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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 슈나이더(Wolf Schneider)의 ‘만들어진 승리자들(Die Sieger)’은 역사에 기록된 승리자들의 진면목과 숨겨진 실상들을 파헤친 책이다. 이 책에 의하면 승리자들은 우연 또는 행운에 의해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거나 결정적 역할을 한 숨은 조력자들이 이름도 없이 사라진 것과 달리 홀로 영광을 차지했거나(이 역시 행운이라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기록상의 편의에 초점을 둔 역사 편찬자들의 취사선택의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위조되었거나 가상의 존재이거나 상징 조작의 수혜자들이거나 잘못 알려졌거나 성격적으로 적잖은 결함을 지녔거나 재능이나 업적과는 무관하게 명성을 얻었거나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었을 일을 한(대체 가능한) 사람들이다. 저자는 역사적이라는 말을 역사와 관련되었으며 사실로 입증되었으며 의미가 있다는 뜻이라 밝혔다.

저자는 예의 그 역사적 인물들을 1) 위대한 유명인, 2) 위대하지 않은 유명인, 3) 비유명 위인 등의 세 유형으로 분류했다. 무수한 역사적 인물들을 세 유형으로 나누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르지만 분류 기준이 다소 주관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예컨대 저자는 2)의 유형에 대해 가한 무엇 무엇이었다면 식의 가정을 1)의 유형에 대해서는 하지 않았다. 저자는 일곱째로 태어난 모차르트가 우리 시대에서라면 아예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무대(舞臺)가 18 세기(모차르트는 1756년에 태어나 1791년에 사망했다.)가 아닌 20 세기 또는 21 세기라면 예상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결과가 빚어졌을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저자의 가정은 상호 의존하는 두(또는 여러) 변수 또는 하나의 물리적 실체를 전체 환경에서 떼어 낸 뒤 혼란을 일으킬만한 다른 영향이 없는 상태에서 연구하고, 그 결과가 전체 환경 속에서도 동일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환원주의적 사고 유형 - 그렇게나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는 - 이다. 저자는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의 모국어가 불가리아어였다면 우리가 그를 어떻게 접했겠느냐는 말을 한다. 하지만 저자가 아무런 가정도 하지 않고 위대한 유명인으로 분류한 칸트에 대해 나는 저자의 어법을 가지고 칸트가 만일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철학을 하기나 했겠으며 했다 해도 철학자로 성공했겠으며 그랬다 해도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었겠느냐는 말을 하고 싶다. 물론 이는 특정 인물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가정을 하는 것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는 것일 뿐이다.

위대한 승리자들의 명성은 로토와 같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렇기에 우리 자신의 새롭고 독창적인 평가로 역사가와 비평가, 편찬위원들의 작위적이고 우연적인 결정을 깨부수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17 페이지) 이는 분명 매력적인 자유이다. 저자는 인간에게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욕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지적에 절대 공감한다. 정치지도자와 최고 지휘관의 명성은 대부분 인간의 위대함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삶의 화복(禍福)과 부침(浮沈)을 인격화하고 싶어하는 욕구의 반영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의미있다. 저자는 자신의 작업은 아나키즘적 열망이 아니라 월계관을 쓴 사람들은 모두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의 산물임을 분명히 했다.

그렇기에 “한번 인정된 위인에 대한 절대적 숭배만큼 위험한 것은 없고, 공적으로 신성시되는 권력에 대한 굴종만큼 큰 재앙이 없다”(17 페이지)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을 자신의 모토로 설정한 저자의 의도가 이해되는 것이다. 저자가 비판과 의심의 시선으로 본 위대한 승리자들은 콜럼버스, 레닌, 넬슨, 나폴레옹, 처칠, 괴테, 셰익스피어, 모차르트, 마르크스, 베토벤, 니체, 아인슈타인, 루소, 바그너, 랭보, 바흐, 러셀, 도스토예프스키, 볼테르 등에 이르기까지 길고 긴 목록을 형성했다. 저자의 작업이 의미 있는 것은 승리자들이 진정한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것에서 나아가 재능은 있지만 불운하게 사라져간 사람들을 복권시키고 진정한 가치를 재발견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명성과는 거리가 먼 존재일까?에서 인상적인 글은 “위대성과 영웅주의라는 사고에는 남성적인 망상의 한 갈래가 깊이 뿌리내려 있다.“는 요한 하위징아(‘호모 루덴스’의 저자)의 지적이다. 발명가는 늘 한 사람 뿐일까?는 발명계의 승자독식의 실상을 잘 드러내준 글이다. 저자는 무지렁이 농부는 세계정신이 될 수 없을까?란 글에서 역사에서 우연과 불합리의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고 고려의 범주에 넣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다. 지당한 말이지만 위대한 개인은 언제나 하나의 우연이라는 저자의 다른 말은 석연치 않다. 저자는 자신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 말을 적용하지 않는다. 나는 여러 장애에 막혀 이름을 남기지 못하거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여성들에 대한 저자의 관심을 긍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모든 뛰어난 개인이 우연이라면 뛰어났지만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여성들도 결국 우연이기에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으로 바라볼 대상이 아닐 것이다.

