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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세상이란 하찮은 삶의 조각들이 촘촘하게 뒤얽힌 배경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배경의 일부가 어떤 이유로든 상실되거나 결핍된 곳에서 잠시 드러나는 공백을 가리켜 시대정신이니 혁명, 혹은 이념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냐는 의심도 덩달아 들었습니다.

이틀 후에 나는 이퀘이터 호텔을 떠났다. 나를 태운 택시는 푸똥 공항을 향해 고가도로 위를 내달렸다. 교차로를 돌아 총칭난루重慶南路를 따라 오 분 가량 달리자 멀리서 루푸따챠오盧浦大橋와 그 아래로 흐르는 후앙푸강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듯 시계가 새벽 여섯 시를 넘었다. 우리는 각자 화장실로 가서 간단히 세수를 하고 삐져나온 셔츠를 밀어넣고 넥타이를 매만지고 나왔다. 빈소 앞에서 점숙과 얘기를 하던 득만이 내게 와서 말했다.

뜨거운 열이 잠 속으로 가라앉으며 언제부턴가 내 꿈이 끓기 시작했다. 잊었던 기억의 토막들이 부글대며 떠올랐다. 그 속에서 말들이 녹아가면서 숨어 있던 음소와 알파벳들이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내고 있었다.

불혹不惑이란 말은 혹하지 말라는 명령형으로 읽어야 한다. 지천명知天命이란 말 역시 타고난 운명을 알라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 나는 이런 이치를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 그건 내가 친구 철기에게 부산말을 가르칠 때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너거들은 사정이 어떻노? 출상 때 올 수 있겠나? 나는 마, 오늘 하루 더 밤샘할란다.” 득만이 묻는 말에 광두가 자신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일 아침에 회의가 있는데… 참석 안 했다가는 우리 전무한테 허벌나게 깨진다.

…며칠 전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너무 더웠어요. 그래서 밤 늦게 찬물에 오래 몸을 담근데다 에어컨 바람까지 너무 차가와서, 하하,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렸네요. 칭칭, 아직도 한국에서는 감기에 걸리면 매운 국물에다 소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요.

전역하고 난 후 나는 오랫동안 성묵을 만나지 못했다. 사실 숨가쁜 현실 속에서 그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복학하고 보니 오부리 빠나 고고장은 이미 사라져버렸고 나 같은 아마추어가 설 무대는 아무 데도 없었다. 밴드를 하던 사람들은 룸살롱이나 대형 나이트클럽으로 옮겨가 각자 실력대로 연명하고 있었다.

강가에 자리잡은 부두는 초라했다. ‘해피 석세스’ 가 접안해 있는 안벽 부분만 대강 콘크리트로 덮혔을 뿐 주위 기슭에는 벌건 흙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사람들은 나이 쉰을 넘긴 평범한 사내가 주절대는 삶의 얘기에는 좀처럼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직장이나 술자리에서도, 동료들 간에도, 심지어는 부부 사이에서도 내가 어렵게 꺼내는 얘기는 늘 불편한 기색과 맞닥뜨려야 했다. 사람들은 항상 인생에는 뭔가 새로운 게 있거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기대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면 재빨리 눈길을 돌리거나 아예 귀를 막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