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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용서 : 오경자 수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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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오경자
  • 출판사 : 교음사
  • 발행 : 2023년 03월 15일
  • 쪽수 : 230
  • ISBN : 978897814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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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6월이 다 가기 전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체의 행사 등으로 6월이면 현충원을 참배할 때가 많았거나 현충일 기념식에 경건한 마음으로 차분히 앉아 방송으로라도 머리를 숙여 호국영령들께 추모와 감사의 인사를 올리곤 해 왔다. 요즘에는 그것조차 잘 안되어 시간을 놓치고는 마음이 무겁고 미안했다. 이제 철이 들었는지 혼자서라도 참배 한번 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면서 조바심이 났다. 그분들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인천상륙작전이 며칠만 늦어졌어도 우리 엄마와 나는 인민군에 의해 소개 당해 북녘땅 어딘가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아마 이미 죽었겠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6.25 당시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모골이 송연해진다.
반동분자놈의 에미나이라며 길에서 친구들과 놀고 앉아 있는 9살짜리 계집애의 땋아 내린 머리 꼬랭이를 사정없이 잡아 흔들던 사내, 그 눈빛은 뱀 같았다. 하나님 앞에 가서 열 번을 책망 받는다 해도 그들을 동족이라는 이름으로 용서 운운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다. 국군장병의 목숨값으로 지금의 내가 있는데 1년에 단 하루, 6월의 하루를 그분들께 참배하는 것으로 보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게 된 것이 70년 만이니 이제야 철이 좀 드는 모양이다.
이른 아침 현충원은 고요했다. 충혼문을 들어서 현충탑 앞에 묵념을 올리고 무명용사비를 우러르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동안 여럿이 함께 왔을 때와 사뭇 다른 경건함에 머리 숙여 참배하며 미안하다는 사과와 감사하다는 고백을 소리 없이 바쳤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하나씩뿐인데 나라를 구하고자 그 귀한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림으로써 나라를 구하신 고귀한 피가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다. 묘역을 돌며 머리만 조아릴 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령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지금 여기 없을 거라며 ‘서울에서 북으로 끌려갈 뻔한 9살 계집애, 당시 서울 거주’라고 방명록에 쓰는 일만이 감사의 표시였다.
이승만 대통령 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1950년 6월 25일 서울 중구 저동2가 14번지의 우리 집에서 북괴군의 남침만을 알리며 국군장병은 귀대하라는 방송, 그리고 북이 38선을 넘어왔으나 잘 물리치고 있으니 서울 시민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아나운서의 반복적인 보도를 전해 들으며 아버지 무릎에 기대 있던 나는 서울 교동초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이었다. 27일 밤 지하실에서 국민 여러분 걱정하지 말고 안심하고 있으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을 서울 경무대에서 하는 것으로 알고 정부의 발표를 철썩 같이 믿으며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떠보니 소련제 탱크가 서울 한복판에 버젓이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서울 시민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석 달의 생지옥을 겪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아버지같이 북괴의 손에 강제로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간 소위 납북인사가 10만을 넘어섰다. (하략)

목차

1. 소녀의 꿈
딸의 돋보기 … 18
그날 배를 못 탔더라면 … 21
닭죽 … 25
부엌 … 27
투명인간 … 32
손때 … 34
소녀의 꿈 … 37
때 … 40

2. 왜 이다지 공허한가
건방진 용서 … 42
기억의 집 … 47
그해 여름의 달콤함과 씁쓸함 … 52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 54
왜 이다지 공허한가 … 86
위문편지 … 90
철부지의 다짐 … 94

3. 우선순위
그날 태평로 … 100
어지간해야지 … 116
태극기 거부라니 … 121
이기심 … 125
우선순위 … 127
역사의 거울 앞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자 … 131
왜 우리말을 쓰면 촌스럽다 할까? … 136
지금도 살아 있는 절규 … 139

4. 누구를 위하여
꿈은 언제나 좋아 … 144
누구를 위하여 … 148
눈 비비는 사자 … 152
도심 속의 딴 세상 … 157
또 안 탔다 … 162
여름이 좋아? … 165
참외 … 169

5. 일상이 축복이다
눈 가리고 아웅 … 174
상식과 도덕 … 177
성찰 … 181
일상이 축복이다 … 187
종말의 그림자 … 190
무심한 바다 … 193
코로나19 이후의 사회와 문학 … 197
풍성한 대화의 모임을 바라며 … 199
평론의 뜰에 들여 주셔서 감사 … 201