물론 우리는 방대한 자료를 꼼꼼히 살펴 기존의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 저자의 문제의식과 성실함, 효율성(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처럼 유례 없이 황당한 발상이 세계정신의 작품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라는 말로 마오쩌둥과 헤겔을 함께 비판하는 저자의 능력을 보라)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세계사가 추악한 괴물을 한층 더 총애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예수를 배신한 죄목을 뒤집어 쓴 유다에 대해서 저자는 인류 구원을 위해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신의 뜻이었다면(기독교는 이런 주장을 한다.) 유다와 빌라도, 바리새인, 사두개인, 형리(刑吏)들 모두 예수의 순교와 구원의 역사를 위해 꼭 필요한 인물들이 아니었을까?란 말을 한다.(이는 평소의 내 지론이기도 하다.) 저자의 이 말은 오명을 쓴 사람들에 대한 복권(復權) 차원에서 나온 말이다.

저자는 천재는 감정에 의해 정확하지 못하게, 유행과 기분에 따라 규정되어 왔다고 말한다. 저자는 천재라 불리는 유명 예술가들과 뉴턴 등의 과학자들, 루소, 니체 등의 철학자들의 병력과 정신적 또는 인격적 결함과 광기를 상세히 언급하더니 급기야는 천재성은 현실 관련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광기라는 정신분석가 아이슬러의 말을 인용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천재란 기실 우연의 산물이거나 오해에 기반한 것이거나 행운의 결과라는 말을 하지 않고 병고나 광기 등을 딛고 분투한 사람들을 나열한 것이나 작곡가들의 천재성을 길게 나열한 것, 몇몇 다재다능한 천재들이 재능을 너무 여러 분야로 분산시킨 바람에 최고의 걸작을 만들 기회를 놓쳤을지 모른다는 말을 한 것은 집필 동기를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레닌은 선행자나 조력자, 유리한 환경 없이는 성공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말해주는 대표적 인물이다. ‘만들어진 승리자들’에 여러 예술가, 철학자, 문인들이 레닌, 스탈린, 히틀러, 마오쩌둥 등의 살인마들과 함께 나온다는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처칠은 전쟁을 소명처럼 생각하고 너무도 즐겁게 수행한 사람 중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1945년 2월 이미 파탄이 난 상태였던 독일에 대해 가한 처칠의 드레스텐 파괴 행위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 기준에 따르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할 범죄이다. 그렇지만 히틀러라는 괴물을 무너뜨렸다는 이유로 온 세상의 찬탄을 받는 사람(처칠)이라면 그 괴물이 세상이 나타난 것을 욕할 수 있을까?란 저자의 말은 편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또한 종교 개혁가 루터에 대해 정상적이었다면 이단으로 낙인 찍혀 화형당했어야 했다는 저자의 말 역시 상식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모차르트에 대해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이라는 가정을 한 저자는 미켈란젤로에 대해서도 비슷한 류의 가정을 한다. 석기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예 조각칼을 잡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베드로 대성당의 증축을 맡기거나 200 제곱미터의 벽에 최후의 만찬을 그리게 할 교황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361 페이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면 어느 누가 완전할 수 있을까? 미켈란젤로와 동시대의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와 같은 시기를 살았다는 이유로 그가 잡았던 기회를 잡았고 또 업적을 이루었는가, 라고 묻고 싶다. 저자의 이런 (적절한) 시대 이야기는 계속된다. 나는 저자에게 “담론학은 세상에 수많은 가치관들이 존재하며 다양한 담론이 존재하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수많은 가치관들은 특정한 맥락, 특정한 측면, 특정한 조건 아래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물론 그 중에는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 빠지게 하고 파괴하는 가치관도 있다. 담론학이 어떤 가치관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오직 이러한 경우 뿐”(消雲)이라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

