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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양장]

원제 : Mu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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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음악은 내가 무조건적으로 경탄을 바치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유일한 예술이다.” ─헤르만 헤세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보유한 작가이자 1946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헤르만 헤세. 그가 기록한 음악 단상을 모은 책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가 북하우스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음악은 헤세의 문학 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로, 지금도 수많은 독자들이 헤세의 작품 면면에 흐르고 있는 음악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책은 많은 독자들의 호기심과 애정에 부응해 헤세와 음악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 최초의 프로젝트다. 이 책을 기획한 헤르만 헤세 전문 편집자 폴커 미헬스는 헤세가 젊은 시절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쓴 모든 글 가운데 음악을 대상으로 한 글을 가려 뽑아 ‘완전한 현재 안에서 숨쉬기’와 ‘이성과 마법이 하나 되는 곳’ 등 두 개의 장(章)으로 나누어 실었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글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문학작품으로, 헤세의 많은 시와 소설에 은은하게 일렁이는 음악의 그림자를 또렷한 시적 형체로 드러내준다.

출판사 서평

★ 헤세가 쓴 음악에 대한 글을 아우른 최초의 책
★ 음악, 음악가, 음악 작품, 연주회, 청자에 대한 헤세의 가장 인간적인 고백
★ 헤세의 시로 만든 음악 작품 목록 전격 수록

음악의 소리가 문학의 언어로 깨어나는 기적의 순간
헤세와 함께,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감싸이다

“누가 모차르트를, 또 쇼팽을 이토록 내밀하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민은기
“헤세 앞에서는 그 모든 음악이 싱그럽고 눈부신 언어로 울려 퍼진다.” ─정여울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주인공 한스는 삶의 마지막 순간 혼자 노래를 부른다. 그의 곁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예술적 재능이 많은 한스의 친구 헤르만이 함께해왔다. 『데미안』에서 주인공 에밀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들으며 음울하면서도 신비한 전율에 사로잡힌다. 성당 앞을 지나가다 오르간 연주를 들으며 외로운 마음을 위로받기도 한다. 『게르트루트』는 음악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며, 『황야의 이리』에서도 재즈음악 연주자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헤세 최후의 대작 『유리알 유희』는 모든 현상을 음악으로 형상화하는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이처럼 헤세의 거의 모든 소설에는 음악이 전면에 등장해 청각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의 문학은 음악과 음악가로 가득 차 있고, 문장들은 음악적 선율과 리듬에 맞추어 직조되었으며, 무엇보다 그 모든 작품에 음악의 정신과 형식이 깊이 흐르고 있다. 이런 이유로 헤세를 깊이 읽어나간 이들은 그의 문학을 ‘악보 없는 음악’이라고 칭하기도 하며, 그의 문학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악에 대한 사유를 연대기적으로 따라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음악은 헤세의 세계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헤세는 문학뿐 아니라 회화, 음악, 식물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과 자연을 사랑했지만, 그중에서도 다른 어떤 예술 장르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음악과 깊고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음악을 “미적으로 지각 가능한 순수한 현재이자, 찰나의 순간이 과거 및 미래와 합일을 이루는 마법”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모든 예술 장르 중에서도 음악을 가장 높은 곳에 내세웠다. 어느 편지에서는 “음악은 내가 무조건적으로 경탄을 바치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유일한 예술이다. 다른 그 어떤 예술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헤세의 음악론: 낭만적 감상자에서 모럴리스트의 입장으로
도취적인 음악이 아닌 삶을 긍정하는 선율을 사랑했던 작가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음악에 대한 독자적인 시작품들을 모은 것으로, 산문과 소설, 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부는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글, 편지, 일기, 메모 등을 집필 순서에 따라 배치되었다. 2부에 실린 글은 1부에 실린 글보다 자전적이며 직접적인 고백을 담고 있으며, 평생에 걸쳐 이루어진 헤세의 음악 탐색과 그 변화 과정을 요연하게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음악에 대한 감정 위주의 묘사가 주를 이루었던 젊은 시절의 글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회적 정치적 현실을 의식한 모럴리스트적 요청의 차원으로 나아감을 감지할 수 있다.
초기의 글에서 헤세는 청각적 지각을 시각적 지각과 비교해 묘사함으로써 음악적 인상을 눈에 보이는 언어로 탁월하게 옮겨놓는다. 프랑스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로맹 롤랑도 이 시기의 헤세를 회상하면서 “그는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인간이다. 음악을 들을 때 그는 언제나 이미지와 풍경을 본다”고 기록했다. 즉 이즈음의 헤세는 음악이라는 예술 분야에 감각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독자들은 음악에 대한 다이내믹하면서도 극도로 섬세한 묘사들을 읽으며 음악의 소리가 시의 언어로 옮겨가는 황홀한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그의 입장은 감각적인 차원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음악론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모럴의 차원이 합류하면서 더 깊어지고 확장된다. 예술가이자 청자로서 그는 특히 관객을 마비시키는 도취적인 음악과 연주자에 대한 개인숭배를 경계했다. 한자리에 모인 수많은 개인이 연주에 도취되고 사로잡혀 하나의 균질한 덩어리가 되어버리는 것, 개인성이 사라지고 그 모든 다양한 충동이 하나의 집단 충동으로 수렴되는 것 등 음악이 청중의 심리를 조종할 가능성을 염려한 것이다. 여기에는 정치 집단이 군중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심리를 조종했던 당시의 사회적 배경(1, 2차 세계대전과 나치 집권)이 자리하고 있다. 예술과 정치가 집단을 움직인다는 공통점을 인지해나가면서 그는 예술적 성취를 사회적 정치적 현실과 별개의 것으로 다룰 수 없게 된다.
헤세의 음악적 선호는 확고하다. 그는 (가령 바그너나 말러처럼) 도취적인 표현이나 육중한 악기 편성이 드러난 음악보다 (바흐나 모차르트처럼) 삶을 긍정하는 가뿐하고도 명랑한 선율을 사랑한다. 불협화음의 사회에 대한 대안이 되어줄 음악, 중용에서 생겨나는 ‘완전한’ 음악, 청명하고 명랑한 음악을. 마취나 감각을 헤집어놓는 흥분이 아닌, 명상과 정화, 그림자 없는 환한 빛, 생에 대한 의욕, 정신적 추진력이 강하게 일어나며 밝은 음악을. 헤세에게 이들의 음악은 그저 아이 같은 경쾌함이나 순진무구한 표현이 아니라 “사무치게 깨달은 자의 경쾌함과 무구함”이 담긴 영혼이라고 확신한다. 각각의 글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지적인 깊이가 있는 글이지만, 그가 사랑하는 음악과 음악가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한편 헤세의 음악론이 변화하는 과정을 따라 읽는 일은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줄 것이다.

