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단순히 미스터리 추리물인 줄 알았다. 살인사건으로 시작해서 그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적해나가는, 즉 범인이 누구인가가 가장 핵심인 그런 추리소설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읽다보니 범인이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춘 소설이 아니었다. 물론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일까에 대한 호기심은 줄곧 있었다. 작가가 범인으로 의심되게 만드는 '미스터리한' 인물 '셋'을 만들어두고 이 셋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교차해가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방식을 취했는데, 독자들 입장에서는 이 셋이 모두 범인같고, 또 이 셋이 모두 동일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그런 의심이 들게 만들면서 마지막까지 사건의 범인이나 이 범인의 정체에 대해서 독자가 확신을 갖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렇기때문에 독자들은 마지막까지 '의심'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이 사람도 의심해야하고 저 사람도 의심해야한다. 그리고 이 <의심>은 소설 속 인물들도 피할 수 없었다. 범인이 누구인가가 중요치 않으면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럼 무엇이었느냐. 바로 '신뢰'였다. 믿음. 신뢰가 사라지면, 믿음이 약해지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믿어주지 못해서 서로에게 큰 아픔을 주기도 하고, 또 깊이 믿었기때문에 그것이 분노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살인사건, 범인 그 자체가 아닌 살인사건으로 인해 일어나는 파장, 의심이 가져오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신뢰의 파괴. 이것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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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코-데쓰야-요헤이"

​유흥업소에서 일하며 몸이 망가진 딸을 둔 아버지의 심리상태를 정말 잘 드러내주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이기때문에 분명 딸이 행복해지길 바랄 것이다. 내 딸을 사랑해주는 남자라면, 그리고 내 딸이 사랑하는 남자라면 아버지인 나도 그 남자를 믿어야한다. 하지만 내 딸은 문란한 곳에서 일을 하며 불행한 삶을 살았던 아이인데 '멀쩡한 남자'가 내 딸을 좋아해주는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남자도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남자만이 내 딸을 좋아해줄 수 있지 않을까. 요헤이도 그런 생각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데쓰야를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의심했고 딸과의 신뢰관계도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코도 마찬가지였다. 의심의 덫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데쓰야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결국 밀려드는 데쓰야에 대한 의심을 피하지 못하고 그를 경찰에 신고했다. 아이코는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향한 분노가 컸고 용의자가 저지른 비인간적인 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다. 데쓰야는 아닐 것이라는 확신과 여러 인상착의의 유사점이 가져오는 의심 사이에서 고뇌했을 아이코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또 그런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아버지 요헤이의 죄책감은 얼마나 컸을까. 그리고 데쓰야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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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나오토"

유마와 나오토의 에피소드는 동성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 다소 개방적으로 바꼈다고는 하지만 아직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들을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사실이다. 유마 역시 그런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었다. 동창들에게는 아직도 자신이 동성을 좋아하는 사람임을 꽁꽁 숨기고 있고 어머니와 형에게도 떳떳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오토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예전에 만났던 남자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내가 나오토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유마 역시 아이코와 마찬가지로 의심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오토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질 경우 그 후에 찾아올 파장에 대한 두려움이 나오토에 대한 사랑을 눌러버렸다. 나오토가 받을 상처보다는 내가 겪을 상처가 더 두려웠던 것이다. 이 둘의 에피소드의 결말은 아이코와 데쓰야보다 더욱 비극적이었다. 아이코가 느꼈을 괴로움보다 유마가 겪었을 괴로움이 더욱 컸을 것이다. 나오토의 진심을 알아차려주지 못하고, 믿어주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지켜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나오토를 향한 미안함이 뒤섞였을 유마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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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다나카-다쓰야"

