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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 오르한 파묵/ 이난아/ 민음사/ 2008.5.9. 1쇄/ 2009.1.14 인터파크~2.9

1. 책이 나에게 걸어왔다.

책이 나에게 저절로 걸어올 때가 있다. 주로 신문 서평이나 기사화 된 책, 누가 언급한 책, 기존에 읽던 책과 관련된 책, 아니면 공부나 개인적인 관심분야의 책을 사기 마련인데 어느 날 문득, 아무런 인포메이션도 없이 그냥 내 눈에 쑥 들어오는 책이 있다. 새해를 맞아 교보문고에서 이리저리 책을 살펴보다가 <이스탄불>을 발견했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임에도 그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약간의 자괴감을 갖고 있던 터라 소설이 아닌 자전 에세이 형식으로 된 이 책을 주르륵 넘겨보게 되었다.
오래된 흑백사진들이 간간이 삽입된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 그동안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도시 이스탄불이었지만 오르한 파묵이란 작가에 대한 호기심과 흑백사진과 함께 어우러진 ‘가족’, ‘할머니’와 같은 소제목들이 주는 따뜻함 그리고 먼 도시에 대한 이상야릇한 호기심이 복잡하게 어우러지면서 진정으로 ‘읽고 싶어’졌다.

2. 터키, 이스탄불, 오스만, 비잔틴, 콘스탄티노플, 보스포루스…

‘또 하나의 오르한’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오르한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되는 책은 1950~60년대 터키의 한 부유한 집안의 거실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갑부 할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이리저리 굴리다 파산에 파산을 거듭하여 말아먹는 아버지와 삼촌, 그 와중에 다른 여자를 만나느라 어머니와의 관계는 파탄에 이른 늘 ‘부재중’인 아버지, 재산 싸움에 원수처럼 으르렁대는 일가친척들 등으로 묘사된 개인사가 ‘자전 에세이’답게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재밌게 읽어 갈수록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스탄불이라니! 그 도시와 나 사이의 실제 거리도 그렇지만 시대와 지리와 역사와 문화 등이 어우러진 총체적인 거리감이 도대체 얼마만한지 아득해졌다. 너무 멀고 너무 낯설었다. 도대체 내가 터키와 이스탄불에 대해 아는 게 뭘까?

6.25전쟁 때 터키군이 연합군으로 참여하면서 (우리는 잘 모르는데) 그들은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아주 반가워한다는 전설적인 얘기를 들은 적 있고, 카페 유랑에서 배낭여행자들이 올린 아름다운 사진들의 피사체가 된 나라, 최근 몇 년 간 여행지로 급부상한 나라, 몇 년 전 터키 안탈랴 지역 원형극장으로 공연을 다녀 온 후배들이 사 온 비잔틴 무늬의 책갈피(우연히도 이 책갈피가 이 책을 읽는 내내 사용되었다), 또 2004년 베를린 영화제 최우수상을 받은 영화 <미치고 싶을 때>가 터키 영화라는 것…, 딱 이 정도 수준이었다.

그러나 오르한 파묵의 자전 에세이는 한 집안의 몰락과 비교되면서 과거 화려했던 왕조의 몰락과 그 이후의 버려진 시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스탄불 시민들의 애환-비애-에 대한 이야기가 핵심이었으므로 이들을 이토록 슬프게 하는 역사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콘스탄티노플, 오스만, 비잔틴과 같은 먼 옛날 세계사 시간에서나 외웠던 이름들을 진심으로, 알고 싶은 마음으로 다시 불러 보면서 네이버 검색창을 두드렸고, 뉴욕타임스에 들어가 오르한 파묵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는 정성도 들였다. 또 20세기 터키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과 가장 위대한 소설가라고 칭송한 야흐야 케말과 아흐메트 함디 탄프나르, 역사가 레샤트 에크렘 코추와 같은 처음 들어보는 어려운 이름들을 발음해 보면서 우리나라의 누구 정도로 대입할 수 있을지, 궁금해 했다.

3. 모든 변방에는 고독과 슬픔을 뜻하는 그들만의 단어가 있다.