*

한편 헤세와 음악의 친밀한 관계는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작가 장정일은 헤세의 “작품에서는 음악 소리가 들린다. 그의 전작을 일별하고 최후의 대작까지 살피고 나면 헤세는 단연 음악의 성자다”라고 썼고, 작가 배수아도 헤세가 “음악에도 관심과 조예가 있었다”고 쓰면서 이 책에도 수록된 「어느 여자 성악가에게 쓴 부치지 않은 편지」가 헤세의 독특하고도 설득력 있는 음악론을 보여준다고 정리했다.
음악인들이 헤세의 작품에서 음악을 찾아낸 시도도 여럿 있었다. 『데미안』을 주제로 한 연주회가 종종 열리기도 했고, 2020년에는 헤세의 작품에 등장하는 클래식 작품들을 연주하는 콘서트 〈헤르만 헤세의 음악세계〉가 열려 문학 독자들과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이렇듯 수많은 이들이 헤세에게서 음악을 발견하고 글과 연주로 선보였던 가운데,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는 헤세의 문학에 스민 음악에 대한 예감을 확인해주는 하나의 결실이자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헤세 서거 60주기를 맞은 해에 출간되어 더욱 뜻깊은 책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이 책은 헤세의 수정 같은 아름다움과 심연처럼 어둡고 깊은 성찰을 기억하는 독자들에게 헤세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날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그가 꿈꾸듯 써내려간 음악의 속삭임을 음미할 수 있기를, 음악에서 천상의 소리를 듣고 어둠 가운데 빛을 읽어내며 순전한 감각으로부터 현실의 모순을 인식하는 그의 사유에 많은 독자들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추천사

민은기(서울대 음대 교수, 『음악과 페미니즘』 『난처한 클래식 수업』 저자)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애호가는 많지만 헤세만큼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누가 쇼팽을 이토록 내밀하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리라. 헤세에게 음악은 찬란하게 펼쳐진 그림이고 영롱한 소리로 쓴 문학이었다. 이 책으로 그는 우리에게 시공을 뛰어넘어 그 감동적인 체험을 전한다.

