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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이야기 1~3권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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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품의 분류

책소개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 필생의 역작!
서양 문명의 원형, 세계화의 선구자
그리스를 둘러싼 거대 역사 스펙터클!
최고의 역사 저술가 시오노 나나미의 눈으로 본
그리스인의 역사, 마지막 세 번째 이야기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역사 저술가 가운데 한 사람인 시오노 나나미. 그가 서양 문명과 민주주의의 원류, 그리스와 그리스인의 역사 탐색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모두 3권으로 출간하는 시리즈 [그리스인 이야기]에서 저자는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문장으로 그리스인의 생각, 인생, 정치, 문화, 사회, 외교의 전모를 펼쳐낸다.
시리즈의 마지막 세 번째 책인 [그리스인 이야기 Ⅲ: 동서융합의 세계제국을 향한 웅비]는 펠로폰네소스전쟁 이후 도시국가 시대의 그리스가 몰락해가는 순간순간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한편 그리스 변방에서 새롭게 웅비한 마케도니아의 대왕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와 이집트를 제압하고 거대한 페르시아제국을 정복해나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써내려간다.
그리스인이면서도 그리스의 인습, 즉 ‘배타적 민족주의’를 뛰어넘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최초로 동서융합을 이룬 세계화의 선구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가 단숨에 세계제국을 건설한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관점으로 위대한 영웅 알렉산드로스의 혁신적인 리더십과 인간적 면모를 면밀하게 파헤친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 필생의 역작!
서양 문명과 민주주의의 모태
그리스와 그리스인의 세계를 향한 두 번째 여정!

최고의 역사 저술가 시오노 나나미의 눈으로 읽는 그리스인의 역사, 그 두 번째 이야기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역사 저술가 중 한 사람인 시오노 나나미. 그가 서양 문명과 민주주의의 원류, 그리스와 그리스인의 역사 탐색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모두 3권으로 출간하는 시리즈 [그리스인 이야기]에서 저자는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문장으로 그리스인의 생각, 인생, 정치, 문화, 사회, 외교의 전모를 펼쳐낸다. 그중 둘째 권인 [그리스인 이야기 Ⅱ: 민주주의의 빛과 그림자]는 정치, 사회, 경제, 군사, 문화, 외교 등 많은 부분에서 절정기를 이룬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조망한다. 그리고 아테네의 국운을 결정지은 펠로폰네소스전쟁과 아테네의 쇠퇴를 통해 그리스 세계가 급변하는 과정을 그렸다. 저자는 그리스 세계를 양분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각축전을 배경으로 민주정치의 발전과 한계, 그리고 그리스인의 이상과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정학적 결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켜 해양 대국을 건설하고, 한편으로 끊임없는 정치 실험과 개혁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간 그리스인들. 2,500여 년 전 그들의 고뇌와 노력은 오늘날 우리의 고민, 우리의 지향과 무척이나 닮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깊은 공감과 교훈을 준다.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역사 저술가 중 한 사람인 시오노 나나미. 그가 서양 문명과 민주주의의 원류, 그리스와 그리스인의 역사 탐색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모두 3권으로 출간하는 시리즈 [그리스인 이야기]에서 저자는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문장으로 그리스인의 생각, 인생, 정치, 문화, 사회, 외교의 전모를 펼쳐낸다. 그중 첫째 권인 [그리스인 이야기 I: 민주주의가 태동하는 순간의 산고]에서는 태초 신화와 고대올림픽에서 시작해 활발한 해외 식민도시 건설과 민주주의 실험, 그리고 도시국가들 간 경쟁・갈등・협력과 국운을 건 두 차례의 페르시아전쟁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역사와 그 속에서 부침하는 여러 리더들과 시민들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휘몰아치는 전쟁의 격랑과 그 저변에서 꿈틀거리는 민주정치의 태동과 발전, 이 두 가지 축을 씨줄과 날줄로 절묘하게 교차시킴으로써, 저자는 그리스인이 꿈꾸고 실현해나간 세상을 손에 잡히듯 생생히 묘사해낸다. 지정학적 결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켜 해양 대국을 건설하고,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정치 실험과 개혁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간 그리스인들. 2,500여 년 전 그들의 고뇌와 노력은 오늘날 우리의 고민, 우리의 지향과 무척이나 닮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깊은 공감과 교훈을 준다.

출판사 서평

페르시아전쟁 이후 아테네와 민주주의의 황금시대,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페르시아전쟁 이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고대 그리스를 양분하는 강국이 되었다. 과두정치의 스파르타는 "변하지 않고 갈구하지 않는 나라"였지만 아테네는 달랐다. 민주정치를 운영하며 더 많은 이들과 함께하길 원했고,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길 바랐다. 기원전 461~기원전 492년까지 아테네의 발전은 눈부셨고 민주주의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실현된 일이 없을 만큼 원활하게 작동"했을 정도로 최고조에 달했다. 아테네는 명실상부 델로스동맹의 맹주였고, 수도에만 1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았으며, 대부분의 도시국가가 1척도 운용하기 힘든 삼단갤리선을 200척이나 운용하는 등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했다. 또한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 중 하나인 파르테논 신전을 재건하고 매년 축제, 경기, 연극제를 개최하는 등 문화와 예술 융성에도 힘을 쏟으며 ‘그리스인 모두의 학교’로 자리매김했다. 아테네는 어떻게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황금시대’를 맞이하며 번영과 풍요를 누릴 수 있었을까? [그리스인 이야기 Ⅱ]는 아테네와 민주주의의 성장 원동력과 그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국정을 담당하는 최고 직위 ‘스트라테고스(Strategos)’에 32년 동안 연속으로 당선되면서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리더 페리클레스는 민주정치 체제를 유지하면서 시민들을 통합시키고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테네 사회의 가장 아래에 외치한 노동자계급의 생활을 보장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친 것이 그중 하나다. 그리고 아테네의 페리클레스, 스파르타의 아르키다모스,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이들 동지중해 3대 강국의 리더는 비슷한 시기에 군주 지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충분한 양식(良識)을 지닌 자들이었다. 이들은 국제관계에서 합의점을 찾아가며 전쟁을 피했으며 설사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오래 지속되는 위험을 막았다.

