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에 셜록 홈즈를 전집으로 읽은 초등학생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교길 떡볶이 대신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권권 사모으는 데 용돈을 썼던 중학생도 흔치 않을 것이다. 추리소설에 대한 소년기의 독서취향은 커서는 미국 드라마 중 범죄물에 대한 탐닉으로 이어졌다. CSI 시리즈 전편은 물론이거니와 실제 프로파일러의 협조로 제작중인 'Criminal Mind' 며 육감수사의 백미를 보여주는 'Criminal Intent' 는 매 에피소드를 십수번씩 곱씹으며 볼 정도로. 사실 자극적인 범죄 사례 자체보다는, 사람의 심리를 파고 들고 이해하는데 관심이 있다. 추리물을 많이 접하다 보니 자연스레 과학수사에 대한 관심, 한국의 과학수사 실사례 등에 호기심이 생겼다.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익히 들어온 최상규 박사가 <범죄의 추억>을 발간하였다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책을 펴들자 마자 한 호흡에 다 읽어내렸다. 대한민국 법생물학 분야의 일인자이자 한국 과학수사의 수준을 높이는데 일등 공신인 최상규 박사는 프로페셔널리즘의 진지함 그 자체였으며 솔직하면서도 열정적이었다. 그래서 <범죄의 추억>은 소설처럼 보고서처럼, 드라마처럼 재미있게 읽혔다.

 

최상규 박사는 국과수와의 인연을 '숙명'처럼 기술한다. 인종(race)에 대한 편견이 심했을 1970년대 독일에서 순전히 실력 하나로 존경을 받으며 성공리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78년. 대학이나 연구기관으로 갈지를 고민하던 그를 한 선배가 국과수에 추천해주었다고 한다. 인력부족, 과학수사에 대한 인식 부족, 설비미비, 자금부족, 온통 구멍 투성이인 국과수를 처음 접한 그는 "국과수를 외면해선 안될 것 같은 소명의식 (23쪽)"을 느꼈다 한다. 이후그는 2004년 년퇴직할 때까지 25년을 그 소명의식으로 오로지 한 길을 달려왔다. <범죄의 추억>은 그러한 최상규 박사가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발전상과 그 숨은 이야기를 법생물학 분야의 이론과 실제 사건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주는 책이다.

 

 

 

'무분별한 흥미위주로의 책으로써가 아니다'라고 서문에 못박은 대로 최상규 박사는 <범죄의 추억>의 제 1부를 과학수사에 대한 소개로 시작한다. 인류학자 골턴의 지문연구에서 현대 DNA지문감식법에 이르는 흐름을 일목요연 짧게 요약해주어서 범죄추리물 애호독자로서 도움을 받았다. 제 2부에서는 최상규 박사와 국과수와의 인연을 중심으로, 한국 과학수사의 발전사를 기술한다. 책 제목인 <범죄의 추억>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내용은 제 3부에서 집중 전개된다. 영화화 되었던 화성연쇄 살인사건은 물론, 한국 과학수사의 위상을 높인 '서래마을 영아 유해 유기 사건' 등 과학 수사 실제 사례 이야기가 수십 건 소개된다.

  범죄양상에 따른 사전 예방 및 자기 방어 능력에 도움을 주고 싶은 최상규 박사의 집필의도에 부합되도록, 흥미위주가 아닌 분석적접근을 통해 실사례를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핏줄과 생물학적 아버지를 중시하는 한국문화의 독특한 특색이 그 실사례들에 반영되었다. 상당한 페이지를 DNA나 혈액형으로 부자관계 확인한 분석 사례에 할애하였음이 그 증거이다. 외도한 부인이 낳은 아이의 친부가 누구인지, 67세 노인의 친자라며 아이를 데려온 28세 여자의 아이가 과연 친자였는지 등 친생자 감정에 얽힌 다양한 사연이 소개된다. 과학수사에서도 소위 핏줄과 친생자를 중시하는 '한국적 특수성' '한국적 정서'가 반영된다는 점이 흥미롭기 그지 없었다.

  추리작가협회 명예회원이다가 추리소설을 펴내고 정식 작가로 출사장을 내민 최상규 박사. 차차 그의 다른 저서도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