정여울(작가, 『헤세』 『헤세로 가는 길』 『끝까지 쓰는 용기』 『마지막 왈츠』 저자)
작가는 아름다운 언어를 찾아 헤매는 영원한 방랑자다. 그런 작가들도 언어의 미로 속에서 헤매는 것에 지칠 때가 있다. 그럴 때 최고의 위로는 음악이다. 언어 없이도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음악의 힘에 압도당하는 것 자체가 영혼의 휴식이 되기 때문이다. 헤세는 바로 그런 음악의 마법을 뼛속 깊이 이해했다. 그는 수많은 음악 속에 숨은 영감의 빛과 구원의 목소리를 온몸으로 느꼈고, 바로 그 음악의 감동을 다시 문학의 언어로 변신시키는 능수능란한 마법사였다. 헤세가 사랑한 모든 멜로디와 리듬은 에세이라는 아름다운 형식 속에서 또 하나의 음악으로 부활한다. 헤세는 모든 문장을 악보처럼 연주하여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더욱 찬란한 구원의 메시지로 변신시킨다. 헤세 앞에서는 그 모든 음악이 또 다른 시가 되고 소설이 되어 싱그럽고 눈부신 언어로 울려 퍼진다.

로맹 롤랑(작가, 음악학자, 191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헤세는 음악을 들을 때 언제나 이미지와 풍경을 본다. (…) 문학에도 실내악이 있다면, 헤세가 단연 최고의 대변자일 것이다.

미헬 폴커스(독일 ‘헤르만 헤세 전집’ 책임 편집자)
헤세에게 음악은 ‘순수한 현재이자 미적으로 지각 가능한 시간’이었고, ‘찰나가 과거 및 미래와 이루는 일치’였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헤세가 음악과 맺었던 관계를, 그 가장 중요한 윤곽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목차

1 “완전한 현재 안에서 숨 쉬기”
사색과 시

고음악┃오르간 연주┃음악┃3성부 음악┃소나타
교향곡┃인생의 2성부 선율┃연주회┃『황야의 이리』에서
일요일 오후의 〈마술피리〉┃비르투오소의 연주회┃시샘
오트마 쇠크┃오트마 쇠크와의 추억 중에서┃우기
모차르트의 오페라들┃〈마술피리〉 입장권을 들고
슈만의 음악을 들으며┃화려한 왈츠
고전음악 (『유리알 유희』에서)┃유리알 유희(시)
연주에 대하여┃일로나 두리고를 위하여┃불면
어느 여자 성악가에게 쓴 부치지 않은 편지┃장엄한 저녁 음악
어느 연주회의 휴식 시간┃카덴차에 대한 한 문장
어느 음악가에게┃모래 위에 쓰인

2 “이성과 마법이 하나 되는 곳”
음악 체험, 작곡가와 연주자에 대한 편지, 소설, 일기, 서평, 시

나의 바이올린에게┃쇼팽┃사라사테(시)┃사라사테
아다지오┃보니파치오의 그림
『유리알 유희』를 위한 작업 노트에서
바흐의 어느 토카타에 부쳐┃플루트 연주┃4월 밤에 쓰다

독일어판 편집자 후기 (폴커 미헬스)
음악이 된 헤르만 헤세의 시 (크리스티안 I. 슈나이더)
노래가 된 헤세의 시 (첫 행)
헤르만 헤세 연보
본문 출처
인명 찾아보기

