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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정지영 감독의 <블랙잭>은 박기용 감독의 정반대 위기다. 점점 더 장르를 변형시키고 서로 다른 장르를 불러들여 잡종화되어 가는 지금, 이 작품은 거의 순수할 정도로 장르에 충실할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 안에 끼어들 수 있는 다른 장르의 컨벤션들과 싸운다.
이 영화는 1990년대에는 (모두들 코미디가 아니면 멜로드라마를 선택하는 시점에서) 보기 드물게 하드보일드와 미스터리 느와르 장르를 선택했다. 이것은 정지영 감독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보인다.
그는 <남부군>과 <하얀 전쟁> 이후 불현듯 그의 개인적 향수에 잠기듯이(소설가 안정효 작가의 기억을 빌려와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정지영 감독은 둘 중 하나의 태도를 취한다.
그가 1990년대라는 세기말의 아연실색할 만한 새로운 대중의 미분화 앞에서 더 이상 사회와 역사의 틀 안에서 질문하는 거대 담론은 유효하지 않으며 과거의 질문이 붕괴되는 동안 이제는 자기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든지, 아니면 우리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사실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보다는 그와 반대로 점점 더 스펙터클이 되어가는 모습 앞에서 영화를 닮아가는 현실을 따라잡기 위해 차라리 영화에 충실해지는 것이 더 현실의 모순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모른다.

35살의 이혼남인 강력계 형사 오세근은 타락한 지 오래다. 업소들에게 돈을 받고, 불법 영업을 눈감아 주거나 인수 과정의 이권에도 개입한다. 그런데 위로부터 그를 목표로 하는, 이른바 ‘여우사냥’이라고 불리는 감사가 시작된다. 초조한 상태의 그 앞에 우연히 작은 자동차 마찰 사고가 벌어진다.
상대는 29살 유부녀 장은영이다. 둘은 불륜에 빠지고, 은영의 남편이 권투 프로모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세근은 부도로 감옥에 간 아내에게서 빚을 청산해 주면 아이에 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돈을 구하려 하지만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에서 자기의 부정을 눈치 채고 목을 조르는 것을 느낀다. 그때 은영은 남편을 죽이고 함께 이민을 가서 스위스 은행의 계좌에 있는 돈을 인수하자고 제안한다. 오세근은 은영의 남편을 죽이지만, 그 모든 것은 은영의 함정이었고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니까 부패한 형사와 그를 뒤쫓는 검사의 이야기처럼 전개될 것 같았던 이야기는 한 여인의 출현과 함께 갑자기 뒤로 물러나고 이야기는 서로 물고 물린다. 그녀는 느와르 영화의 팜파탈이며, 동시에 타락한 자본주의적 유혹이다. 장르의 컨벤션들은 게임의 규칙에 더 없이 충실하며, 수많은 소도구들은 질서정연하게 자기의 몫을 행세한다. 이제 주인공은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이 배열해 놓은 퍼즐 안에 고스란히 들어가 허우적거리면서 자기의 시간이 다해 가고 있다고 탄식한다. <블랙잭>은 꼼꼼한 탐정소설을 읽는 재미를 안겨 준다. 그러나 이 말은 동시에 고스란히 <블랙잭>의 약점이 된다. 왜냐하면 그 주변 영화들이 점점 더 시각적 쾌락과 형식으로 사고하는 동안 이 영화는 반대로 그 모든 것을 이야기의 틀 안에서 전개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여기서 등장인물은 더없이 산문적 감정 기복을 지닌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 알리바이를 제시하는 동안 관객은 점점 더 이야기의 만연체에 말려든다. 이것을 그 자체로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이 영화는 새로운 시대의 공기에 조응하는 대신 오히려 그 반대로 정지영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거슬러 올라가 <남부군>(1990)을 넘어 그의 데뷔작이었던 <여자는 안개처럼 속삭인다>(1980)의 어떤 울림을 환기시킨다. 사실주의 영화를 벗어나 수수께끼 같은 시대를 잡아내려는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이 영화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불러일으키는 향수의 느낌을 더할 나위 없이 전한다. 그것이 정지영 감독의 의도와는 반대로 우리 시대에서 <블랙잭>이 매우 익숙하게 여겨지면서도 낯설어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_정성일(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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