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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4 - 세조/예종/성종 : 백성들의 지옥, 공신들의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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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이덕일
  • 출판사 : 다산초당
  • 발행 : 2021년 06월 14일
  • 쪽수 : 392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91130638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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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왕 VS 공신, 누가 최고의 권력을 쟁취할 것인가?

“세종의 후예들은 왜 죽어야 했는가?”
관직과 토지를 독점한 특권층과 나락으로 떨어진 백성들의 삶!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 정권의 한계는 뚜렷했다. 정통성이 없는 왕권이었기에 세조는 공신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즉 공신들과의 연합 정권이었던 것이다. 세종에게 왕위를 빼앗긴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세종의 가족들과 단종을 죽이는 데 앞장을 섰다. 세조는 공신들에게 관직 매매권과 토지, 그리고 단종 측과 사육신의 아녀자들을 하사했다. 심지어 신숙주는 단종의 왕비를 노비로 하사해달라고 요청했으며 정인지는 세조를 ‘너’라고 불렀다. 무력만 있으면 누구나 왕위를 가질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여 봉석주 반란 사건 등이 일어났고 정통성 없는 정권이었기에 명나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사대 외교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공신들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단 1년 만에 의문사했다. 성종은 26년 동안 재위했음에도 별 치적이 없었고, 성종이 성군이라고 알려진 것은 세조 대의 혼란기에 비할 때의 반사이익이 컸다. 중대한 기로 앞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역사적 인물들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삶을 것인지 고민하게 한다.

출판사 서평

왕위를 빼앗긴 양녕대군의 핏빛 복수
양녕대군 이제는 태종의 큰아들로서 왕세자의 자리를 꿰어차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선택은 셋째아들 충녕대군 이도, 즉 세종이었다. 중국의 경우 왕세자의 자리에서 밀려나면 곧 죽음을 맞았지만 세종은 형 양녕대군을 철저히 보호했다. 그러나 양녕대군의 생각은 달랐다. 양녕대군에게 세종은 목숨을 보호해준 인군(仁君)이 아니라 왕위를 빼앗아간 동생에 불과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죽이고 단종을 왕위에서 밀어내자 양녕대군은 단종을 죽이는 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세종의 후예들인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등을 죽이려 들었다. 왕위를 빼앗긴 데 대한 처절한 복수였다. 양녕대군뿐만 아니라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 역시 복수에 나섰다. 그 역시 단종을 죽이는 데 가담했으며 백성들의 공물을 착취했다. 단종과 사육신을 죽인 종친들과 정인지, 신숙주 등 공신들은 단종 측 신하들의 땅뿐만 아니라 아녀자들까지 탐했다. 심지어 신숙주는 단종의 왕비까지 노비로 달라고 요청했다. 유학자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패륜을 저지른 이들을 세조는 막을 수 없었다. 공신과 종친들의 도움으로 왕위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한 것처럼 공신들 중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탐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누구나 힘만 있으면 왕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정난공신이었던 봉석주는 김처의, 최윤 등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 세조는 공신 세력을 그나마 견제하기 위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귀성군 이준 등을 신공신으로 삼아 조정에 포진했으나 구공신 세력을 몰락시킬 수는 없었다.

왜 장남 월산대군을 버리고 자을산군을 택했을까?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의문사했을 때 왕위를 이을 사람은 예종의 적자인 만 세 살 제안대군이나 세조의 장손인 열다섯 살 월산대군이었다. 그러나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와 구공신들이 왕으로 선택한 사람은 월산대군의 동생 자을산군이었다. 왜 적자와 장손을 버리고 자을산군을 선택했을까?
그 이유는 예종에게 있었다. 세조의 장남이었던 예종은 아버지와는 달리 과감한 공신 척결에 나섰다. 예종은 종친과 공신들의 관직 매매를 금지하고 위반하면 온 집안을 족주(族誅)하겠다고 선언했다. 예종은 대납권에도 손을 댔다. 당시 공신들은 백성들의 세금을 대신 내고 나중에 서너 배로 돌려받는 대납을 공개적으로 자행했다. 예종은 대납하는 자는 공신, 종친, 재상이라 할지라고 극형에 처하고 재산을 관에서 몰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과감한 조치는 어머니 정희왕후의 친정 집안까지 미쳤다. 예종이 의문사했을 때 시신이 하루 만에 변색되었다. 독살을 당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그러나 정희왕후와 공신들은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잘 다룰 수 있는 정통성이 약한 열두 살 자을산군을 다음 왕으로 지목했다.
예종에게도 뼈아픈 실책이 있었다. 유자광의 밀소에 넘어가 신공신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던 남이를 역모죄로 죽인 것이다. 이에는 평소 예종이 남이에게 가지고 있었던 악감정도 작용했다. 예종은 그것이 구공신들의 신공신 제거 전략임을 깨닫지 못했다. 이 때문에 신공신과 구공신 간의 균형이 무너졌고 예종은 구공신들을 제거할 우군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재위 1년 만에 의문사했다.