본문중에서

바이올린 선율이 솟아오른다. 환상적으로 차근차근, 은총과 비밀을 가득 품고 노래하고 떠다니면서, 아름답고 가뿐하게. 선율은 반복되고 변화하고 휘어진다. 고운 아라베스크를 찾아내고, 좁디좁은 오솔길들 위로 굽이치더니, 고요하고 청명한 감정이 되어 다시 시원하고 정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위대함은 없다. 절규도 깊은 고난도 없다. 드높은 외경심도 없다. 오로지 기쁘고 자족한 영혼의 아름다움이 있을 뿐. (14쪽, 「고음악」)

다시 장관이 벌어진다. 거장 바흐가 크고 자유롭게 움직이며 자신의 사원에 들어와 신께 감사 인사를 올리고, 경배의 분위기 속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성가의 가사에 따라 자신의 경건함과 일요일의 분위기를 즐기려 한다. 그러나 음악을 시작하는가 싶더니 약간의 공간을 찾아내 화성들을 보다 깊이 몰아가며, 감동적인 다성부 선율들을 엮고 화성들을 맞부딪친다. 그리고 음의 건축을 떠받쳐 세우고 마감하여 교회를 한참 벗어나 고귀하고 완벽한 체계의 우주 공간을 만들어낸다. 마치 신은 잠자리에 들었고 그에게 지휘봉과 망토를 넘겨주었다는 듯. 이윽고 뭉게구름을 야단쳐 다시 빛의 공간을 환히 열더니, 행성들과 태양을 득의양양하게 끌어올린다. 그는 한낮 중에 느긋하게 쉬며 서늘한 저녁 소나기를 때맞게 불러낸다. 그런 뒤 석양처럼 찬란하고 웅혼하게 곡을 마치며,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광휘와 혼신으로 가득한 세상을 남겨놓는다. (15쪽, 「고음악」)

그것이야말로 음악의 비밀이다. 음악이 그저 우리의 영혼만을 요구한다는 것, 하지만 오롯이 요구한다는 것 말이다. 음악은 지성과 교양을 요구하지 않는다. 음악은 모든 학문과 언어를 넘어 다의적 형상으로, 하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항상 자명한 형상으로 인간의 영혼만을 끝없이 표현한다. 위대한 거장일수록 그가 관조하고 체험한 바의 효력과 깊이는 무제한적이다. 또한 순수한 음악적 형식이 완벽할수록 우리 영혼에 끼치는 영향은 직접적이다. (32쪽, 「음악」)

밤에, 한 목소리가 노래한다.
밤에, 그 목소리가 두려워하는 밤에
노래한다. 두려움과 용기를.
노래로 밤을 길들인다.
노래하면 다 괜찮아.

두 번째 목소리가 노래를 시작해
다른 목소리와 발맞추어 걷고
다른 목소리에 응답하고 웃는다.
둘이서 밤에 노래하면
기쁨이 솟아나니까.

세 번째 목소리 들어와
조화로이 춤추고 걷는다.
밤에 함께. 셋은
별빛이 되고
마법이 되고.
(36~37쪽, 「3성부 음악」)

연주회 3부에서 본래의 음악 애호가이자 신실한 음악 청교도들인 우리는 곤경에 빠졌다. 그의 연주가 한 단계 한 단계 대규모 청중을 향해 가는 가운데, 훌륭한 음악가 베토벤과 바흐는 아예 못 해냈고 유려한 실력자 타르티니는 온전히 성공시키지 못한 것, 그것을 이 이국의 무명 탱고 작곡가들이 빼어나게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수천 명이 불타올랐고 녹아내렸으며 대결을 포기하고 달라진 얼굴로 미소 지었고 눈물을 흘렸으며 황홀해하며 신음했고 짤막한 오락곡들 하나가 끝날 때마다 도취의 박수갈채를 터뜨렸다. 그 대단한 남자는 승리했다. 이 삼천 명의 영혼 하나하나가 그의 것이었고, 모두가 기꺼이 자신을 바치고 손길을 기다리고 놀림당하고 행복해하며, 도취경과 홀림 상태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69쪽, 「비르투오소의 연주회」)