아테네는 이런 평화 유지 노력과는 별개로 강력한 해군력을 마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델로스동맹을 견실하게 유지했다. 바다가 안전해지자 그리스 최대 인구를 자랑하는 아테네의 식량 수입로도 안전해졌다. 또한 육지의 안전도 도모했는데, 아테네는 외항인 피레우스 항구와 성벽을 잇는 일체화 작업을 통해 외적의 침입을 막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경제 센터로 변모할 수 있었다. 이처럼 안팎으로 안전이 확보되니 돈과 사람과 물자가 몰리면서 투자와 교역이 활발해졌고 덩달아 예술과 문화도 화려하게 꽃피울 수 있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리스인 이야기 Ⅰ]에서 아테네의 개혁이 ‘계급 간 갈등 해소’ ‘체제 안정’ ‘경제력 향상’ ‘국난 극복’ 등 다양한 현실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주의가 발전해나갔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노력은 [그리스인 이야기 Ⅱ]가 그리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비로소 완성에 다다른 셈이다. 앞에서 언급한 아테네인들의 현실적 요구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과제이다. 이 책이 그리는 아테네와 민주주의의 발전상을 들여다보면 내일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의 최대 적은 그리스 자신이었다!
아테네와 민주주의의 쇠락을 통해 더 나은 내일을 고민하다


페르시아전쟁이 끝난 뒤 48년간 그리스인은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는데 특히 아테네는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하지만 기원전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발발하였고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무조건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아테네는 강제로 스파르타의 동맹국이 되었고, 델로스동맹은 해체되었으며, 막강했던 해군력은 소멸되었다. 아테네와 피레우스 항구 일체화가 파괴되어 거대한 통상 센터로서의 기능과 위용마저 상실해버렸다. 무엇보다 강제로 민주정치를 포기하고 과두정치로 이행해야 했다.

아테네가 100년 동안 유지해온 그리스 세계의 패권과 민주정치를 상실하고 쇠락하게 된 것은 한순간의 결과가 아니다. 그리고 단순히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패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시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 필생의 역작!
서양 문명과 민주주의의 모태
그리스와 그리스인의 세계를 향한 대여정이 시작된다!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의 필요로부터 탄생한다


[그리스인 이야기 I] 서두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당시 그리스인이 훗날 서양의 패자가 되는 로마인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아예 상대로 여기지조차 않았다고 말한다. 그 정도로 고대 서방 세계의 대표주자는 그리스와 그리스인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쪽 동방 세계에는 페르시아라는 대제국이 강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사실 그리스는 상당히 결점이 많은 나라였다. 국토가 주로 바위투성이 산악지대여서 자체 생산력이 떨어졌다. 게다가 그리스는 한 나라가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도시국가들이 난립한 형태였다. 게다가 도시국가들끼리 서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고대올림픽이 이 지난한 전쟁을 잠시나마 멈추기 위해 탄생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그리스가 어떻게 서양 문명, 나아가 현대 문명의 한 모태로까지 성장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는 여정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고 신선하다. 이 책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당시 그리스에서 민주정치가 싹트고 발전해간 까닭을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단언한다. 당시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이 요구하는 ‘필요’에 따른 조치였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 중 최강국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였고, 코린토스와 테베가 그 뒤를 이었다. 군사력에서는 스파르타가 가장 막강했지만, 국가체제에서는 스파르타가 소수 지배였던 반면 아테네는 민주정치를 지향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 민주주의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숨에 이루어진 것도, 순탄하게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아테네의 개혁은 귀족정치를 타파한 솔론의 금권정치를 시작으로 해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치, 클레이스테네스의 실력주의, 테미스토클레스의 전시 위기관리 체제, 그리고 이후 아테네 민주정치의 황금기를 이끈 페리클레스 시대로 이어진다. 이들 각각은 당연히 그 자체로 완벽하거나 방향이 올바르지만은 않았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독재와 비민주의 요소가 표출되기도 했다. 다만 그 근간만은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각 단계마다 ‘계급 간 갈등 해소’ ‘체제 안정’ ‘경제력 향상’ ‘국난 극복’ 등 다양한 현실의 요구, 즉 ‘필요’가 존재했고, 이에 발맞추어 나름의 색깔을 더하며 아테네 민주주의는 발전을 거듭해나갔다. 그런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다음과 같은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고매한 이데올로기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필요성 때문에 태어났다. 냉철한 선택의 결과다. 냉철하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이 지배하던 시대의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는 힘을 가지게 되었고 작동했던 것이다. 민주정치가 이데올로기로 변한 시대에 도시국가 아테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쇠퇴뿐이었다."

‘양’의 열세를 ‘질’의 우수성과 ‘활용’의 힘으로 극복하다

민주정치의 확립과 더불어 그리스가 맞닥뜨린 또 하나의 큰 과제는 국난 극복이었다. 바로 제1차, 제2차 페르시아전쟁이 그것이다.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는 키루스 대왕의 정복 전쟁을 시작으로 중동에서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다리우스 1세에 이르러서는 ‘왕 중의 왕’을 자처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자타공인 당대 최강 군사력을 보유한 다리우스는 마침내 그리스에까지 정복의 손길을 뻗친다. 당시 그리스의 군사력은 페르시아의 군사력에 턱없이 못 미쳤다. 누가 봐도 패배는 명약관화했다. 더욱이 그리스는 여러 도시국가들의 연합체였다. 일체감이 부족하고 구심점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 불리한 전황을 극적으로 타개해낸 인물이 바로 아테네 지도자 테미스토클레스였다.

페르시아전쟁 기간 동안 테미스토클레스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마라톤전투, 테르모필레전투, 아르테미시온해전, 살라미스해전, 플라타이아전투, 미칼레 공략 작전 등 주요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테미스토클레
대왕 알렉산드로스, 그리스의 한계를 초월하다!
세계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드로스의 ‘힘’은
배타적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혁신에 있었다!

문명의 중심 그리스의 몰락 과정을
누구보다 상세하게 기록하다!


그리스의 양대 도시국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크게 한판 붙었다. 아테네는 전쟁의 패배로 크나큰 상실감에 빠졌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신감에 차 있던 아테네는 전쟁의 패배와 함께 곤두박질쳤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리스 세계가 이제 ‘도시국가 시대의 종언’을 맞이했다고 표현한다. 사실상 ‘아테네의 몰락’은 ‘그리스 전체의 몰락’의 또 다른 말이다.
패배한 아테네가 민주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사이 과두정권이 들어섰다. 과두정치는 곧 공포정치로 변질되었다. 아테네는 경제력마저 상실했고 사회는 이내 큰 혼란에 빠졌다. 국내의 인재들은 해외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뒤늦게 민주정치를 부활시켰지만 자신감까지 회복되지는 않았다. 저자는 주체성을 잃은 그리스인의 모습을 ‘소크라테스의 재판’ 사건에서 탁월하게 분석해낸다.
혹자는 그리스의 패권이 이제 승자 스파르타에게 넘어가지 않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시오노 나나미의 표현대로 ‘괄호를 친’ 패권 국가, 즉 명목상의 패권 국가였다. 영향력 없는 패권이었다는 말이다. 주변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면 패권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점을 시오노 나나미가 콕 집어 지적한 것이다. 결국 패권 국가 스파르타는 그리스를 페르시아에 팔아넘기고 만다.
그리고 테베. 스파르타가 권력을 쥐고 있는 동안 테베도 조금씩 세력을 키워나갔다. 스파르타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면 스파르타를 무너뜨려야 했다. 테베는 내부적으로 군사 개혁을 이루어 스파르타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스의 패권은 이제 테베에게 넘어왔지만 마찬가지로 ‘괄호를 친’ 패권 국가였다. 그리스의 패권은 머지않아 변방의 신흥 세력 마케도니아에 넘어간다.
저자는 [그리스인 이야기] 제3권 제1부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 그리스의 몰락 과정을 설명했다. 제1권과 제2권에서 그리스의 발전 과정, 특히 민주정치의 태동과 발전, 그리고 한계를 중심으로 파란만장한 그리스인 이야기를 전개해나갔다. 이에 비해 펠로폰네소스전쟁 이후 그리스의 몰락 과정은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서술하고 넘어갈 법도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예상과 다르게 마음먹고 펜대를 잡은 듯하다. 성공한 역사보다 실패한 역사 속에서 배울 점이 더 많다는 진실을 누구보다 공감하고 있는 듯 보인다.