공신과 사림 사이에서 줄타기, 성종
구공신들은 열두 살 성종을 자기들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성종은 때를 기다릴 줄 알았다. 숙부 예종의 의문사가 그에게는 반면교사의 거울이었다. 관직 매매권인 분경 허용과 신공신인 귀성군 이준 제거 등 성종은 일단 구공신들의 의견을 따랐다. 구공신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임금을 갈아치울 수 있는 세력이었다. 그러나 익명서 사건으로 정희왕후가 수렴첨정을 거두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형식적으로 고사한 후 바로 친정에 나섰다. 열아홉 살 성종은 젊었고 구공신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성종은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기용했다.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 세력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부정적이었으며 단종 모후의 소릉 복원을 청원했다. 비록 소릉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를 주장했던 남효온은 처벌받지 않았다. 또한 중국 사신을 압구정으로 초대하기 위해 큰 장막을 청한 한명회의 요구를 묵살하고 한강의 정자들을 모두 없앨 것을 명했다. 세조부터 성종 대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한명회의 세상이 가고 있었다. 한편 김종직의 시호 문제에 있어서는 훈구 세력의 의견을 따라 문충(文忠)에서 문간(文簡)으로 바꾸었다. 문충이란 시호를 받을 만큼 공이 크지 않다는 것이 훈구들의 주장이었다.
이처럼 정치에서 유연한 능력을 발휘했던 성종은 여성 문제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호문(好文)만큼 호색이었던 성종은 많은 여성을 편력했고 이것이 원자의 모후이자 왕비인 윤씨와 충돌했다. 인수대비, 정희왕후 등 왕가의 여인들이 앞장서서 왕비 윤씨를 폐비 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데 앞장섰고, 성종은 연산군이라는 불안한 유산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무너진 헌정 질서, 그리고 서로 다른 선택들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을 때 조선의 헌정 질서는 무너졌다. 이때는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처럼 개국 초가 아니었다. 이미 장자로 왕위를 계승한다는 질서가 세워진 때였다. 그렇기에 세종의 장남 문종이 왕위를 이었고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왕이 될 수 있었다. 조선의 헌정 질서가 무너졌을 때 둘도 없는 친구였던 신숙주와 성삼문은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신숙주는 정인지 등과 함께 단종을 죽이는 데 동참했고 성삼문은 단종을 복위시키려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아가지, 불덕 등 천인들이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독동, 윤생 등 노비들이 단종을 보호하기 위해 죽음을 무릎 썼다. 반면 한명회, 권람 등 공신들은 사육신 측의 재산뿐 아니라 아녀자들까지 나눠 가졌다. 한편 양성지처럼 헌정 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민심을 달래고 법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노력하는 제3의 길을 선택한 이들도 있었다. 예종 역시 공신들의 관직 매매와 대납권을 폐지하며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의문사했다. 이처럼 중대한 기로 앞에서 서로 다른 선택들을 한 역사적 인물들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한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목차

들어가는 말 《조선왕조실록》을 읽는다는 것

1부 세조, 성군을 꿈꾸었던 참군(僭君)

백성도 사랑하고, 공신도 사랑하고

-단비와 기우제
-공신을 구타하는 임금
상왕 복위 기도 사건
-유폐된 상왕
-조선 출신 명나라 사신들
-운명의 거사 일
-가혹한 정치 보복
-유배 가는 상왕
-상왕, 살해당하다
공신들의 나라에 백성들은 없다
-개혁 관료 양성지의 상소
-공신들의 나라
-공신 민발의 이석산 살해 사건
-공신들은 절대 처벌받지 않는다, 홍윤성
-백성들의 살과 뼈를 갉아먹는 공신들
-세조를 ‘너’라고 부르는 정인지
-나도 수양처럼 할 수 있다, 봉석주

