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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시대 : 박경리 중단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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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여성의 전쟁 수난사를 가장 탁월하게 그려낸 작가, 박경리
데뷔작 「계산」에서 『토지』의 이정표가 된 「약으로 못 고치는 병」까지
대표 중단편소설 7편 수록


대하소설 『토지』의 저자이자 「불신시대」 「파시」 「김약국의 딸들」 등 다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되어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 박경리의 대표 중단편소설이 묶인 『불신시대』가 〈한국문학전집〉 마흔여덟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특히 이 책은 작가의 13주기를 맞는 2021년 5월 5일 출간되어 그 의미를 더한다.

박경리는 한국전쟁의 참담과 이후 사회 복구기의 빈곤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이를 소설로 탁월하게 재현해냈던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다. 그는 1926년 태어나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황해도 연안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았고, 연이어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며 그 고통을 소설로 담았다. 1955년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을 발표하고, 이듬해에 「흑흑백백」을 실으며 추천이 완료되어 정식으로 데뷔한 그는 서른 편가량의 단편과 스무 편이 훌쩍 넘는 장편소설을 집필했다.

이번 중단편선은 1960년대 여성 장편소설 중에서도 특히 박경리와 강신재를 연구했던 한신대학교 강지희 교수가 책임편집을 맡았고, 발표 원본에서부터 작가 생전에 출간된 다양한 판본을 비교하여 현대의 독자가 읽기 쉬우면서도 정확한 텍스트를 확정했다. 고독과 절망의 시대를 살아내면서도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결벽성과 인간의 존엄에 대한 추구, 운명과 제도를 넘어서는 낭만적 사랑에 대한 매혹”(해설 「환상 없는 밤의 시간」)을 놓지 못했던 작가 박경리. 이 책을 읽는 일은 그의 광활한 소설 세계를 맛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전쟁 이후를 살아가는 여성의 빈곤, 수치, 폭력

하루살이처럼 위태롭고 서글픈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런 불안전한 생활 기반마저 두 달 전에 아주 잃어버리고 말았다. 실직을 한 것이다. 혜숙은 이렇게 궁해져도 도무지 기질만은 옛날과 같이 변하지 않는다. 아니꼽고 더러우면 팩하니 침 뱉고 돌아서버린다. 이러한 성질은 가난한 그를 더욱 가난하게 하였다. (「흑흑백백」)

총알이 오가는 전쟁만큼이나 두려운 것은 이후 끈덕지고 비루하게 이어지는 삶이었다. 전후에 씌어진 박경리의 자전적 소설들에는 특히 자존심 강한 여성이 가장으로서 생계를 꾸려가는 동안 느껴야 했던 수치와 모멸이 생생하고 복합적으로 드러나 있다. 대표적으로 「흑흑백백」에서는 남편이 폭사하여 친정어머니와 딸을 부양해야 하는 ‘혜숙’이 구직 과정에서 겪는 편견과 치욕을 그려낸다. 학교 예산을 횡령할 뿐 아니라 한때 제자였던 유부녀 ‘황금순’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장 교장이 ‘혜숙’을 다른 이와 착각하여 문란한 여성이라고 낙인찍는 아이러니를 통해 남편 없는 여성의 경제 활동을 가로막던 다양한 차별의 시각을 꼬집었다.

젊은 중은 들고 온 그릇에다 영가 앞에 차린 음식을 조금씩 덜어놓는다. 나물, 떡, 자반, 과실, 그렇게 차례차례 손이 간다. 마침 먹음직스러운 약과에 손이 닿자 별안간 목탁을 치던 중이,
“그건 그만두구려!”
바락 소리를 지른다. (「불신시대」)

이번 중단편선에서는 실제로 박경리가 아들을 화장터에서 떠나보낸 날부터 집필했다고 알려진 「암흑시대」와, 그로부터 한 달여쯤 지나 죽은 아들을 추모하기 위해 종교에 절박하게 기대던 나날을 담은 「불신시대」도 연이어 실렸다. 작가는 돌발적인 사고로 머리를 다쳐 병원에 실려 간 아들이 허망하게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반복적으로 톺으며, 뇌물 없이는 수혈조차 받을 기회가 없고, 명령과 책임 계통마저 분명치 않던 “그야말로 없는 놈에게는 병원이라기보다는 생지옥”(p. 84)이었던 1950년대 의료 시스템의 붕괴 현장을 낱낱이 보여준다. 더하여 신을 섬기고 망자를 추모하기보다는 경제적 이해타산에만 골몰한 종교 의식들을 경험하며 말 그대로의 ‘불신시대’에서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가 끈덕지게 질문한다.

낭만적 사랑, 혹은 환상

“그래 너는 사실만 가지고 따지는구나. 나를 냉혹하다고 생각하니? 그래도 좋다. 사실 지금까지 난 경구 씨에 대한 내 처사가 옳았고, 그른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내 감정이 모든 것을 포기한 그것뿐이야.”
“회인아 넌 너무 철없다. 넌 뭐라 해두 경구 씨 같은 사람 그리 흔하지 않아요, 난 어디까지나 현실적이야, 그까짓 말 몇 마디 가지구 그럴 것 없잖어? 더군다나 그가 지금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 (「계산」)

박경리의 데뷔작 「계산」에서는 실리적 수단으로서의 결혼을 거부하고 순수한 사랑을 지향하는 낭만적 시선이 담겨 있다. 하지만 절대적 사랑을 꿈꾸며 약혼자를 떠나려 결심한 여성이 얼마나 절망적인 세태의 벽에 가로막히는가를 그려내며, 현실의 구차함과 이상주의 사이의 간극을 여실히 보여내어 그 균형감을 맞춘다.