카이사르, 마키아벨리보다 앞선 그녀의 남자,
시오노 나나미는 알렉산드로스를 어떻게 보았는가?


익히 알려진 대로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 마키아벨리, 체사레 보르자처럼 강한 남성상 또는 영웅상을 좋아한다. 이미 그녀는 이들에 관한 책을 출간했다. 이제 저자는 생애 최후의 역사 에세이가 될 것이라고 밝힌 [그리스인 이야기]시리즈 가운데, 마지막 제3권에서 알렉산드로스를 마지막 주인공으로 삼았다. 이 책에서 다루는 두 주제 ‘그리스의 몰락’과 ‘알렉산드로스의 등장’은 마치 저자가 의도라도 한 듯 묘한 대비를 이룬다. 제3권의 부제도 ‘새롭게 웅비하는 힘(新しき力)’이다.
[그리스인 이야기] 제3권의 제2부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의 패권을 잡는 시기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 이야기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이번 책에서도 시오노 나나미 특유의 인물 중심의 역사 서술 방식이 적용된다. 특히 알렉산드로스라는 전무후무한 영웅의 일대기를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따라간다. 당연히 알렉산드로스와 직접 인터뷰는 못했겠지만, 고대 역사가들과 현대 연구자들의 풍부한 자료를 토대로 당시의 정황과 배경을 면밀하게 추적하고, 저자의 독특한 역사적 상상력으로 알렉산드로스의 개인적인 심정까지 세밀하게 헤아린다.
그렇다면 시오노 나나미는 알렉산드로스의 어떤 면에 주목했을까? 우선 알렉산드로스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타고난 성격과 기질을 파악했다. 어린 알렉산드로스가 [일리아오노 나나미는 아테네의 추락을 아테네만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그리스 전체가 패했다. 자기들이 쌓아 올린 가치관을 스스로 붕괴시킨 것"이라고 평했다. 과연 아테네와 그들의 민주주의는 어떤 과오와 한계를 가지고 있었을까?

기원전 430년 페리클레스는 전쟁, 난민, 역병의 책임과 공금 악용이라는 이유로 스트라테고스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자긍심에 큰 상처를 입은 채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숨을 거두자 아테네의 정계에는 선동자(데마고그)들이 득세했고 우중정치가 시작되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민주정치의 리더는 민중이 자신감을 가지도록 ‘유도’하지만 우중정치의 리더는 민중의 마음속 불안을 ‘선동’한다"고 분석했다. 아테네의 국정은 이 선동자 그룹에 의해 좌우되었지만 그들은 발전적인 비전을 내놓기보다 비판만 일삼고 장기적인 시작과 일관된 정책이 없었다. 이들은 아테네 정계 근처를 배회하며 시민들의 불만과 불안을 자극해 잘못된 고민과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페리클레스 이후 등장한 양대 정당은 대립하기 바빴고, 시민들은 힘과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없었다. 이처럼 불안정한 정권이 군사적, 정책적 실패를 거듭하자 아테네 시민은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 시대를 두고 "형태는 민주정치였지만 실제로는 혼자 통치했다"고 평가했다. 어떤 관점에서는 독재와 비민주의 요소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아테네는 장기적인 발전 과제를 두고 힘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 시대 이후의 아테네는 그러지 못했다. 급기야 아테네 시민들은 민주정치를 버리고 ‘400인 정권’ ‘5,000인 정권’ 등 과두정치를 내세웠지만 이는 길게 지속되지 못하고 다시 민주정치로 돌아갔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자 아테네의 국력은 전진하기보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스파르타와 페르시아는 아테네를 향해 공세를 펼쳤다. 특히 페르시아는 아테네를 공격하는 스파르타를 여러 방면으로 원조했고,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아테네의 병력을 빼오기를 서슴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대목에서 "그리스인의 민족정신이 약화되었다"고 보았다.

결정적으로 아테네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가치관의 근간을 포기했다. 펠로폰네소스 연합군에 포위당한 동맹국의 원군 요청을 묵살하거나 동맹국에 부당한 세금을 부과하는 등 맹주로서의 신의(信義)를 잃었고, 반란을 진압하면서 불필요한 살육을 자행하여 양식(良識) 없는 행동을 하였다. 시오노 나나미는 페리클레스 시대 이후의 그리스 세계를 두고 "아테네인뿐만 아니라 그리스인 전체가 양식이 없는 사람들로 변해버렸다"며 한탄한다. 1권에서 이미 예고한 대로 "민주정치가 이데올로기로 변한 시대에 도시국가 아테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쇠퇴뿐이었다." 결국 그리스의 중심이자 ‘본보기’였던 아테네는 ‘본보기’이기를 포기한 채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스인 이야기 Ⅱ]가 그리고 있는 아테네와 민주주의의 쇠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스 세계와 민주주의에 드리운 그림자는 우리가 항상 경계하고 지양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스]를 읽고 영웅 아킬레우스를 동경한 대목에서 그의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아버지와 ‘트러블’이 생겨 가출을 감행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유명한 ‘고르디우스의 매듭’ 사건 때도 매듭을 꼼꼼히 풀기보다 단칼에 잘라버리기를 선택했다. 전투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 앞장을 서야 직성이 풀렸다. 이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습성은 왕이 된 이후 리더십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역사상 국왕이 직접 정복 활동을 나서서 대제국을 이룬 사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최초일 것이다. 리더 알렉산드로스는 부하 장수와 병사를 이끌고 낯선 땅을 탐험하며 적군과 싸워야 했다. 늘 선두에 서서 모든 것을 홀로 지휘하고 홀로 판단했다. 부하들은 오로지 리더의 명령에 순종해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알렉산드로스를 ‘폭군’은 아니지만 ‘독재자’로 보았다. 알렉산드로스에게 인간적인 면모야 당연히 있었겠지만 저자는 굳이 그것에 주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유능한 리더에게 결국 필요한 건 사람을 이끄는 ‘능력’이지 사람을 끌어안는 ‘인품’은 아니라고 내내 역설한 듯하다.

세계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드로스의 ‘힘’은
배타적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혁신에 있었다!