북방의 회오리 바람
-이징옥은 대금 황제를 자칭했는가?
-여진족을 적으로 돌리는 세조 정권
-처형당하는 양정
-이시애의 봉기와 신공신의 탄생
해체시키지 못한 유산들을 남기고
-원상제와 분경 허용

2부 예종, 공신 집단에 칼을 겨눴던 젊은 왕
왕권을 나누어야 하는가

-혜성 속의 즉위
-구공신과 신공신의 권력투쟁
-남이의 옥사, 신공신의 몰락
예종의 왕권 되찾기와 몰락
-거침없는 예종의 공세
-대비와 예종의 갈등
-갑자기 세상을 떠난 개혁 군주 예종

3부 성종, 공신과 사림 사이의 줄타기
하늘에서 떨어진 왕위

-정희왕후와 공신들의 결탁
-커지는 예종의 의문사 논란
-귀성군 이준 제거 작전
-왕을 만든 공신들과 사림 세력의 등장
구공신의 자연사와 사림 세력의 진출
-원상들의 나라에 대한 대간들의 도전
-사림은 왜 훈구와 대립했는가?
-단종 모후의 소릉 복원을 주장하는 사림
-사림의 선봉이 된 종친 이심원과 훈구의 선봉이 된 외척 임사홍
-무너지는 한명회의 세상
-사림과 구공신들의 갑론을박
불안한 유산을 남기고
-원자의 모후를 죽음으로 몰다
-타협으로 일관한 생애의 끝

나가는 말 서로 다른 세 지도자가 만든 다른 역사들
연표
찾아보기

본문중에서

이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정난 1등공신이자 병조판서인 이계전이 조용히 아뢴 말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오늘 성상께서 어온(술)이 과하신 듯하오니 청컨대 대내(大內)로 돌아가소서.”
술이 과했으니 내전으로 들어가서 쉬라는 말에 세조가 갑자기 대로했다.
“내 몸가짐은 내 마음대로 할 것인데, 네가 어찌 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세조는 이계전의 관을 벗게 하고 병조참판 홍달손에게 머리채를 휘어잡아 뜰로 끌어내리게 했다. 유학의 나라 조선은 벼슬아치들 사이의 위계질서가 엄했다. 그중에서도 군사를 관장하는 병조는 상하간의 위계질서가 유독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세조는 참판 홍달손에게 상관인 판서 이계전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끌어내리게 한 것이다. 나아가 위사(衛士)를 불러 곤장을 치라고 명했다. 누가 봐도 과한 거조일 수밖에 없었다. 이계전의 말은 술 취한 임금이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한 충신의 고언으로 받아들일 일이었지 하급자에게 머리채를 휘어잡아 뜰로 끌어내릴 일은 아니었다.
-<백성도 사랑하고, 공신도 사랑하고>(35쪽) 중에서

효충(孝忠)을 입에 달고 사는 유신들이 단종을 죽이려 할 때 관청에 속한 공노비들이 목숨을 걸고 단종을 섬겼다. 신숙주·정인지·정창손·한명회 등이 단종을 죽이자고 청한 사흘 후인 9월 24일 형조에서 세조에게 주청했다.
“본궁(本宮)의 종 독동(禿同)과 전농시(典農寺)의 종 윤생(尹生) 등이 노산군을 알현하기 위해 선수(膳羞: 음식)를 가지고 갔다 하는데, 반드시 사유가 있을 것입니다. 고신(매를 치며 신문하는 것)을 청합니다.”
조사 결과 독동과 윤생은 수박과 호도를 가지고 노산군을 알현하려고 한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노산군을 지키는 군사들에 의해 저지되었고, 끌려와서 형조의 혹독한 신문을 받았다. 형조는 둘을 능지처사하고 재산을 빼앗고, 그 가족들도 연좌하자고 주청했다. 세조는 장 100대를 때리라고 명했다. 능지처사할 경우 공노비들까지 단종께 충성을 바친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
-<상왕 복위 기도 사건>(90쪽) 중에서