“에이잉! 하필이면 일본 애한테, 일본 애하고 S한 조선 애는 전교에서 한 명도 없다. 넌 정말 엉뚱한 짓을 했구나. 그래 마지마 선생이 뭐래든?”
“네가 쓴 거냐고 묻더군. 편지엔 이름도 안 썼는데.”
“그야 글씨를 보면 당장 알지. 그 능구랭이가 모를라구? 그런데 어쩌다 들켰니? 그놈의 계집애가 갖다 바쳤을까?” (「환상의 시기」)

한편 작가 자신의 유년과 진주여고 시절을 재구성한 중편 「환상의 시기」는 이 책의 가장 큰 분량을 책임지고 있는 작품으로,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 민이가 일본인 여학생 오가와 나오코에게 반하여 S교제를 청하면서도, ‘일본인’ ‘여학생’을 향한 감정을 부인해야 하는 수치심이 중첩되어 그 긴장감과 흡입력이 높아진다는 특장도 가지고 있다. 책임편집자 강지희는 이 소설이 그간 연구자들에게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국면 이후 식민지 시기의 기억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으면서도 역사적 의미를 찾기보단 사적 체험에 압도되었다 평가받은 점을 지적하며, 실은 이 작품이 “여학생들 사이에서 강렬한 밀도의 동성애적 친밀성을 다룬 소설로, 민족의 경계뿐만 아니라 이성애 정상성과 충돌하는 소설로서 새로 읽힐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비극을 딛고 예술로 향했던 고결한 여성의 일생

장대한 작품 세계를 이루어낸 생이었기에 하나로 단언될 수 없는 박경리의 삶과 소설이지만, 그의 여성 인물에게서 두루 엿보이는 꿋꿋한 생의 의지와 고고함은 작가의 정신을 닮아온 것이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박경리의 회고에서 반복되어 이야기된 “인생이 행복했으면 문학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은, 부지불식간에 두 가족을 잃고 무너진 사회 안에서 여성으로서 분투하며 살았던 경험을 향해 있다. 오늘날 박경리를 읽는 일은 단지 과거의 일제강점기와 전후 시대상을 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불합리에 타협하지 않는 엄준함과 이상을 향한 지치지 않는 열정을 배우고 자신의 삶에 녹여갈 계기를 맞는 마중물을 만나는 일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추천사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서 여성 인물들의 생존에 어떻게 수치와 폭력이 개입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박경리만큼 냉정하게 그려낸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환상 없는 밤의 시간 속에 있다. 모든 것이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혼몽하고 어두운 시대에서, 그 어둠이 헤아릴 수 없는 고독과 절망의 깊이를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결벽성과 인간의 존엄에 대한 추구, 운명과 제도를 넘어서는 낭만적 사랑에 대한 매혹 역시 숨길 수 없는 박경리의 것이다. 한국 문학사에 거대하게 자리매김한 박경리가 사적인 비극에서 민중을 어우르는 자리로 나아가기까지, 그 넓어지고 깊어지는 면면들을 이 중단편선을 통해 확인하게 되기를 바란다.
_강지희, 작품 해설 「환상 없는 밤의 시간」에서

목차

일러두기

계산
흑흑백백
암흑시대
불신시대
벽지
환상의 시기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



작품 해설
환상 없는 밤의 시간 / 강지희
작가 연보
작품 목록
참고 문헌
기획의 말

본문중에서

“글쎄 요새 세상엔 병원이고 의사고 다 못 믿어요. 재작년 글쎄 우리 큰아이가 자동차에 치었을 때 무료 병원엘 갔는데 참 형편없더군요. 미군 차에 치었기 때문에 그리로 갔었지요. 그러나 가만히 꼴을 보니 그냥 두었다가는 아이를 놓칠 것 같아서 담당한 의사하고 간호부에게 와이로4를 썼지 뭐예요. 그랬더니 하루 두 차례씩 상처를 보아주더군요. 그러지 않는 환자는 수술만 했지 그냥 내버려두지 않소. 더군다나 여름이라 수술한 자리에 구데기가 득실득실 끓고 그야말로 없는 놈에게는 병원이라기보다 생지옥이지 뭡니까.”_「암흑시대」

“내게는 다만 쓰라린 추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무참히 죽어버린 추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진영의 깎은 듯 고요한 얼굴 위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겨울 하늘은 매몰스럽게도 맑다. 잡목 가지에 얹힌 눈이 바람을 타고 진영의 외투 깃에 날아내리고 있었다.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다.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진영은 중얼거리며 잡나무를 휘어잡고 눈 쌓인 언덕을 내려오는 것이다._「불신시대」

“강숙인의 대용품이군요.”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혜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서 현관의 벨을 누른다. 할멈이 문을 열었을 때 혜인은 정중하게 병구를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문턱을 넘어 매몰차게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었다. 혜인은 따라오는 할멈을 손을 저어서 보내고 방문을 열었다. 사방의 흰 벽이 혜인에게 바싹 다가서는 것같이 느껴진다. 그대로 방바닥 위에 꼬꾸라졌다. 통곡에 가까운 울음이 그의 몸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고독과 절망._「벽지」

저자소개

생년월일 1926.10.28~2008.05.05
출생지 경남 통영
출간도서 58종
판매수 99,928권

1926년 10월 28일(음력)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으로 등단하였다. 『표류도』(1959), 『김약국의 딸들』(1962)을 비롯하여 『파시』(1964), 『시장과 전장』(1965) 등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9년 9월부터 대하소설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하여 26년 만인 1994년에 완성하였다. 2003년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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