문명의 중심이라 자부하며 그 외의 것을 비문명 또는 야만이라 규정짓는 자문화중심주의, 다른 말로 ‘배타적 민족주의’는 문명의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야만’이자 ‘폭력’일 뿐이다. 오늘날 전 세계가 세계화를 부르짖는 듯 보이지만, 한쪽에서는 난민 문제나 자국우선주의, 브렉시트 등 새로운 형태의 국수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 역사상 누구보다 먼저 세계화를 지향한 알렉산드로스의 지혜와 전략은 다문화 다민족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크나큰 예지와 비전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알렉산드로스가 세계제국을 건설한 ‘힘’, 다른 말로 ‘원동력’은 무엇일까?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 즉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매우 강했다. 이집트를 정복할 때도 나일강의 찬란한 문명에 감탄하며 발에 땀이 나도록 ‘여행’을 다닐 정도였다. 정복 활동의 루트도 늘 겹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했고 새로운 생각과 혁신적 아이디어를 손 벌려 환영했다. 이집트나 페르시아만의 독특한 타문화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저자는 알렉산드로스의 바로 이런 ‘혁신성’과 ‘열린 마음’을 높이 평가한다.
이 책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명실상부한 그리스인으로 나온다. 마케도니아인을 그리스인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아무튼 시오노 나나미는 알렉산드로스를 그리스인으로 ‘보았다.’ 저자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어린 시절부터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에게서 무예를, 아테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교양을 배운 뼛속까지 그리스인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제국을 건설한 이후 아시아 지역에 ‘헬레니즘 세계’가 펼쳐진 것만 보아도 그리스 문화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인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를 뛰어넘었다. 물리적으로도 넘어섰지만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는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룰 만큼 고도로 발달한 정신문화를 이룩했지만, 그만큼 배타성도 짙었다.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배타적 민족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우월한 자의 교만이라 해야 할까! 시오노 나나미는 이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을 소개한다. 최고의 철학자이자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마저 그리스인과 이방인을 문명인과 야만족으로 구분 지었고 제자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하지만 철학은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 즉 지력(智力)을 기르는 학문 아니던가. 알렉산드로스는 스승에게 배운 지력으로 스승의 생각을 뒤집어버린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장면을 책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서술했다. 알렉산드로스의 혁신적 철학은 결국 헬레니즘 제국의 근간을 이룬 패배자 동화 정책, 즉 민족 융합 정책을 낳았다.
군사 정책에서도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두드러진다. 이미 아버지 필리포스 대에
스는 탁월한 전략과 위기관리 능력, 강력한 리더십으로 끝내 페르시아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를 두고 저자가 "아테네 민주정치가 낳은 아이" "아테네 최고의 유명인일 뿐 아니라 그리스 최고의 유명인"이라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다. 심지어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존재 자체가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경이로움"이라고 극찬한다. 그런데 한 개인으로서 영웅이 아니라 그리스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리스가 대제국 페르시아를 물리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시오노 나나미는 그것을 ‘질’, 다시 말해 ‘활용하는 능력’이라고 지적한다. "페르시아(동방)는 ‘양’으로 압도하는 방법으로 공격해 왔다. 그리스(서방)는 ‘질’로 맞서 싸웠다. 이때 ‘질’이란 개개인의 소질보다는 모든 시민이 지닌 자질을 활용한 종합적인 질을 의미한다. 즉 한데 모아서 활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를 통해 그리스는 승리했다. 보리 한 줌에 불과했지만 대제국을 상대로 이긴 것이다."

이때 ‘활용하는 능력’이란 ‘응용력’ ‘융통성’ ‘목적 지향성’ 등으로 읽힌다. 일례로 저자는 테미스토클레스를 "누구든 활용하려 했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은" 인물로 묘사한다. 실제로 테미스토클레스는 참주(독재자)의 등장을 막기 위해 도입한 민주적 수단인 도편추방 제도를 정적 제거에 ‘활용’했으며, 나아가 전쟁에서 승리라는 목적을 위해 제거한 정적을 다시 불러들여 ‘활용’했다.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전쟁이라는 엄청난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함으로써 자신들이 가진 자질에 눈을 떴고, 이는 이후 유럽 정신을 이루는 중요한 한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오늘날 유럽은, 고대 그리스인이 페르시아로 대표되는 동방과 차이를 만들었던 바로 그때,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중무장 보병의 장창 밀집 대형인 일명 ‘팔랑크스’를 만들었다. 오랜 전통과 관습만 고수하는 경직된 그리스 시민으로는 해내기 어려운 시도였다. 여기서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한발 더 나아간다. 그리스에서는 보병을 중시하다보니 기병 전력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다. 기병은 자산이 풍부한 부유층의 전문직에 불과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기병=중산층계급’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을 전투에 철저하게 활용해 연전연승의 승부사가 되었다. 또한 체계적인 보급품 조달,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기지) 건설 등 드넓은 제국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시스템을 적재적소에 만들어냈다. 이를 두고 시오노 나나미는 "아버지 필리포스는 그리스를 상당한 수준으로 뛰어넘었지만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의 한계를 ‘초월’했다"고 평가한다.
지금까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십자군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그리스인 이야기]의 완간이 더욱 반가울 것이다. 특히 [그리스인 이야기] 제3권에서 다룬, 타문화를 야만이라 치부하지 않고 넓게 품는 알렉산드로스의 관용정신은 오늘날 한국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뼈 있는 교훈이 될 것이다.

목차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제1장 그리스인은 누구인가?
올림픽
신들의 세계
해외로 웅비

제2장 나라 만들기의 여러 모습
리쿠르고스의 ‘헌법’: 스파르타
솔론의 개혁: 아테네
페이시스트라토스 시대: 아테네
쿠데타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아테네
도편추방
기권은? 그리고 소수의견 존중은?

제3장 침략자 페르시아에 맞서
페르시아제국
제1차 페르시아전쟁
마라톤
제1차와 제2차 전쟁 사이의 10년
정적 제거
전쟁 전야
테르모필레
강제 소개
살라미스로
살라미스해전
플라타이아이전투
에게 해, 다시 그리스인의 바다로

제4장 페르시아전쟁 이후
안전보장
아테네와 피레우스의 일체화
스파르타의 젊은 장군
델로스동맹
영웅들의 그날 밤

연표
도판 출처

제1부 민주정치의 황금시대
페리클레스 시대: 기원전 461~기원전 429년(33년)

1. 황금시대 전기
기원전 461~기원전 451년(11년)
- 라이벌 키몬
- 숙적 스파르타
- 30대 페리클레스
- 연속 당선
- 무기는 언어
- 젊은 권력자들
- 페리클레스의 연설
- 단단한 기반
- 궁극적인 데모크라티아
- 키몬, 돌아오다
- 라이벌, 퇴장하다

