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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도와 풍부한 작품량을 함께 갖추고 있고 흡족하지 않는 대로 문학론에 해당하는 자료들도 상당히 남아있으며 철학과 일반적 사유방식을 추적할 수 있는 광범휘한 자료들도 갖춘 작가로 다산 정약용을 주목하였다. 다산은 자신의 학문과 문학,작품과 문학론 그리고 생활에서의 실천에 이르기까지 사유와 삶의 전분야에 걸쳐 철저한 정합성을 추구한 드문인물이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자, 경세가로 일반에 알려져 있다. 사실 다산의 업적은 이런 일반화로 다 포괄하기 어려울 만큼 방대한 영역에 걸쳐 있고, 그것은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깊이를 지닌다. 일반에는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다산은 당대의 첫 손가락에 꼽히던 시인이기도 했다. 다산의 문집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시문집에는 이 '위대한'이라는 수식어에 어울리는 치열한 내용의 시와 문장들이 수록되어 있다. 무너져 가는 봉건왕조 말기의 사회적 모순상을 피를 토하듯 고발하는 시들－현대의 어떤 리얼리즘 시인이 그 치열함을 따라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모순을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개혁을 모색하는 문장들이 갖는 지성의 깊이는 과연 위대한 것이다.

한림대학교 교양과정부에서 한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박무영 교수는 이러한 정약용의 시 세계를 사회시와 서정시를 구분하는 방법이 아니라, '정약용 시 세계'라는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이를 검증하는 방법이 사유방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와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문학적 표출의 방식'에 관여한다는 전제하에 더 근본적 층위로서 사유방식을 검토함으로써 소위 사회시와 서정시가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려 하였다.

시인으로서의 정약용은 <남근을 자름(哀絶陽)>이나 <굶주리는 백성들(飢民詩)>등 소위 '사회시'의 작가로 알려지고 연구되었다. '혁명 전야'의 피 빛을 연상시키는, 무너져 가는 봉건왕조의 참담한 사회상을 고발하는 '사회시'들은 그 의식의 치열함이나 문학적 효과의 강렬함으로 해서 당대에나 후대에 정약용의 시 세계를 대표해 왔다. 그러나 {與猶堂全書}의 시문집에는 이 '사회시'들의 강렬한 색채와는 다른, 자신과 주변의 일상적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매우 화사하게 포착해내는 서정시들이 존재한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일상적 생활을 읊은 서정시들의 세계가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이후 한국 漢詩壇의 변모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사유방식의 변화라는 차원에서 접근함으로써 얼핏 극단적인 대치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두 양상의 시 세계가 정약용이란 한 인간에게서 어떻게 총체적 통합을 이룩하는지, 또한 정약용의 시문학이 보이는 문학사적 변화의 징후가 당대의 정신사적 조류와 어떻게 통합되는지를 해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래야만 정약용 시문학의 여러 국면이 파편적으로 설명되거나, 혹은 당대의 정신사적 맥락에서 유리되어 우상화되지 않고 정당하게 평가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은 문학이 내용으로만이 아니라 형식으로도 사유하는 일종의 특수한 '인식방식'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이런 측면에서 도저한 의식의 사회시나 좁은 의미의 순수 서정시에 해당하는 시들을 관통하는, 정약용의 시세계에 대한 하나의 총체적 설명을 찾으려고 한다. 정약용의 시론은 구체적인 대상과의 직접적인 경험적 접촉을 통한 흥취만을 진정한 문학적 흥취로 인정된다. 시적 형상화 방식의 특성으로는 독자로 하여금 언어적으로 재구성된 대상을 감각적으로 추체험하게 하는 객관적 제시의 방식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특히 좁은 의미의 순수 서정시에서조차 서정을 객관화하고 직접적 제시의 방식으로 형상화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본서는 이러한 사실들이 시인이 대상을 포착하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학적 인식방식'의 정약용적인 특성을 드러낸다고 파악한다. 즉 시적 경험이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물상에 의해서만 촉발되고,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언어적으로 재구성된)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유방식의 드러남이다.

이러한 문학적 인식방식의 특성은 정약용의 철학적 사유체계를 통하여 일반적인 인식론적 태도의 차원에서 더 근원적으로 설명된다. 정약용의 경학적 저작을 통하여 추출되는 인식론적 태도는 인간의 인식은 감각적 경험을 필수적인 것으로 요구한다는 것,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유추와 상징에 의한 경험 분석적 인식을 인간 인식의 구체적 내용이라는 태도를 지닌다.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적 태도가 이러한 문학적 인식방식의 근저에 놓여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인식론적 태도는 물론 사물을 본체론적 입장에서 상호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구체적 개별자로서 파악하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논리를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은 문학은 근본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이다. 정약용의 사회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여기서'의 삶을 가치의 중심에 놓는다. 그러므로 사회적 모순에 대해 그토록 치열하게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즉 인간이란 현세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이다. 한편 정약용의 서정시는 일상 생활의 주변을 일상적 생활인의 감각으로 매우 화사하게 잡아낸다. 즉 고답적인 정신세계가 아닌, 일상적 삶을 매우 긍정적으로 다루는 태도가 그의 서정시를 지배한다. 인간은 일상적 인간인 것이다.

정약용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이러한 특성은 정약용의 인간관과 우주론을 통해서 보다 심층적으로 해명된다. 정약용은 인간을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주체적인 존재로 파악한다. 우주론적 구도에서도 순수한 정신적 실체의 세계와 순수 물질의 세계 사이에서 그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세계가 인간들의 현상적 삶의 세계-즉 '지금 여기'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일상적 인간의 일상적 삶은 매우 현실적인 의미를 가진 그대로 미와 가치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식론적 태도와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측면에서 해명되는 정약용 시세계의 성격은 사실 조선후기 정신사적 변화의 구체적 내용과 동궤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정약용의 서정시가 보이는 형상화 방식의 특성이 18세기 이후 경화사족층의 시세계와 동일한 궤적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정약용의 시와 사유방식의 특징과 변화에 대한 이러한 천착이 곧 18세기 이후의 정신사적인 변환 조류가 한 개인의 정신세계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 본서의 관점이다. 본서에서는 이러한 측면을 구체적으로 남인학파 내에서의 이익의 인식론적 태도 및 인성론적 태도, 그리고 문학적 태도와의 비교를 통해서, 한편으로는 18,9세기 이후 경화사족층의 문화적, 문학적 동향과의 비교를 통해서 검증하고 있다.

제1장 다산의 사유방식과 시문학/23
1.인식론과 인성론적 태도/26
2.문학적 사유와의 접점/77
3.시문학과의 접합/107
제2장 다산 시문학의 세계/135
1.사물과 인간의 향유적 재현/137
2.서정의 객관화와 일상성의 수용/168
3.사회적 책임의 실현과 서사적 실현/193
4.시세계의 풍격/233
제3장 시문학의 시사적 좌표/267
1.남인학파 내의 계승과 극복/271
2.18~19세기 문학적 동향과 다산 시문학/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