우중충한 주점에는 폐물 같은 옛날 타펠 클라비어[탁상 건반악기]가 한 대 있었는데, 가느다랗고 베일에 싸인 듯한 소리를 냈고 줄 몇 개가 나간 데다 조율도 엉망이었다. 이 피아노에 앉아 쇠크는 우리에게 여러 오페라의 일부 혹은 전곡을 연주해주었다. 주인 가족은 모두 반해서 귀 기울였다. 비트만도 이 악기를 한번 시험해보고 싶어져 그 앞에 앉아 용감하게 건반 몇 개를 짚었다. 그러나 금방 화들짝하며 다시 일어섰다. 나도 악기를 시험해본다고 몇 개 음을 쳤다. 이 폐물에서 음 비슷한 걸 유도해낸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쇠크는 그 악기로 음악을 연주해낸 것이다. 그는 그 물건에 마법을 걸었고 대가들의 영을 불러냈다. 그의 두 손 아래 고물 상자는 다시 말 잘 듣는 피아노가 되었고, 로시니와 베르디의 음악을 들려주었으며 심지어 한때 음악가였던 주인을 놀라고 반하게 만들었다. (83쪽, 「오트마 쇠크와의 추억 중에서」)

당시 내게 음악은, 세상이 더 이상 안중에 두지 않으려 하는 모든 고운 것, 우아한 것, 신성한 것을 가장 강하고도 직접적으로 떠오르게 했다. 전쟁은 부득이하다면 한동안 견딜 수 있었다. 전쟁 안에서 내가 인간성을 수행하고 상처 치유를 돕는다고 나 좋을 대로 생각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음악은 견딜 수 없었다. 나를 가누는 그 궁색한 질서와 규율이 음악 몇 마디면 송두리째 붕괴되었고, 이 세계와 이 전쟁에서 도망가고 싶은 참을 수 없는 갈망이 깨어났다. (92~93쪽, 「오트마 쇠크와의 추억 중에서」)

그의 음악 안에서는 끊임없이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꾸준하지도 짓누르지도 무겁지도 일정하지도 않다. 껑충거리는, 유희하는, 돌풍 같은, 버릇없는, 부단히 놀라게 하며 시작되고 다시 사라져버리는 윙윙거림이다. 모래와 나뭇잎의 앙증맞은 소용돌이 춤을 보는 기분이다. 화창한 날의 바람, 근사한 방랑 벗이며 놀이 친구다. 활기차고 아이디어 넘치며 신나게 수다 떨다가, 때로 달리거나 춤추고 싶어했다가 하는. 우아함과 청춘으로 가득한 이 음악 속에서는 팔랑거리고 나부끼며 나풀거리고 한들한들하며 춤추고 폴짝거린다. 빙긋 웃고 깔깔 웃고 유희하고 놀려댄다. 일부러 심술궂었다 애틋했다 하며. 이 마법 같은 리듬을 지은 시인이 우울과 분열 증세 속에 꺼져가다 죽었다는 건 납득할 수 없을 것 같다. (102쪽, 「슈만의 음악을 들으며」)

그러나 음악이 꽃피고 있었다. (…) 의식의 성장과 창작력의 새 시대가 부상하는 중이었고, 전대미문의 비약적 힘을 지닌 정복욕이 보물 같은 유산을 장악해 점점 더 찬란한 오르간들을 제조했고, 오케스트라들을 재편했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악가들이 칸타타, 오페라, 오라토리오, 협주곡 들을 작곡해서 몇십 년이 지나는 동안 환하고 기쁨에 찬 건축물을 지어 올렸다. 오늘날 고매한 예술의 경배자라면 누구라도 이 건축물을 생각하게 된다. 파헬벨, 북스테후데, 헨델, 바흐, 하이든, 글루크, 모차르트 등 사랑스러운 이름 중 하나를 언급할 때면. (118~119쪽, 「연주에 대하여」)

저는 예술에 대해 말하고 사유할 때 예술가의 시선을 고수하지만, 예술비평가나 미학자가 아니라 모럴리스트로서 바라봅니다. 나 자신이 예술의 영역에서 무엇을 거부해야 하고 불신해야 하는지, 무엇을 숭배하고 사랑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겁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한 규범화된 객관적 개념들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양심은 도덕의 문제이지 미학의 문제가 아니고요. 바로 그런 이유로 저는 그것을 취향이라 부르지 않고 양심이라 부릅니다. 이 양심은 주관적이며 저 자신에게만 의무 지우는 것입니다. (102쪽, 「어느 여자 성악가에게 쓴 부치지 않은 편지」)