2. 황금시대 후기
기원전 450~기원전 429년(22년)
- 껍질을 벗은 페리클레스
- 칼리아스 강화
- 파르테논
- 아테네의 노동자계급
- 펠로폰네소스동맹과 델로스동맹
- 미래 그리스의 평화를 토의하는 회의
-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공존
- 사랑하는 사람, 아스파시아
- 변화하는 델로스동맹
- 새로운 시장 개척
- 사모스 섬 사건
- 에게 해의 북쪽
- 전쟁은 변방에서
- 확산되는 전선
- 전쟁이라는 악마
- 각 나라의 신중파
- 펠로폰네소스전쟁
- 테베, 움직이다
- 전쟁 첫해
- 페리클레스의 개전 연설
- 진심은 어디에?
- 전몰자 추도 연설
- 역병의 대유행
- 탄핵
- 오랜만의 승리
- 죽음

제2부 우중정치 시대
페리클레스 이후: 기원전 429~기원전 404년(26년)

3. 우중정치 시대 전기
기원전 429~기원전 413년(17년)
- 왜 우중정치로?
- 선동자 클레온
- 스파르타의 태도
- 레스보스 문제
- 확대되는 잔혹함
- 스파르타의 패배
- 아웃사이더 등용의 시작
- 전선 확대
- 역사가의 탄생
- 스파르타의 제안
- 니키아스 강화
- 그리스인에게 평화란
- 젊은 지도자의 등장
- 소크라테스
- 청년 정치가 알키비아데스
- 4국동맹
- 만티네이아전투
- 올림픽 시상대 독점
- 플라톤의 [향연]/ 멜로스 문제
- 시칠리아 원정
- 헤르메스 신상 파괴 사건
- 출전
- 출두 명령
- 시라쿠사
- 시라쿠사 공방전
- 알키비아데스, 스파르타로
- 다시 아웃사이더
- 용병 도착
- 니키아스 홀로
- 니키아스, 집으로 편지를 쓰다
- 원군 파견
- 공방전 2년째
- 첫 번째 해전
- 두 번째 해전
- 원군 도착
- 월식
- 세 번째 해전
- 최후의 해전
- 탈출
- 종언

4 우중정치 시대 후기
기원전 412~기원전 404년(9년)
- 참화가 알려지고
- 재기
- 에게 해의 동쪽
- 다시 알키비아데스
- 정국 불안
- 해군 장군 알키비아데스
- 새로운 세금이라는 실책
- 트리에라르코스
- 연전연승
- 다시 민주정치로
- 사랑했다, 미워했다, 그래도 바랐다
- 리산드로스
- 알키비아데스의 실각
- 사령관들의 사형
- 바다에서 단 한 번의 패배
- 암살당한 알키비아데스
- 귀국하는 사람들
- 무조건 항복

연표
도판 출처
제1부 도시국가 그리스의 종언

제1장 아테네의 쇠락

자신감의 상실/ 인재의 유출/ 소크라테스의 재판

제2장 벗어날 수 없는 스파르타
승자의 내실/ 고정화된 격자/ 오로지 호헌/ 시민 병사가 용병으로
스파르타 브랜드/ 그리스를 페르시아에 팔아넘기다

제3장 테베의 한계
테베의 두 사람/ 스파르타를 타도하기 위해/ 소수정예의 한계
양분된 그리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제2부 새롭게 웅비하는 힘

제4장 아버지, 필리포스

신들이 등을 돌린 땅/ 껍질을 벗은 마케도니아
새롭게 태어난 마케도니아 군대/ 인접 국가에 대한 대책
향상된 경제/ 올림포스 남쪽으로/ ‘우국지사’ 데모스테네스
그리스의 지배자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벌을 내리는 방법
이혼과 재혼/ 암살

제5장 아들, 알렉산드로스
생애 최고의 책/ 생애 최고의 친구/ 목숨을 맡긴 말
스파르타 교육/ 스승, 아리스토텔레스/ 첫 출전/ 20세에 왕이 되다
동방 원정/ 그 내실/ 아시아로 내딛는 첫걸음/ ‘그라니코스전투’
승리를 활용하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이소스로 가는 길
엇갈림/ ‘이소스전투’/ ‘해상 교통로’를 확립하다/ 티로스 공방전
이집트 정복/ ‘가우가멜라’로 가는 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가우가멜라전투’/ 다이아몬드가 달린 끝/ 바빌론, 수사, 그리고 페르세폴리스
스파르타의 몰락/ 중앙아시아로/ 타인보다 앞서가는 자의 비극
재개된 동방 원정/ 애를 먹인 게릴라전/ 인도로 가는 길
마지막 대전투 ‘히다스페스’/ 종군을 거부당하다/ 인더스강
미지의 땅을 탐색하다/ 패배자를 동화시켜 이루려고 했던 민족 융합의 꿈
알렉산드로스, 분노하다/ 마음의 친구가 죽다
서방 원정을 꿈꾸며/ 마지막 이별

제6장 헬레니즘의 세계
‘보다 뛰어난 자에게’/ 후계자 쟁탈전/ 알렉산드로스가 남긴 것

17세의 여름: 독자에게
역자 후기
도판 출처
참고 문헌

본문중에서

노력과 노고를 기울이지 않고도 번영을 구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완전한 착각이다. 번영을 구가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필요한 고난 극복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번영으로 가는 길을 개척한 인간과 그 길을 확고하게 만드는 임무를 부여받은 인간의 차이다. 만약 내가 플루타르코스를 흉내 내어 그리스에서 한 사람, 로마에서 한 사람을 택해 서로 대비하는 열전을 쓴다면 페리클레스와 짝을 이룰 로마의 인물로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를 고를 것이다. 후계자에게 필요한 노력과 노고의 성질은 ‘창업자’의 그것과 다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뛰어나든가 그렇지 않든가, 두 가지밖에 없다. 이후 페리클레스의 30여 년 역시 노력과 노고의 연속이었다.
(/ pp.31~32)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페리클레스 시대에 대해 논평한 것 가운데 가장 유명한 구절은 이것이다. "형태는 민주정치였지만 실제로는 혼자 통치했다." 이 말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게 된다. ‘다수결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혼자’ 지배하는 것이 가능할까?’ (중략) 아테네의 국정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명문가 출신이든 자산가든 ‘스트라테고스(Strategos)’에 선출되어야 했다. 그러자면 ‘트리부스(tribus)’라고 불리는 선거구에서 행해지는 선거에 당선되어야 했다. 게다가 도시국가 아테네의 행정구역인 ‘트리부스’는 한 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았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에 따라 아테네의 영토인 아티카 지방 세 곳에 각각 분산되어 있었다. 오늘날처럼 선거구를 찾아가 유권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스트라테고스’는 선거를 통해 1년에 한 번 선출했다. 이런 상황에서 페리클레스는 33세에 처음 당선된 이후 32년에 걸쳐 계속 스트라테고스에 당선되었다. 그의 낙선을 기록한 사료는 없다.
(/ pp.37~38)