포르투갈에 ‘사우다드(Saudade)’가 있고 우리나라에 ‘한(恨)’이 있듯이 터키에는 아랍어에 기원을 둔 ‘비애(Hüzün)’라는 단어가 있다. 모두 영미나 서구 언어로는 한마디로 번역하기 힘든 단어들이다. 포르투갈과 우리나라에 지형적인 변방의 처지로 인한 수평적인 고독과 그리움의 의미가 있다면, 터키의 비애는 역사로부터 벗어난 수직적인 고통의 이름일 것이다. 2천여 년 간의 영화를 누린 오스만제국이 몰락을 거듭하다 근세에 재정비한 나라가 터키공화국이다. 번역한 이난아 교수에 의하면 ‘Hüzün’은 비애, 우울, 침울, 우수, 깊은 슬픔, 암울, 음울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비애’가 가장 가까운 뜻이라고 한다.

오르한 파묵의 문학세계는 바로 이 ‘중심에서 떨어져 있다는 생각’과 ‘변방인으로서의 비애’가 주를 이루면서 지금까지 발표한 그의 거의 모든 소설이 이스탄불과 이 도시의 비애를 담고 있다고 한다.

“나의 출발점은, 어린아이가 뿌연 창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었다. 이제 비애와 멜랑콜리를 구분하는 데에 이르렀다. 한 사람이 느끼는 멜랑콜리가 아니라, 수백 명의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그 암담한 느낌, 비애에 가까웠다. … 도시와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서로 묶어 주는 그 유일무이한 감정을 이해하려고 하기 전에, 풍경화의 진짜 주제는 그 풍경만큼이나 그 풍경이 불러일으킨 감정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32~133면 / 10장, 비애-멜랑콜리-슬픔)

“이스탄불의 삶에, 치유할 수 없는 병처럼 배여 있는 도무지 벗어날 수 없고, 운명처럼 존재하는 빈곤, 혼란 그리고 지배적인 백색과 흑색은 이렇게 해서 실패와 무능이 아닌 어떤 영광으로 지속된다.” (147면 / 10장, 비애-멜랑콜리-슬픔)

4. 도시는 무엇으로 지속되는가

“화가가 되지 않겠어요. 난 작가가 되겠어요.”(I don’t want to be a artist.… I’m going to be a writer.")라는 말로 끝이 나는 이 책은 1952년생인 오르한 파묵이 건축학도에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기까지 스무살 무렵까지의 삶을 그리고 있다. 탄생, 부모님과의 관계, 할머니의 존재, 일가친척, 형과의 다툼, 학교생활, 첫사랑, 화가를 꿈꾸던 건축학도 시절 등의 개인사는 끊임없이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의 정서와 풍경과 어우러졌다가 충돌하고 다시 화해하기를 거듭한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기 전인 2002년부터 2003년까지 두 해에 걸쳐 썼고 2003년 발행되었다. 태어나서 50여 년 동안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의 교환교수로 간 것 이외엔 이스탄불을 떠난 적이 거의 없고, 지금도 어린시절에 살던 집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의 아파트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풍광을 아침저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한다. 50여 년을 같은 자리에서 해협과 다리와 지나가는 배와 사람들과 골목과 도시를 관찰한 결과가 이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스탄불은 그동안 서구인들에겐 ‘신비한 동양’으로 여겨져 플로베르, 네르발, 고티에와 같은 서양인 관찰자들이 과장하여 이국적으로 만들고 서로서로 영향을 받아 진전시킨 ‘관광지로서의 이스탄불’이라는 이미지가 컸다. 그러나 정작 이스탄불 시민인 오르한 파묵에게는
“내가 태어났을 때 이스탄불은, 세상의 외관적 측면에서 2000년 역사에서 가장 나약하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변방이자, 가장 고립된 시기를 살아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몰락의 정서와 가난 그리고 도시를 뒤덮은 폐허가 부여한 슬픔은, 나의 전 생애 내내 이스탄불을 표상하는 것들이었다. (1장, 또 다른 오르한, 19~20면)”로 각인된 곳이고,

