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리터

 

 

 이 책은 무시무시했다. 피와 관련된 이야기로 400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문제는 너무 재미있는 나머지 밤을 꼬박 새버렸다.(나는 왜, 새벽 3시에 이 책을 들었는가!) ‘5리터’의 부제는 피의 역사 혹은 피의 개인사 인데, 말 그대로 이 책은 피의 역사와 함께 이 책의 저자인 빌 헤이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메두사의 머리 중 하나인 고르곤부터 빌 헤이스의 동성 연인인 스티브 번의 이야기다. 저자가 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의 연인인 스티브에게 있다. 스티브는 HIV 바이러스 보균자였던 것이다. 쉽게 말해 에이즈 환자였다. 이야기는 그런 그의 증세에 따라 시종일관 진지하지만, 유머를 잃지 않는다. 전문적인 지식이 이어지다가도 빌과 스티브의 연애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그러한 이야기의 흐름이 전혀 끊어지지 않고 매끄럽게 이어진다. 사실상 피와 관련된 이야기는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도 잘 알아야 하고, 익숙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보면, 정말 신기한 내용들이 많다.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인 연인을 둔 한 남자로서 게이라는 이유로 헌혈이 금지된 이야기(그러면서 장기기증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사실상 바이러스는 피에만 맴도는 것이 아닌, 장기에도 있는 것인데도 말이다.)는 무언가 그들을 말 그대로 권력자들의 논리에 따라 차별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사실상 에이즈는 동성애보다는 이성애에서 더 전파가 빠르고 많이 퍼져있다.(에이즈의 시작과 전파 역시 이성과의 관계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에이즈 바이러스를 가진 동성연애자보다 가지지 않은 동성연애자들이 훨씬 많다. 전체 인구에서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이 소수이듯, 그들의 사회에서도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이 소수인 것이다. 오히려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소위 스트레이트들의 헌혈이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신기했던 것은 바로 헌혈한 혈액이 다른 이에게 수혈될 때까지는 정상적으로 검사하고 보관되는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혈청이 살아있는 시간의 반 이상이 검사하는 데에 걸린다고 한다. 이것과 동시에 헌혈된 피에서는 백혈구를 제거하고 다른 이에게 수혈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즉, 내 몸에서나 백혈구가 방어적인 역할을 하지 다른 이의 몸에 가서는 공격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백혈구는 이상상태에서 몸을 보호한다. 무조건 그렇기에 백혈구를 포함한 피를 수혈한다고 생각했던 내 생각이 짧았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내 몸에 있는 도우미들을 모두 없애야 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니 말이다.

 

 책은 피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그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지금에 와서야 신음성이 절로 나오면서 어이없어 할 이야기들이 정말 많다. 무엇보다 피를 너무 흘린 환자에게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면서 더 피를 흘리게 하는 치료법이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정설로 여겨졌다니.. 허, 참. 누구도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지. 정말 극히 예외적인 병이 아닌 이상 피를 뽑는다고 고칠 수 있는 병은 사실상 없었다. 그런데도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은 피를 뽑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법이라고 믿어온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여자 혈우병이다. 혈우병은 피가 정상적인 속도로 멎지 않아, 출혈이 심해 사망에 이르기까지 하는 무서운 병이다. 사실상 우리는 이 병에 대해 굉장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혈우병은 남자만 걸리는 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혈우병은 여러가지 혈우병으로 나뉘고, 그 중 가장 증상이 심각한 A 혈우병을 비롯한 여러 혈우병들은 여성에게도 충분히 드러날 수 있는 병이다. 실제로 여자 혈우병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이 있으며, 이들이 증상은 남자 혈우병 환자들과 다르지 않다. 보통 생물시간이나 상식을 논할 때, 혈우병에 대해 남성들만 증상이 나타나고 여성들은 보균 유전자만 가지고 걸리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절대 아니라는 것! 여자 혈우병 역시 존재한다. 그리고, 유럽왕실에 처음 혈우병 유전자를 심어 놓은 것이 빅토리아 여왕이었다는 것도 매우 충격적이었다.

 

 일단, 내가 정말 신기했다는 이야기는 이 정도일 것이다. 이 책은 사실 과학적 사회적 의학적 명사들과 지식들만 봐도 굉장했고, 빌과 스티브의 이야기는 재미까지 더했다.(아, 이 커플. 정말 지켜주고 싶은 커플이다.) 하지만, 번역자가 밝혔듯이(빌이 게이라고 해서, 원고를 선뜻 번역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약간의 거부감 때문인지 책 곳곳에 그리 적절하지는 않은 어휘들이 쓰여졌다. 뭐, 번역의 문제뿐 아니라 저자 역시 여성의 생리를 다룬 이야기에서는 40년전의 이야기를 다루어서 그런지, 현대와는 영~ 맞지 않고 남성의 시각에서만(누이들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딸5에 아들 1인, 집에서 뭘 바라겠는가.) 바라보며 써서 그런지 답답할 정도로 사실을 왜곡시키는 이야기도 있다. 아마 여성들이라면, 다들 알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이 책은 그 분량만큼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아직까지 치료백신이 제대로 발견되지 않은 에이즈에 관한 진실과 피와 얽힌 진짜 사실들을 서술해 놓은 것이다. 피의 역사. 그 피의 역사는 지금의 내 몸에도 재현되고 있다. 이 피는 몸을 돌고 돌아 나를 살아가게 한다. 따뜻하고 힘이 넘치는 생명의 원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파득 혈관을 뛰노는 피의 소리에서,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또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내 따뜻하다 못해 뜨겁고 아름다운 피에서 느끼고 있다.    

5리터, 피, 에이즈, 헌혈, 혈우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