페리클레스의 논법을 한마디로 표현할 때 ‘유혹해서 이끈다’는 의미를 가진 ‘유도(誘導)’만큼 적절한 말도 없을 것이다. 민주정치 국가 시민으로서 언론의 자유를 만끽하던 아테네인을 강제로 끌고 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리였다. 따라서 이치를 통해 ‘유혹해서 이끌고’ 가는 방법이 가장 유효했는데, 그럼에도 그 교묘함에 경탄할 수밖에 없다. 페리클레스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였다는 생각이 든다.
(/ p.42)

민주정치를 운용하는 아테네에서는 이 사람들 또한 훌륭한 시민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시민의 권리인 국정 참여는 물론이고 의무인 병역도 부과되었다. 병역의 경우 이들은 경무장 보병이나 군선의 노 젓는 선원이 되었다. 특히 선원은 살라미스해전에서 승리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에 제4계급에 속한다 하더라도 지위가 확고했다. 그러나 이들은 매일 일을 해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전시에는 조국이 위기에 처했으니 무보수로 병역을 감당한다지만, 평시에 공무를 맡으면 수입이 끊어지기 때문에 감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추첨으로 ‘불레’에 선발되어도 사퇴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페리클레스는 이것이 민주주의의 이념에 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도시국가 아테네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지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지만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퇴하는 사람이 속출하는 현실은, 시민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정치 국가 아테네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페리클레스는 시민집회에서 공무를 수행하는 시민에게 재직 기간 동안 일당을 지불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 pp.56~57)

이전에 아테네에는 아테나 여신에게 바쳐진 신전이 존재했다. 아테나 여신은 도시국가 아테네의 수호신이다.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는 예부터 이 여신에게 봉헌된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아테나 신전은 올림피아에 있는 제우스 신전이나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과 비교하면 규모나 화려함에서 뒤졌고,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신전과 별로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더구나 기원전 480년 제1차 페르시아전쟁 때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 불타고 말았다. 그 후 도시의 수호신 아테나는 가건물과 같은 신전에서

고대올림픽은 정확하게 4년에 한 번씩 개최되었다. 경기가 열리는 7일을 포함해서 1개월 동안은 휴전이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인은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참가를 허용하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특정 나라를 배척하거나 하지 않았다. 현대의 자동차경주에서 안전자동차safety car가 들어오면 추월이든 뭐든 할 수 없는 것처럼 어제까지 전쟁터에서 싸웠더라도 1개월 동안은 싸움을 멈췄다. 이렇듯 그리스인에게는 올림픽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오랜 세월 동안 고대올림픽이 지속되었을 리 없다. 제우스에게 한 맹세를 인간 따위가 깰 수 없다는 생각도 고대올림픽 지속을 뒷받침했을지 모른다. 고대올림픽은 늘 다투던 고대 그리스인에게서 꽃핀, 인간성에 깊이 뿌리를 둔 ‘지혜’였다.
(/ p.26)

스파르타인은 혼자서도 충분히 강했다. 그러나 집단을 이루면 그들의 강력함은 더하기에서 곱하기로 변했다. 동료가 옆에 있으면 용감무쌍한 사람으로 변했다. 스파르타 중무장 보병의 전투력이 그리스에서 첫손가락에 꼽힌 것도 집단을 이루어 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남자들이 강한 이유를 그들 사이에 이루어진 동성애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은 초점을 벗어난 것이다.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장년이 될 때까지 다음과 같은 자세를 꾸준히 고양했기 때문이다.
‘적에게는 절대로 등을 보이지 않는다.’
‘전쟁터에 나가면 이기거나 죽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후세 사람들은 리쿠르고스가 생각한 스파르타를 ‘무기로 쌓아 올린 국가’라고 평가한다. 리쿠르고스의 머릿속에는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것 따위는 들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 p.44)

솔론이 제안하고 시민집회가 가결한 법은 획기적이었다. 부채를 변제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신체로 변제하는, 즉 채무자는 채권자의 노예가 된다는 기존의 법을 폐지하는 법이었다. 도시국가 아테네의 시민집회는 귀족과 평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시대에는 아직 평민이 국가 요직에 선출될 권리가 없었지만 선거권은 있었고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법은 기득권을 무너뜨리는 것이었기에 귀족들이 불만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귀족과 평민 사이의 다툼을 해소할 필요성을 인식한 쪽은 당시 넓은 시야를 가진 그들 귀족이었다. 솔론은 착실하게 개혁의 첫걸음을 뗐다.
(/ p.57)

그리스인은 육체 단련 자체를 좋아했다. 나라에서 강제로 시키지 않아도 부모가 기꺼이 보냈고 소년들도 기쁘게 팔레스트라를 찾았다. 로마시대나 그 이후 오늘날까지 ‘팔레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정착된 시설들은 소년 전용이 아니므로 어른들 또한 많이 찾았고 세대를 초월해 시민들의 만남의 장이 되기도 했다. 팔레스트라에서는 전원 나체나 반나체로 단련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리스 조각은 예술적인 이유로 나체를 표현했다는 주장은 결과론에 불과하다. ‘평소 모습’대로 묘사한 것이 ‘예술’이 되었을 뿐이다.
(/ p.67)

근현대사 연구자들은 페이시스트라토스를 ‘티라노스(독재자)’라고 부른다. 그래서 앞으로 풀어갈 그의 치세를 ‘독재자가 아테네를 지배한 시대’라고 부른다. 이렇게 나쁘게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참주僭主’라고 부른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당연한 호칭이기는 하지만 참주라는 의미가 ‘제왕·군주의 이름을 참칭하는 자’라는 점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참주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가 스스로를 왕이라고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후세 역사가들로부터 ‘민주정치의 이정표’라고 불리는 솔론의 개혁에도 전혀 손을 대지 않았
다. 그대로 계승했다. 다만 운용 방식에 나름대로 색을 입혔을 뿐이었다.
(/ pp.80~81)

스파르타인에게 시민이란 리쿠르고스가 정한 것처럼 조국 방위에 생애를 바친 ‘전사’ 외에 다른 의미는 없었다. 도시국가 스파르타의 존속에 필수 불가결다고 여긴 수공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페리오이코이나 농업에 종사하는 헬롯도 그들이 보기에는 ‘시민’이 아니었다. 그래서 페리오이코이나 헬롯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았고 시민집회 참석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편 아테네에서는 솔론의 개혁이 말해주듯이 물건을 만드는 장인이나
500명 재판관 판결은 유죄 250표, 무죄 230표였기에 벌금만 내면 모든 게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펼친 정공법의 변명을 들은 뒤에 이루어진 최종 판결에서 유죄 360표, 무죄 140표로 큰 차이가 났기 때문에 사형이 결정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으면 알 수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적당한 수준에서 정리하려고 생각했던 재판관들을 소크라테스가 분노하게 만든 것이다. ...... 360명은 왜 분노했을까? 나는 이 시기 아테네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초조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순간에 소크라테스가 나타나 벌금형이나 망명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이다. 바로 그 소크라테스에게 시민들은 반발했다. 초조해하는 자신과 달리 평온한 소크라테스에게 분노를 쏟아부었다. 그 결과가 큰 차이의 투표수로 결정된 사형 판결이었다. 이런 상상 말고는 처음에 유죄를 선언한 사람이 250명이었다가 이튿날 360명으로 증가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도발적인 전술은 성공했다.
(/ pp.40~41)