우리는 시대를 너무 앞섰기 때문에 어떤 이해와 호응도 얻지 못하고 잊혀진 사람들을 안타까워할망정 저자가 미켈란젤로에게 했듯 어느 어느 시대에 태어났다면 별것 아니었을 것이란 말을 할 필요는 없다. 모든 천재적인 성취를 유기적인 열등감의 과잉 보상으로 설명한 알프레드 아들러의 말을 인용하며 저자는 천재적인 작품들을 보상과 복수심의 결과라 규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을 승화의 사례로 볼 마음은 없는가, 라고 묻고 싶다. 그리고 마약, 동성애적 경향, 정신질환, 알콜 중독, 자살충동, 현실도피적 경향, 가난, 불행한 어린 시절(억압적인 부모로 인한) 등의 고난을 딛고 뛰어난 작품을 만든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볼프 슈나이더의 ‘만들어진 승리자들’은 파노라마 같은 인간군상을 다룬 책으로 보아야 옳을 것 같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이고 너무나도 다양한 유형의 인물들의 문제적 행동들이 고스란히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내게 가장 의미있게 여겨지는 대목은 인정받지 못한 천재들이 다루어진 부분이다. 컴퓨터의 선구자인 앨런 튜링, 작곡가 폴 체믈린스키 등 생소한 인물들과 바흐, 스피노자 등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반면 유명해지고 싶지 않았지만 유명해진 에밀리 디킨슨의 경우는 낯설다.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부당한 명성을 안겨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 가운데 노벨상을 빼놓을 수 없다. 노벨상은 억측과 비난, 불공정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시인 네루다가 스탈린과 거리를 두었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받았고 소설가 보르헤스가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자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은 어처구니 없게 여겨진다.

저자는 동일한 성과를 냈을 경우 더 불행한 사람이 천재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으며, 많은 위인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미화하고 과장했을 수도 있으며, 언어의 거장들이 더 절절하게 고통을 묘사해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했다. 저자는 모든 평가는 주관적이지만 (그런 점을 염두에 둔다 해도) 선뜻 기존의 백과사전들과 다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라 말한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수십만의 인명을 죽인 사람들에 대해 계속적인 경탄을 거부하는 것은 쉬울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냉철한 이성이 필요할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대장정을 마친 피로감이 몰려든다.

** 남은 이야기 -

전갈이 강을 건너고자 했지만 헤엄을 못했다. 수영의 명수인 개구리에게 가서 좀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개구리는 "만약 내가 널 태워주면 너는 내 등을 독침으로 쏠 것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전갈은, ”내가 널 쏘면 둘 다 익사할 것이니 그런 어리석은 짓을 내가 왜 하겠니?“라고 응대했다. 개구리는 잠시 숙고한 후 전갈의 제의에 응해서 그를 등에 태우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물살을 헤치고 강의 중간쯤 갔을 때였다. 문득 개구리는 자신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오는 날카로운 아픔을 느끼면서 물 속으로 가라앉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결국 전갈이 약속을 어기고 개구리를 찌른 것이었다.

공포와 분노 속에서 물밑으로 빨려가며 개구리는 마지막 비명처럼 물었다: ”야 전갈아, 왜 날 찔러 둘 다 죽게 만드는 거냐?“ 전갈의 대답도 그의 유언이 되었다: ”어쩔 수 없었어, 내 본능이야.“[It's in my nature] - 김영민 교수 지음 '신 없는 구원, 신 앞의 철학' 84 페이지. 김영민 교수는 Neil Jordan의 "The Crying Game"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실로 철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야스퍼스의 말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비판은 내 본능이라는 말을 나는 해야 할 것 같다. '만들어진 승리자들'을 읽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비판을 하고 나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이를 어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