홍윤성은 워낙 여러 문제를 일으켰으므로 무사히 넘어갈 수는 없었다. 세조 4년(1468) 7월 11일 사헌부에서 홍윤성의 문제를 아뢰었다.
“홍윤성이 고(故) 호군(護軍) 김한(金汗)의 딸을 범하려고 이달 초7일에 강제로 김한의 집에 묵었는데, 김한의 처가 그 딸을 데리고 도망가서 이웃집에 숨었습니다. 홍윤성은 큰 재상으로서 상중(喪中)인데도 혼인을 도모해서 강상(綱常)을 더럽히고 허물어뜨렸습니다. 청컨대 철저하게 죄를 물으소서.”
호군은 오위 소속의 정4품 벼슬이었으므로 양반가의 딸이었다. 이런 사대부가의 딸을 강제로 범하려 한 것이니 사실이라면 그 죄는 큰 것이었다. 게다가 홍윤성은 어머니의 상중이었다. ... 김한의 아들 김분(金汾)이 홍윤성의 행위를 사헌부에 고발했으니 태종·세종 때 같으면 사헌부가 바로 수사에 나서서 구속했을 것이지만 세조 때는 달랐다. 오히려 사헌부 관리들이 홍윤성의 집에 왕래하면서 사적으로 상황을 보고한 것이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홍윤성의 집에 가서 사건의 경위를 말해준 인물이 대사헌 어효첨이라는 점이었다. 태종·세종 때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이 공신들의 나라에서 버젓이 자행되는 것이었다.
-<공신들은 절대 처벌받지 않는다, 홍윤성>(130~132쪽) 중에서

예종은 특히 함길도 관찰사가 신숙주에게 뇌물을 보낸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함길도는 1년 전 이시애의 난이 발생했던 곳이다. 이때 신숙주·한명회가 이시애와 연결되었다는 증언이 나와 두 사람이 투옥되었던 적이 있었다. 예종은 함길도의 이런 특수성을 거론하며 김미를 꾸짖었다.
“너는 무슨 일 때문에 서울에 왔느냐? 권문(權門) 몇 곳이나 뇌물을 주었느냐?”
“신은 진상할 물건을 가지고 서울에 이르렀으며, 다만 감사의 편지를 신숙주에게 부쳤을 뿐입니다. 뇌물을 준 다른 곳은 없습니다.”
“네가 임금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알고 진상물을 가지고 왔으면서도 또 무슨 물건을 가지고 권문을 섬기느냐? 작년에 함길도 사람들이 신숙주·한명회 등이 몰래 불궤를 꾀한다고 말해 여러 사람들이 의혹했고, 관찰사·절도사 및 수령들을 다 죽여서 인심이 편하지 못한데, 네가 이를 알면서도 지금 다시 이렇게 해서 인심을 흉흉하게 하느냐?”
형식은 김미를 꾸짖는 것이지만 내용은 신숙주와 한명회를 꾸짖는 것이었다. 예종은 관찰사 박서창을 체포해 국문하고 그 자리를 한치형(韓致亨)으로 교체했다.
-<거침없는 예종의 공세>(237~238쪽) 중에서

성종은 오랫동안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재위 6년(1475) 승정원에 붙은 익명서 사건을 이용해 이듬해 초 친정을 쟁취했다. 신공신이 사라진 조정에서 성종은 새로 진출한 사림이 구공신을 견제할 세력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성종은 의식적으로 사림을 육성해 구공신의 권력을 제어했다. 숙부 예종이 구공신, 신공신을 가리지 않고 적으로 몬 결과 의문의 죽임을 당한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공신 집단과 사림을 대립시켜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사림을 구공신을 대체할 정치 세력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성종의 목적은 구공신의 견제와 왕권의 강화였지 소멸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치세는 구공신과 사림 사이의 현상 유지가 이어졌다. 여기에만도 비상한 정치력이 유지되었다.
-<나가는 말>(381~382쪽) 중에서
( /본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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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생년월일 1961.10.07~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시
출간도서 81종
판매수 137,943권

1961년생으로 충남 아산에서 자랐다.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를 시작으로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알렸다. 그는 역사학자로서 사료에 대한 철저하고 세심한 고증, 대중과 호흡하는 집필가로서의 본능적인 감각과 날카로운 문체로 한국사에서 숨겨져 있고 뒤틀려 있는 가장 비밀한 부분을 건드려왔다. 언제나 발표하는 저술마다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역사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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