마케도니아 군대에는 ‘팔랑크스’ 외에 경무장 보병도 있었다. 궁수와 투석병에 더해 ‘사리사’보다 짧은 창으로 싸우는 병사들이 있었다. 필리포스는 그들을 주요 전력인 ‘팔랑크스’의 보조 병사로만 활용했다. 이 병사들을 멋지게 활용한 사람은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도 달리 활용했다. 필리포스도 기병의 이점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테살리아 지방의 영유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 증거이다. 올림포스산 바로 남쪽에 펼쳐져 있는 테살리아의 지세는 말을 키우는 데 적합했고 당연하게도 기병의 산지이기도 했다.
고대인은 등자를 몰랐다. 그래서 기병은 말 위에서 발을 고정시킬 수 없었다. 기병은 그 상태에서 적의 창에 찔리거나 적이 던진 창에 맞아야 했다. 두 발을 꽉 붙인 채로 공격력을 발휘하려면 어릴 때부터 말을 타서 익숙해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기병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윤택한 계층 출신이라는 것은 아테네에서도 사실이었고, 훗날 로마에서도 ‘기사계급’이라는 명칭이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테살리아 지방에는 말이 많았고 당연히 숙달된 기병도 많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철저하게 활용했다. 필리포스는 도시국가 시대의 그리스를 상당한 수준으로 뛰어넘었지만, 아들과 비교했을 때는 그리스를 초월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 pp.148~149)

하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단순한 우등생으로 끝나고 만다. 알렉산드로스는 달랐다. 스승이 말한 다음의 가르침에는 전혀 따르지 않았다.
"그리스인은 동등한 친구로 대해도 좋지만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즉 야만족)은 동물이나 식물과 같다고 생각하고 대해야 한다."
페르시아로 갔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특히 이 가르침과는 정반대라고 해도 좋은 태도를 취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읽고 느낀 개인적인 소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어쩔 수 없는 도시국가 시대의 그리스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달리 알렉산드로스는 도시국가를 초월한 그리스인이었다.
아무튼 스승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모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뛰어난 제자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철학 자체가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 pp.222~223)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오리엔트의 지배자가 된다는 전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쯤 되면 알렉산드로스도 물러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러 겹으로 얽혀 있는 줄의 끝이 어디인지 찾을 수도 없었다.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은 잠시 침묵하면서 매듭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오래 망설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지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긴 칼을 들고 단번에 내리쳤다. 가죽끈으로 묶여 있던 줄은 둘로 조각났다. 전차와 그것을 끄는 채도 둘로 나뉘었다.
매듭을 손으로 풀어야 한다
상인, 농민 모두가 ‘시민’이었다. 그들은 수입의 많고 적음에 따라 피선거권에 차별이 있었지만 시민집회에 참여할 자격이 있었고 또한 그런 이유로 국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고 있어서 당당한 시민권을 지닌 ‘시민’이었다.
(/ pp.104~105)

도편추방의 대상은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지 ‘해를 끼친 인물’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재판관, 즉 사법기관의 역할이 아니라 시민, 즉 정치의 역할이었다. 또한 도편에 의해 추방된 사람은 범죄자가 아니기 때문에 재산을 몰수하지 않았고 가족은 아테네 내에서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었다. 단지 10년 동안 아티카 지방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어서 그 기간에 재산을 관리할 사람을 지명할 수 있고 그 사람으로부터 송금받을 수도 있었다. 여기에 적어도 3,000명 이상의 아테네 시민이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다’라는 이유로 이름을 적어야 하므로 그 대상은 중요한 인물이어야 했다. 따라서 도편추방을 당하는 사람은 아테네 정계의 거물이었다. 그러나 전화도 이메일도 없던 시대에 10년 동안 중앙 정계에서 분리되면 정치적 영향력의 약화는 피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도편추방의 참된 목적은 잠시 머리를 식히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도편추방제에 따라 추방된다는 것 자체는 명예훼손이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면 당당하게 귀국할 수 있었고 스트라테고스로 재선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뿐 아니라 시민집회에서 결의하면 10년이 안 되어도 귀국할 수 있었다. 이런 사례는25 년 동안 빈번하게 일어났다.
(/ p.124)

테미스토클레스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테네의 명문 출신이 아니었다. 아마 아버지는 수입별로 계급을 나눈 솔론의 개혁을 기준으로 보면 제3계급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어머니는 트라키아인이어서 아테네인이 보기에는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아테네 내에는 어머니와 관련된 연고도 없었다. 아테네에서는 정치적 야심을 가진 뛰어난 사람이 지명도를 높이고 정치적·경제적 지원 체제를 갖추기 위해 명문가 여자와 결혼하는 일이 있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나 크산티포스도 알크마이온 집안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그는 요직에 오를 수 있는 자격 연령인 30세가 되기 전에 이미 아테네의 서민 지구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자기 기반을 개척하려는 목적이었는데, 그 지구에는 도기 제조업자들이 모여 살았다. 불을 사용하기 때문에 도심에서 떨어진 교외에 있었다. 그곳에서 살게 된 청년 테미스토클레스는 항아리나 접시를 만들지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 도심에 있는 재판소로 출근했다. 그는 변호사, 그것도 민사 변호사를 맡고 있었다. 출퇴근도 그냥 하지 않았다. 도기를 만들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직공들에게 일의 진행 상태를 묻거나 그들 의견에 귀 기울이고, 만약 법적으로 귀찮은 일이 발생하면 변호 일을 맡는 등 이른바 이동식 상담소를 운영했다. 이렇듯 테미스토클레스는 여기저기 들르는 출퇴근을 하면서 세력 기반을 구축하고 확장했다.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평판을 잘 활용한, 고대사회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정치가였다.
(/ pp.177~178)
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칼로 잘라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 역시 어디에도 없었다. 금지되어 있지도 않은데 지금까지 도전했던 사람들은 매듭을 손을 사용해 풀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금지되어 있지 않다면 해도 된다고 생각한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 p.279)

서양에서 알렉산드로스 이후에 나타난 고대의 명장을 꼽는다면 다음의 세 사람일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포에니전 쟁에서 16년 동안 로마군을 능멸했던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그 한니발을 마지막 전투에서 무너뜨린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그리고 인도까지 ‘동방’을 제압한 알렉산드로스처럼 ‘서방’을 제압하고 훗날 윈스턴 처칠이 영국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도버해협을 건넌 뒤에 시작되었다고 말하게 만든 로마의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
전략과 전술에서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이 세 사람도 최고의 무장을 알렉산드로스로 꼽은 점에서는 완전히 일치했다. 그럼에도 세 사람은 전쟁터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방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도입했지만 전면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왜일까?
이탈리아어로 ‘푼타 디 디아만티Punta di Diamante’라는 말이 있다. 다이아몬드가 달린 끝을 의미하는데, 연마 도구의 끝에 달려 있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킨다. 가장 단단한 광석인 다이아몬드를 앞에 달면 쉽게 절단되지 않는 것도 자를 수 있다. 이 3명의 명장은 세로로 긴 마름모꼴 진형을 이루며 돌격하는 마케도니아 기마 군단의 위력과 효력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라고 하는 ‘푼타 디 디아만티’이기에 가능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 pp.368~369)