아이코와 유마가 평범한 삶을 산 게 아니듯 이즈미 역시 여기저기로 도망다니는 삶을 사는 여고생이다.​ 이즈미는 우연히 마주친 다나카라는 인물이 계속 신경쓰이고 또 선심을 베풀게 되면서 인연을 맺게 된다. 다나카에게 특별한 어떤 감정을 느끼지만 이즈미 역시 마지막에는 다나카를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의심하게 된다. 이즈미에게는 다쓰야라는 학교친구가 있는데 이 다쓰야는 이즈미를 좋아하는 남학생이다. 이즈미, 다나카, 다쓰야가 함께 만나서 밥을 먹은 날 밤, 이즈미는 미군들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술에 취해버려 그런 이즈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다쓰야는 오래도록 괴로워한다. 그런 괴로움을 잊기 위해 마라톤 대회를 나가기로 결심. 매일 마라톤 연습을 하는 다쓰야의 옆에서 다나카도 힘이 되어준다. 다나카는 방랑생활을 했는데 그런 모습이 안쓰러워보여 다쓰야가 자신의 민박집에서 일하게 힘을 써주고 그 후로 같은 집에 살면서 다나카와 다쓰야는 친형제처럼 지낸다. 알고보니 다나카 역시 이즈미가 성폭행을 당한 날 밤 그 광경을 목격했고 너무나 분해서 그 미군들을 쫓아가느라 이즈미를 내버려둔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다쓰야에게 털어놓는다. 다쓰야는 다나카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아마 이즈미를 좋아하는 그 만큼 다나카를 좋아했을 지도 모른다. 이 셋의 결말은 독자로서는 허무하기도 하지만 이즈미를 지켜주고자 하는 다쓰야의 그 마음이 참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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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은 처음 읽어보는데 총 2권을 거의 3-4시간만에 읽어버린 것 같다. 술술 읽히는 몰입감과 스피드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슈이치의 대표작 <악인>을 읽어보지 못해서 두 작품 중 어느 것이 더 재밌고 뛰어난 지에 대한 평가는 못하겠지만 아마 악인을 좋아했던 독자들이라면 이 책도 괜찮게 읽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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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부터는 범인을 언급합니다. 스포가 싫으신 분들은 피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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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슈이치의 <분노>는 살인사건으로 시작해서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지만, 이 살인사건의 호기심을 깨끗하게 풀어주고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살인사건의 범인이 마지막에 살해를 당하기 때문. 야마가미가 죽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지만 목격자나 지인이 중간 중간에 흘려놓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대충 짐작이나 실마리를 잡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일단 이 사건의 범인 야마가미는 사건 당일 일자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여러모로 짜증나는 일을 겪었다. 그리고 날씨도 찌는 듯이 더웠다. 그로 인해 발생한 분노를, 야마가미는 짜증을 일으킨 당사자가 아닌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상대로 표출시켜버렸다. 아주 잔인한 살인이라는 행태로. 게다가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죽어 있는 피해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식사까지 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행동을 저지를 수 없다. 하지만 야마가미라면 그럴 만도 하다. '다쓰야'가 섬에서 발견한 '다나카'가 써놓은 낙서가 그가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임을 증명해준다. 그리고 야마가미가 예전에 일하던 직장에서 아무 문제 없이 조용히 일도 척척 잘 해나가고 동료들사이의 관계도 원만했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폭력과 함께 광기를 일으킨 적이 있다는 지인의 진술이 있었다. 프리미어리그를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그는 폭력을 일으킨 그 날 밤에도 프리미어리그를 보고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이 부분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대체 왜 그는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동료를 내리치면서 극한 분노를 표출했을까. 혹시 자신이 응원하던 팀의 경기내용이 너무 좋지 않았거나 패배한 게 아니었을까? 에이 설마 그런 이유로 그렇게까지 동료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을까 싶지만 야마가미라면 가능한 가설이다. 야마가미라면.. 분명 살인사건 당일에도 자신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못하고 그냥 앞에 어른거리는 죄 없는 사람을 상대로 그 분노를 표출시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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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쓰야는 왜 다나카를 죽였냐는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믿었기 때문에..너무 믿었기 때문에 화가 났다고. 이 말이 참 안타깝고 슬프고 쓰라렸다. 야마가미의 분노와 다쓰야가 느꼈을 분노의 성질은 분명 다르다.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서는 그 죄질이 같을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의 분노는 분명 다르다. 야마가미의 분노는 재미, 장난성이 강하고 오로지 본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나오는 분노이며 다쓰야의 분노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에서 오는 분노였다.​ 야마가미라는 인물은 현실 사회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며 앞으로 점점 늘어날 것이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건이 얼마나 많았던가. 묻지마 살인사건, 살인을 저지르고도 죄책감이 전혀 없는 범죄자의 얼굴. 그리고 그런 사건에 달리는 비인간적인 악성댓글들. 그런 잔인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천사'의 얼굴로 무장하고 있던 다나카를 생각하니 아직도 소름이 끼친다. 우리 주변에서도 웃는 얼굴로 악마의 본모습을 숨기고 있는 다나카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리고 이런 의심을 하게 되는 나는 과연 정상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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