“조금 전에 보았던 할리우드 영화처럼 아름답고 의미 있는 진짜 삶은 미국이나 유럽에 사는 행복한 사람들만 살아갈 수 있고, 나를 포함한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 앞에는 엉망이며 특징도 없고 페인트칠도 되지 않은 낡고 오래되고 값싼 곳에서 살아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부차적이며 중요하지 않은 초라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33장, 외국인 학교의 이방인, 419면)”와 같은 철저한 비애감이 이스탄불 시민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서구인들의 시각이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해왔는지 역사책과 그림, 사진, 오래된 신문 등을 뒤지면서 반박하고 이해하면서
“한 도시를 만드는 것이 그 외관뿐 아니라 도시에 있는 집 내부와 그 실내 풍경이라는 것을 외국인 여행자들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29장, 그림, 그리고 가족의 행복, 377면)”라고 결론짓는다.

5. 이스탄불, 그리고 서울

책을 읽는 내내 한 도시가 이토록 많은 감정과 시와 생명과 호흡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한편으론 500년 수도라고 자랑하는 서울이란 도시는 어떠할까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엄청난 격변을 거듭하며 서울을 지키고 있지만 너무 빨리 변화하는 시간 속에 있었기에 정작 관찰하고 성찰하고 지켜볼 기회를 놓쳐버린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누가 이토록 가슴 뼈저리게 서울을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슬퍼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밤에 자기 전에 조금씩 읽다가 재미를 붙여 본격적으로 읽어 보름정도 걸렸는데, 결코 만만한 내용과 분량은 아니지만 다 읽고 난 뒤 다시 처음부터 훑어보게끔 하는 여운이 긴 책이다. 아울러 오르한 파묵이란 작가가 무척 좋아졌고, 그동안 잘 몰랐던 이슬람 지역에 대한 궁금증과 그리움에 또 다시 시달릴 것만 같다. 그동안 터키를 이슬람국가라기보다는 EU에 가입한 서구의 한 나라쯤으로만 생각한 나의 무지와 무관심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 주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P.S/
*105면/ 밑에서 4번째 줄 (나는 이들은-->나는 이들을)
*418면/ 밑에서 4번째 줄 (나의 모습이 눈이 들어왔을 때-->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완벽한’ 연기는, 바람이 아주 조금 부는 날, 연기가 대략 45도 각도로 약간 올라간 후, 바다와 평행이 된 상태에서 처음에는 흩어지지 않고 공중에 그대로 있다가, 보스포루스에서 배가 전진하는 길을 가리켜 주듯 우아한 선을 그으면서 퍼지는 모양이었다. 선착장에서 머물러 있는 배가 바람 한 점 없는 날에 뿜어내는 가늘지만 짙은 석탄 색 연기는, 가난한 집의 작은 굴뚝에서 흘러나오는 가냘픈 연기처럼 슬픈 맛이 있었다.

페이지 : 30장, 보스포루스 위에 떠 있는 배에서 나는 연기, 384면

싸움에서 지고 깨지고 의기소침해지고, 팔과 다리가 멍투성이가 되며,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나고, 여기저기 지독하게 구타를 당한 내 모습이, 대적할 힘도 없으면서 맞서다가 깨지고 모욕당하고 자존심이 무너진 나의 상태가,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었다. 희열로 만들어낸 꿈의 색깔, 상상, 바람처럼 내 마음을 휘감는, 어느 날 위대한 일을 할 거라는 생생한 욕망과 현실이 나를 매료시켰다.

페이지 : 32장 형과의 싸움, 407면

때론 진부하고 위선적이며 거짓으로 보이는 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나 자신을 가식적으로 느낄 때도 있었다. 거리를 걸으면서 진열장에 반영되는 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때, 토요일 밤의 유흥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본 후 그 당시 베이올루에서 하나하나 개업하기 시작한 샌드위치 가게 구석에 앉아 아이란을 마시고 소시지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을 때, 순간 맞은편에 있던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 지나치게 현실적이며 세련되지 않아 견딜 수 없었다.

페이지 : 32장 형과의 싸움, 4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