로마 시대에 알렉산드로스의 전기를 쓴 쿠르티우스 루푸스Curtius Rufus는 알렉산드로스가 이 말을 많은 사람 앞에서 했다고 기록했다. 다만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고는 쓰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장군과 병사를 차별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만큼 병사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최고사령관이 없을 정도이다. 전쟁터에 늘 선두에 서서 누구보다 큰 위험을 안고 싸웠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의 상징이 된 투구 위에 나부끼는 하얀 깃털 장식을 보면서 장군뿐만 아니라 일개 병사까지도 왕을 따르겠다는 일념으로 싸우게 만들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생각하는 리더는 부하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솔선해서 위험을 무릅쓰는 모습을 보여주어 자신의 모델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존재여야 했다. 따라서 사령관이나 지휘관을 향해 "너희가 나를 사랑해준 것도 내가 이제까지 보여준 용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은 앞으로도 ‘다이아몬드가 달린 끝’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는 의지를 확실하게 표명한 것이다.
(/ pp.370~371) 비를 피해야 했다. 그것을 33년 만에 재건하기로 했다. 당시 아테네 시민은 ‘칼리아스 강화’ 성립과 아테나 신전 재건을 동일선상에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실제로 시민집회는 페리클레스가 제안한 신전 재건 공사를 반대 없이 단번에 가결했다. 페리클레스는 그리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신전을 짓고 싶지는 않았다. 골짜기에 있는 올림피아나 델포이와 달리 아크로폴리스 언덕은 아테네 어디서나 보이는 위치였다. 도시국가 아테네의 번영을 상징하는 신전 건설 장소로 이보다 좋은 곳은 없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장엄하고 화려한 신전이 모습을 드러내면 매일 그곳을 바라보는 아테네 시민에게는 큰 자부심이 될 터였고, 아테네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감탄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볼 터였다.
(/ pp.82~83)

참고로 아테네에서는 자산가들이 돈을 토해내게 만드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활용했다. 하나는 연극 공연 스폰서를 맡기는 것이었다. 비극 두 작품과 희극 한 작품을 상연하기 위해 드는 비용 전체를 감당해야 했기에 상당한 금액이 필요했다. 다른 하나는 삼단 갤리선 1척을 바다에 내보내는 데 필요한 전체 비용을 부담시키는 것이었다. 삼단갤리선 1척을 건조하는 데 1탈란톤이 들었다. 1탈란톤은 6,000드라크마에 해당하므로 아테네 노동자의 30년 수입을 넘어서는 액수였다. 한편 갤리선 스폰서가 내야 하는 돈은 배를 건조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군선이었기 때문에 전투에 필요한 전력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래서 노 젓는 선원 170명을 포함한 선원들의 급료 전체를 부담해야 했다. 이 외에 연극 공연 스폰서를 맡는 것과 다른 점이 또 있었다. 돈을 낸 스폰서가 자기 사비를 들여서 전력화한 삼단 갤리선의 선장까지 맡아야 했고, 전쟁터에 직접 나가야 했다. 돈을 낸 사람도 신체가 멀쩡하니 조국 방위를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였을까. 전쟁에 나가 과감하게 전투에 참가하면 지명도가 올라가고 다음 해 스트라테고스에 선출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전사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 pp.93~94)

아테네는 계속 해군력을 증강했다. 언제나 보수적인 스파르타에서도 자기네 자랑인 육군 전력을 유지하는 데 반대하는 스파르타인은 없었다. 이로써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동맹’과 스파르타가 맹주인 ‘펠로폰네소스동맹’ 사이의 성공적인 ‘동거’가 50년 동안 이어졌다. 이것이 평화 유지의 참된 원인이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세력균형상태의 확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리스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두 나라의 ‘동거’는 50년이나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아테네는 해군 국가였고 스파르타는 육군 국가였다. 아테네는 기지 건설에 대한 욕망은 있었지만 영토 확장에 대한 욕망은 없었다. 영토가 확대되어도 그곳에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충분하지 않았다. 스파르타도 일국 평화주의를 유지한 역사가 길었고 자국의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만족하며 영토 확장에 대한 욕심을 갖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두 강국 간 이해관계의 충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테네의 1인자 페리클레스와 스파르타의 아르키다모스 왕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펠로폰네소스전쟁’은 일어났다.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코르푸와 코린토스의 다툼으로 점화된 불길이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통해 살펴보았다. 연못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바깥으로 퍼져나가는데, 전쟁은 이와 반대로 변경에서 일어난 사태의 파문이 중앙을 향해 모이는 사례의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펠로폰네소스전쟁’에 대해 쓰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매우 어리석을 정도로 소박한 의문이 하나 생겼다. 아테네의 주요 전력은 해상에 있고 스파르타의 주요 전력이자 유일한 전력은 육지에 있었다. 바다에 발판이 있는 나라와 육지에 서 있는 나라가 어떻게 전투를 벌였을까? 두 나라는 실제로 정면으로 격돌한 적이 있었을까? 상세한 서술은 앞으로 하겠지만, 우선 답하면 ‘없었다’. ‘없었기’ 때문에 27년 동안 승패를 가르지 못하고 전쟁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희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희극과 비극은 동전을 닮아서 앞뒤 관계다. 희비극(tragico-comico)이라는 말도 있다.
(/ pp.171~172)

저자소개

시오노 나나미(Nanami Shiono)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37.07.07~
출생지 일본 도쿄
출간도서 141종
판매수 238,251권

1937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63년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뒤, 유학차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1968년에 집필 활동을 시작해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잡지 〈주오코론(中央公論)〉에 연재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첫 장편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으로 1970년도 마이니치출판 문화상을 수상했다. 이해부터 이탈리아에서 거주 중이다. 1982년 《바다의 도시 이야기》로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했다. 1992년부터 한국 독자들에게도 많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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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 박사. 저술가 및 번역가. 한양대 철학과를 졸업했고, 그 후 한양대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에서 아시아 문화, 종교 문화, 신화와 축제 등을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신화 읽어주는 남자』 『어느 외계인의 인류학 보고서』 『신화, 우리 시대의 거울』 『우리 곁에서 만나는 동서양 신화』 『그리스와 놀자』 『하룻밤에 읽는 그리스 신화』 『황금과 교역의 나라 페르시아』 『인문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등이 있다. 주요 번역서로는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인 이야기』(전 3권)를 비롯하여,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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