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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우주들 :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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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걸작 [다뉴브](1986)에 이은 이탈리아 작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선집' 두번째 작품.

[다뉴브]에서 광대한 다뉴브 강 유역의 지리와 문화, 역사를 탐사했던 마그리스가 [작은 우주들]에서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트리에스테 만과 토리노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만나는 그 주변 국경지들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국가와 민족과 경계를 넘어 카페, 공원, 숲, 호수, 바람, 섬, 계곡, 마을과 사람, 풀과 꽃과 나무, 새와 곰과 물고기가 이 세계를 사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 이 책은 작지만 경이롭고 풍부한 세계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각각의 인생에서 비범하고 의미심장한 존재의 빛이 분출하기 때문이다.

출판사 서평

좌절된 혁명, 바뀌고 사라진 국경, 부서진 역사의 단역배우들
세계사 페이지 하단을 떠도는 덧없는 각주
그들을 비추는 인상파 에세이스트 거장의 빛나는 조명!

"이 책은 자그마한 것, '겨우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다. 관심은 기도의 한 형식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야말로 곧 구출이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1997년 스트레가 상 수상

경계도시 트리에스테에서 태어난 에세이문학의 거장이 쓴 픽션-산문의 백미

클라우디오 마그리스는 작년 2016년을 비롯해 오래전부터 숱한 상을 받으며 계속해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세계적인 문학가이자 중부유럽 연구가로서 명성을 쌓아온 이탈리아 작가다. '걸작'으로 불리는 [다뉴브](1986)에 이어, 1997년 발표한 이 책 [작은 우주들Microcosmi]로 이탈리아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인 스트레가 상을 받음과 동시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베스트셀러 작품이 되어 또다시 주목받았다. 세계 언론과 문화계 인사들은 "[다뉴브]에 이어 이 책으로, 마그리스는 자기 자신을 갑절로 넘어섰다"는 찬사를 보냈다.
오랫동안 여러 책을 통해 '국경, 경계, 주변부'를 사유해온 마그리스는 이탈리아 북동부 트리에스테 태어났다. 이곳은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영토 주도권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다민족-다문화의 '경계' 도시로서, 다양한 유럽 문화가 용광로처럼 들끓으며 뒤섞이고 공존하는 '교차로'이자, 시대와 국가를 거슬러 여러 곳에서 흘러들어온 배들이 정박해 있는 아드리아 해 연안의 '항구' 도시다. 마그리스는 고향 트리에스테를 제임스 조이스의 말을 빌려 "간을 갉아먹는 도시"라고 했고, "반짝이는 행복을 약속했다가 곧바로 저버리는 도시, 견딜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오이디푸스의 복부 같은 도시, 아드리아 해의 막다른 곳인 이곳에서 역사는 모든 실이 뒤얽히는 실타래다"라고도 노래했다. 또한 "나는 이탈리아인, 슬라브인, 크로아티아인, 오스트리아인, 아르마니아인, 그리스인, 유대인을 아우르는 경계도시 트리에스테에서 태어났기에, 경계의 작가가 되었다"라고 자기 정체성을 표한 바 있다. 이 작품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또다른 도시는 토리노다. 트리에스테가 작가를 낳았다면, 토리노는 작가를 키운 도시다. 토리노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에서 나온 긴장으로부터 이탈리아의 근대성을 창출한 중심도시이자 마그리스가 청장년기를 보내며 정신적 자양분을 얻은 도시다. 한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에게 토리노는 "현재와 설계의 장소"인 반면, 트리에스테는 "꿈과 향수의 장소"다.
이 책 [작은 우주들]에서 작가의 몸과 정신을 단련시킨 이 두 도시 이외에는 계곡들, 마을들, 석호들이 주인공들이며, 더 있다면 바다에 밀려온 해변의 잔해들, 역사의 주변부에서 밀려나 엑스트라처럼 고아처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 여행자가 가닿는 발길과 눈길로 여러 장소와 사람과 시절이 모자이크처럼 다채롭게 드러난다. 서녘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동녘의 현실이 되기도 하고, 어제는 역사의 고문관이던 사람이 오늘 휴양객으로 가게 계산대 앞으로 와 잔돈을 내줘야 하기도 하며, 숲에서 모두가 다 봤다는 곰을 몇 해를 추적해도 결국 못 보고 고작 그 똥만 보기도 한다. 이 피카레스크 소설 같은 이야기 속 주인공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며,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장소들이거나, 사람 수에 비해 너무 적은 이름들이 불리는 마을이거나, 사람이 아닌 거룻배나 한줄기 바람이나 노루 한 마리 등으로서, 보잘것없는 찰나적 복수 주체들이다. 그래서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린 하나의 픽션으로 읽히기도 한다. 마치 공원 벤치에 앉아 잠깐 든 낮잠 속에서 이 지구별에 사는 동안 마주한 온갖 것들로 빛나는 밤하늘을 본 것처럼.

