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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운동회

잔잔할 때는 푸른 유니폼을 입은 여고생들 파도타기 매스게임이 한창이다가 풍랑이 일 때는 하얀 물비늘 일으키는 경마장의 백마들 우렁찬 함성에 소금 이빨 드러내며 집채 같은 파도로 무섭게 질주한다. 도마뱀 떼들 지그재그로...

에덴농원으로 간 뭉크

철 가시 진을 치고 있는 에덴농원 도화 나뭇가지에 뭉크의 절규 마스크가 걸려있다 도화 가지에 목이 찔린 듯 아-아-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뭉크도 뭉크의 절규도 모르는 에덴농원 늙은 주인에겐 도화열매를 탐하는 산새들...

풀의 행성

수레가 풀을 깔고 지나가네 관절 부서지는 굿, 꽃봉오리 터지는 바닥, 두개골 나뒹구는 길, 비명 움켜쥐고 감은 눈동자…, 벌레들이 삼가 초혼가를 부르네. 풀이여 풀잎이여 풀줄기들이여 일어섭시다 풀답게 풀뿌리답게...

숨은벽

숨죽여 기어드는 벽 무릎걸음으로 인수봉 백운대 오르는 벽 바람 몰아 구름 이고 일어서는 바위벽 삼각산 딛고 하늘에 닿는 벽 사기막골 한 길로 올라야만 뵈는 벽 설움 품고 땅을 기는 바위벽 남루와 비루 감싸안아주는 눈물과...

가을엔 서후에 가보고 싶다

어릴 적부터 전국을 떠돌았다. 초등학교 시절엔 강원도 태백에서 산촌 생활을 체험했고, 중고등학교 시절엔 고향인 경북 봉화에서 농촌 생활을 체험했다. 4년 전 등단하여 여기저기에 작품을 발표하는 낙으로 살고 있다. 이것은...

꽃 아래 풍경

수영 팔도 시장 들목에 선 동백나무 꽃 채반을 인 채로 나른해진 나절가웃 한 아름 벙글은 허기 봄빛 속에 달랜다 꽃 아래 포장마차 호떡 굽는 철판위에 얼결에 뚝, 떨어져 꽃지짐이 되었는가 내 생도 무심코인 듯 저리 익어...

소년의 형태

지나가는 사람들이 좋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게 좋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자주 바뀌는 게 좋다. 잇달아 게시물들이 붙는다. 잇달아 척추동물이 명백해진다. 죽음을 극복한 어느 소년이 우리에게 우세해지도록 우리는 차례로...

그 생각

어릴 때 요 밑에 젖은 바지를 깔고 자면 명태처럼 말라 주름이 잡혔다 아이들이 아침에 양말이 없다고 하면 아내는 젖은 양말을 보온밥통에 얹거나 선풍기에 걸고 돌렸다 나는 그걸 바라보며 어머니를 생각하고는 했다 어머니는 양말을 솥뚜껑...

경희궁 연애시

당신의 몸이 얼었군요. 이리 오세요. 함께 따뜻한 돌계단에 앉아요. 쌀알 같은 봄볕을 받으며 몸을 녹여요. 우리에게 남은 봄날은 얼마일까요. 이렇게 환한 날이면 가슴이 아팠는데. 이젠 아프지 않아요. 내일이란 없으니 고마워만 할래요. 천천히...

능안로

한나절 바닥 보며 숙였던 고개 천천히 치켜들고 뒤엉킨 전깃줄 사이로 펄럭이는 흰 빨래 바라본다 이미 진행 중인 뉴타운 바람이 무서운지 양철지붕 인 낮은 집 대문 한켠 내어놓은 세간과 고추모종 심어진 화분들, 오래된 가게 담벼락 너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