면 아이가 된다. 모든 인내와 희생을 세상에, 특히 자식에 다 내어주고 본능만 남은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내가 자랐음을 느끼고 이제 내가 곧 그녀처럼 될 것임을 실감한다. 

 

마르케타는 예뻐야 했다. 카렐의 욕구를 만족시켜야 했고, 좋은 며느리가 되어야 했다. 내가 가면을 썼으니 상대방도 가면을 써 주길 원하지만 카렐은 그녀만큼 예뻐야 한다는 컴플렉스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마르케타는 외롭고 고독하다. 끝 없이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처럼 삶이 버겁다. 그냥 놓아버리면 될 것을 하지 못했던 그녀는 에바덕분에 시시포스의 언덕에서 헤어날 기회를 잡는다. 나 또한 예뻐야 하는 마르케타이다. 벗어나고 싶지만 세상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지는 않을까 스스로 구속하고 상대방마저 구속하는... 내가 원하는대로 욕망하는대로 살아야 함은 알지만 절대로 그렇게 될리 없다는 것도 아는. 

마르케타와 카렐의 욕망이 터져나온 시점은 점점 어린아이로 수축되어가는 엄마를 응시했을 때이다.

어린아이 같은 엄마. 낙타가 사자로, 사자가 어린아이로 되어야 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그녀는 점점 변했고 그런 그녀를 보면서 카렐과 마르케타도 자신들의 욕망을 응시한 것은 아닐까. 제멋대로 해석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P.122  "악마의 웃음이 사물의 부조리를 가리켰다면, 반대로 천사는 이 지상의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고 현명하게 구상되었으며 선하고 의미 가득하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싶었다."

P.123 "우스꽝스러운 웃음은 패배였다. 그럼에도 천사들은 한 가지 성과를 얻었다. 그들은 의미론적 기만으로 우리를 속였던 것이다. "

P.205 "그렇기에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말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세계로 변하고 싶은 것이다. 언젠가는(곧 닥칠것이다.) 모든 인간이 작가로 깨어날 것이며 전 세계적인 난청과 몰이해의 시간이 도래할 것이다."

세상은 너무 시끄럽고 누구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세계와 세계가 충돌하여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글을 쓴다. 자신만의 유일한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추억의 물증 '편지'.  그것은 타미나가 주관적으로 존재하는 추억 자체를 위고를 통해 잃어버림으로써 그 의미를 같이 잃었다. 더럽혀진 그녀의 추억은 더 이상 편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미 모두 다 잊었음으로.

그렇게 애타게 찾고 죽음까지 생각케 했던 남편과의 기억은 여기저기 벽에서 튀어나오면서도 끝내는 잊혀졌고, 슬프게도 사라져 버렸다. 잃어버린 편지들... 잃어버린 마음들...

p.231 "사랑의 절대성이란 절대적 동일성에 대한 갈망이다."

기억을 잃어버린 타미나는 껍데기가 되어 사라졌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

기억이 없는 것은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곳에 없다.

체코가 그러하듯. 보헤미아가 그러하듯. 카프카의 도시들이 그러하듯.

P.386 하지만 그녀는 "나는 살고 싶다."라는 말이 거미줄로 짜였다는 것도 알았다. 아주 사소한 일, 지극히 사소한 일로도 경계선 너머에 있을 수 있었다. 경계선 너머에서는 사랑, 신념, 믿음, 역사, 그 어느 것도 의미가 없었다. 인간 삶이 경계선 아주 가까이에이서, 심지어 경계선과 맞닿은 곳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에, 인간 삶이 경계선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것이 아니라 겨우 1밀리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인간 삶의 모든 신비가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