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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신정아 4001/ 신정아/ 사월의책/ 420면/2011.3.15. 1쇄/2011.4.5.15쇄/ 2012.3.16~18

어쩌다가 읽게 되었다. 사무실 책장에 오랫동안 뒹굴며 다니던 책을 새삼스레 집어든 이유는, 갑자기 사건이 궁금해진 것이라기 보다 미술계에 대해 어느 정도 언급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업무상 미술계를 상대하고 이해해야 하는 일이 많은데, 미술이란 세상은 왠지 다른 예술계랑은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고, 뭔가 명확하지 않고 장벽 하나 너머의 세상 같은 갑갑함이 있었다. 미술 그 자체도 그렇지만 미술비즈니스나 행정의 문제 또한 마찬가지.

미술관련 기자들 사이에서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받았던 신정아 큐레이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보다, 그가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가 더 궁금했다. 책의 내용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친분이나 관련이 없는 사람들인 우리가, 이렇게 세세하게 타인의 삶의 순간들을 다 알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구체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쓰여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미술 관련 업무는 그다지 세세하지 않다(물론 이 책의 핵심 내용은 다른 데 있으니까).

신정아는 영어통역 아르바이트로 금호미술관에 들어가 큐레이터로 발탁된 흔치 않은 케이스로 한국미술계에 입문했다. 알바시절 이미 IMF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후안 미로'전을 '배째라'식으로 해외 담당자들과 협상해 모든 비용을 절감시킨 공로로 정식 큐레이터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그림보다 액자가 좋다', '뉴욕의 다국적 디자이너들', 아들리에 아담슨', '척 클로스'전, 존 커닝햄전 등 혼자서 거의 돈키호테마냥 모든 어려운 협상과 기획을 진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기획, 섭외, 협상, 디스플레이, 언론플레이, 미술관 관리는 기본이고, 마케팅과 로비를 위해 정재계, 문화 관계자들과의 사교와 모임까지, 또 밤을 세워 일을 하거나 기자들의 사적인 부탁까지 척척했다고 하니, 과연 '신다르크'라 할 만했다.(여기에 돈세탁 심부름과 커미션업무까지도 직접 뛴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미술관엔 큐레이터 혹은 학예실장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하나, 싶은 의혹이 들었다. 동료가 없고, 함께 뛰는 독주 시스템으로 묘사되어 있다.

어쩌면 신정아 문제는 재벌과 미술관 경영, 더 나아가 예술을 포장한 돈의 지배원리 및 어두운 커넥션. 혹은 대한민국 상류층의 위선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일부가 '재수없게' 도출된 사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정아 개인의 문제에서도 대학 학위라든지 논문 대필 등에서 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가치관이 드러나고 이를 용인 혹은 묵인하고 협조까지 하는 주변사람들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결론은 열심히 미술발전을 위해 고생하고 애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정아의 탁월한 능력과 뛰어난 업적은 돌출인물로서의 기이함 외에 특별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

책을 다 읽고 보니, 몇 가지 생각들이 걸린다.

사회생활하는 여자들(미혼이거나 미모면 더더욱)은 인간관계에 있어 참으로 많은 보이지 않는 난관에 빠지는데, 아마 표현된 것보다 표현되지 않은 것이 90퍼센트 정도 더 많을 것이다. 특히 사람을 상대하고 만나야 하는 직업이라면 더더욱. 아무도 대처법을 가르쳐주지 않는 상황에서 홀로 깨닫고 홀로 처신해나가야 한다. 특히 상류층이거나 소위 문화계인사라는 분들일수록 더욱 그 도덕성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이 많아 실망할 때가 많은데, 내가 보기에 책에 거론된 인사들의 행태들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과장이거나 거짓은 아니라는 것. 그런 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국회위원이며 높은 자리에 앉아 도덕과 비전을 얘기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거나 가소로울 뿐이지만.

또 하나는, 신정아 사건이 터졌을 때 나는 파리에 있었는데, 인터넷만 들어가면 파리 구경보다 더 재밌는 이야기가 미친듯이 쏟아져 나오니 도무지 바깥에 나가지를 못하고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미친듯이 재미었던 이야기가 어떻게 생산되고 무방비로 확산되었는지, 책을 읽다 보니 그것을 즐기고 부추긴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언론의 생리란 게 그렇다고 하지만, 일단 터트리고, 나중에 아니면 말고식의 행태가 누구의 저지도 받지 않고 횡행하는 사실이 참으로 무서울 뿐이다. 개인의 존엄과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에 대한 생각이 논의되고 토론되고 동의되는 그런 성숙한 민주주의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일말의 안타까움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