6. 산다는 것
마닐라의 밤을 가른 아리랑 … 204
미래를 세우고 … 207
사람이 무서워 … 211
산다는 것 … 217
살만한 세상 … 221
감히 나를 묻어? … 223

본문중에서

그날 배를 못 탔더라면

사람들은 그때 이랬더라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하는 상상을 곧잘 하지만 그 일의 실제 상황이 이루어졌다면 어찌 되었을까는 아무도 모른다.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면서 즐기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날은 날씨가 매우 좋았다는 기억만 난다. 아침 일찍 챙 넓은 모자에 색안경을 챙겨 들고 서둘러 나가는 딸을 쳐다보며 어머니는 매우 흡족해하는 표정이었다. 누구를 만나러 간다는 말은 않고 친구와 놀러 간다고만 하는 딸이 그야말로 좋은 사람이라도 만나러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잔뜩 안은 표정이다. 시집을 안 가겠다며 독신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마치 당신 때문인 것 같아 노심초사하는 어른이 보통 외출과 좀 다른 나들이를 하는 것 같은 딸의 모습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좀 늦을지 모른다는 말만 남기고 집을 나서면서도 어머니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는 못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 며칠 전에 만나고 오늘 인천에 가서 바닷바람을 쏘이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무슨 생각으로 처음 만난 날 그런 약속을 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가벼운 기분이었던 것으로 볼 때 사람들 눈도 많은 시내에서 만나느니 멀리 인천에 가서 조용히 만나고 오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이었던 것 아니었나 싶다.
서울역에서 만나 인천으로 가면서 작약도에 가기로 했다. 작약도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작약이라는 말 때문에 선뜻 그러자고 했다. 화판이 큰 작약을 좋아하는 터라 친근감이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좋다고 했다. 6.25 전에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송도에 가서 온 가족이 해수욕을 즐기던 기억이 나서 인천 바다에 간다는 것이 그저 막연히 마음에 들었다. 연안부두에 가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동안 바다가 시원하니 기분이 좋았다. 섬에 내려 점심을 먹고 해변을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이야기래야 서로가 하고 있는 업무 중심의 이야기를 맴돌면서 시간만 죽였다. 누군가가 두 사람이 만나고 있는 목적에 근접한 남녀의 이야기로 좁혀 들어가야 할 텐데 둘 다 그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탐색전만 하고 있는 셈이다.
누군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거절하기 힘든 어른의 소개라 만나기는 했지만 결혼을 별로 하고 싶은 생각이 없던 터라 아주 마음에 끌리면 혹시? 하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나온 것이니 그렇게 홀가분한 대화가 내심 편하고 좋았다. 그 역시 똑같은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학교가 같아서 화젯거리가 공통점이 많았고 무역회사 직원이니 경제부 기자인 나로서는 그 또한 공감대가 쉽게 형성되는 편이었다.
백령도에서 군생활을 했는데 모래사장이 활주로로 쓰일 만큼 단단하다는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아내게 했다. 그렇게 무덤덤하게 시간을 보냈는데 여름해가 길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 시간을 너무 흘려보냈다. 서둘러 발길을 돌려 선착장에 가 보니 장사진을 이룬 행렬이 끝이 없었다. 배는 한 편뿐이라니 중간에 끊기면 무인도나 다름없는 이 섬에서 발이 묶일 지경이란다. 아차 낭패였다. 만약 배를 못 타면 어떡하지? 그 순간부터 속이 타기 시작했다. 내일 출근을 못할 테니 무어라고 설명을 한다? 엄마에게는 어떻게 말하지? 배를 탄다 해도 통금시간 안에 집에 들어갈 수 있기나 한 건가? 걱정이 꼬리를 물면서 진정이 되지 않는다. 가만히 살펴보니 무표정이다. 다 알면서 일부러 해가 사산에 걸릴 때까지 그냥 있었나? 계획적일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괘씸한 생각마저 든다. 속이 탈수록 더 의연한 자세로 무심한 척 서 있었다.
다행히 배는 탔고 통금시간 직전에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그날 속 탄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약이 오른다. 그 후로 둘은 더 만나지 않았다. 지독히도 멋대가리 없는 여자하고는 다시 만날 필요가 없겠다고 잘 판단을 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연락 오기를 기다리느라 목을 늘였던 기억도 없고 딱지 맞았나 싶어 자존심 상했던 기억도 없다. 중간의 어른께 내가 미안해할 이유가 없어서 기분이 가벼웠던 기억만 난다.
그날 배를 못 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글쎄….

저자소개

오경자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

출간작으로 『계단 좀 내다 버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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