저는 연주를 들은 지 몇 분 만에 이 낯선 중국인[푸총]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 그는 실제로 기술적인 면에서 비르투오소다운 완벽성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코르토나 루빈슈타인도 그 완벽성을 뛰어넘지는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들은 건 그저 대가다운 피아노 연주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들은 건 쇼팽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쇼팽요. 그것은 바르샤바와 파리를, 하인리히 하이네와 젊은 리스트의 파리를 생각나게 해주었습니다. 제비꽃 향기와 마요르카섬에서 맞는 비의 향기가 났어요. 최상류 살롱에서 풍기는 향기도요. 음악은 멜랑콜리하면서도 고귀한 느낌을 자아냈고, 리듬의 분화와 셈여림의 차이는 섬세했습니다. 기적이었어요. (170쪽, 「어느 음악가에게」)

우리를 끝없이 변화로 몰고 가는 것은
바람과 비눗방울처럼 순식간에 터져버리는 영혼,
시간과 하나 된 것들, 지속을 모르는 것들이다.
그런 우리에게는 장미 이파리의 이슬이
한 마리 새의 구애가
구름이 희롱하는 죽음이
흰 눈의 반짝임과 무지개가
이미 날아가버린 나비가
터져나온 웃음소리가
지나는 길에 우리를 잠시 스친 그 소리가
환희를 선사하고
고통을 주나니. 우리는 사랑한다,
우리와 하나인 것을. 우리는 이해한다,
바람이 모래 위에 써놓은 것을.
(174쪽, 「모래 위에 쓰인」)

“여러분은 그럴싸하게 말하는 데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요. 그 과정에서 별의별 반짝이는 것과 희한한 것을 길어오고요. 어렵고 불가능한 모든 것을 기어이 말로 표현하게 될 때까지, 영혼이 녹초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 제가 여러분 모두에게 아쉬운 점은 성실함이에요. 제대로 된 드높은 자부심도 품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에게 자부심이 있다면 여러분의 신전은 국도변 같은 데 있지 않을 거라고요. 자기들 비밀을 무도회나 저녁 차 모임에 내놓지도 않을 거고요. 여러분은 섬세하고 시적인 사색에 잠기지만, 이 사색의 내용은 여러분과 사람들 손을 푼돈처럼 돌아다녀요. 알겠어요? 그런 면에서 사라사테는 정반대예요. 그는 성실함과 자부심을 지녔어요. 그는 여러분의 황홀경 같은 것 없이 무궁무진한 섬세함과 예술가적 사랑으로 활을 움직여요. 하지만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죠. ‘그는 독일 음악을 이해하지 못해’라고요.” (198~199쪽, 「사라사테」)

베토벤은 달라요. 그에게는 훌륭하고 궁극적인 차원에서 드라마적인 것이 있습니다. 삶, 변화, 발전이요. 피아노 소나타 작품들은-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23번입니다-해명 불가능한 보물입니다. 경이로운 교향곡들도,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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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헤르만 헤세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18770702

저자 헤르만 헤세(Herman Hesse)는 1877년 독일 남부 칼브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시인이 되고자 수도원 학교에서 도망친 뒤 시계 공장과 서점에서 견습사원으로 일한다. 열 다섯 살 때 자살을 기도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낸다. 이십대 초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 '페터 카멘친트','데미안' 등을 발표한다. 서른 세살이 되는 해 인도 여행을 감행.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 기행' 을 쓴다. 스위스 베른으로 이주, 1914년 1차 세계대전을 맞는다. 군 입대를 자원하나 부적격 판정을 받고 독일 포로 구호 가구에서 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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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미 [역]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

서울대학교 독어교육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마르부르크대학교에서 독일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영남대학교에서 강의하며 독일 문학 속의 음악과 관련한 주제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바그너 읽기-트리스탄, 장인가수, 파르지팔』을 썼고, 옮긴 책으로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트인 데로 가는 길』, 로베르트 발저의 『타너가의 남매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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