세상의 첫 장소를 향해 나아가는 우수 어린 여행작가의 지리적 자화상

다시 말해 산문과 허구의 경계에 있는 이 글의 형식미는, 작가의 정체성과 이를 형성한 삶의 장소성이 지닌 운명과 한몸이다. 실제로 한 인터뷰에서 마그리스는 "[다뉴브]가 강줄기를 주인공 삼아 그 황량한 인근 유역의 모자이크 같은 사람들을 모아 국경, 정체성, 문화가 뒤섞인 세계들의 복수성을 이야기했다면, [작은 우주들]은 결코 '나'라고 말하지 않는 인물을 통해 한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려 했다. 즉 그 사람이 겪은 삶과 죽음, 그한테 매우 상징적인 몇몇 장소를 답사해나가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가 곧 이 책이다. 묘사도 없고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도 않는 주체지만, 우리는 그 뒤를 밟으며 그가 본 것을 보고 그가 사랑한 것을 사랑하고 그가 두려워한 것들을 두려워한다."
그럼에도 이 책 속에는 작가의 자전적 요소들이 곳곳에 있다. 단골 카페와 공원, 교회, 선조들의 고향인 작은 산골 마을과 알프스 산자락의 계곡, 대학시절을 보낸 토리노 일대의 언덕들, 여름 휴양지 스네주니크 산과 크로아티아 섬들, 크리스마스를 맞아 올랐던 남부 티롤로 지역들 등의 장소들은 작가의 삶을 일군 터전이다. 오래전 죽은 프란체스코 데 그리소고노 외할아버지, 마을 교회의 구이도 신부, 산마르코 단골 카페, 어머니와 어머니가 키우는 부페토, 이 책이 나오기 전해에 죽은 아내 마리사 등 세상에 자신을 나오게 한 미미한 것들에 작가가 다시 몸을 내줌으로써 비로소 제 몸을 내보이는 부재와 결핍과 부정의 근원적 세상으로의 회귀를 노정한다. 이는 마그리스가 얼핏 예감했듯 책 앞 제사에 인용한 보르헤스의 글에서 보다시피, 세상을 두루 누비며 그리려 했던 풍경화 작업이 곧 자신의 얼굴을 그린 자화상으로 귀결되었지 모를 일이다. 이따금 다리를 벌리고 머리를 아래로 숙여 그 사이로 주위 풍경을 바라보라고 했던 바루피 신부 말처럼, 비범한 전망을 위해서는 거꾸로 세상을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작가는 속삭인다. 세계사의 평범한 엑스트라들이 주연하는 존재의 밑바닥 현장들을 보는, 진정 비범한 견자의 눈길이다.
마그리스는 이 지리를 따라가며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에서의 사적 삶과 이탈리아인-슬라브족-게르만족 문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경계지역들의 공적 정체성을 가로지르면서, 거대 역사에서 망각되거나 누락된 채 처연하고도 모순적이면서 매혹적인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시대의 증인들, 역사 무대의 단역배우들, 이 작지만 단순하지 않은 작은 우주들을 대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들로서 하나하나 되살려내고 있다. 국가와 민족과 경계를 넘어 카페, 공원, 숲, 호수, 바람, 섬, 계곡, 마을과 사람, 풀과 꽃과 나무, 새와 곰과 물고기가 이 세계를 사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 '나'라는 주어 없이 여러 사람과 사물과 공간의 이야기를 뒤섞어 풀어낸,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린 하나의 픽션이자, 작가가 마주한 삶의 장소와 인물들이 담긴 빛나는 자서전적 여행 산문이다.

일상의 비범한 찰나를 때로는 희극적으로 때로는 비극적으로 그려나가는 한 인문주의자의 빛나는 아포리즘이 담긴 인상파 화첩

책의 차례는 이 책 속에 나오는 이름도 성별도 없는 하나의 원소 같은 이 여행자가 들른 주요 장소 아홉 곳이다. 이 여정은 작가가 수십 년간 들락날락한 글쓰기 장소인 트리에스테 산마르코 카페에서 시작해 그곳 만 일대의 석호들, 발첼리나 계곡(포르데노네 산간), 스네주니크 산(슬로베니아), 콜리나 언덕(토리노 언덕의 동쪽), 압시르티데스 군도(현 크로아티아 치레스 섬), 안테르셀바(오스트리아와 인접한 티롤 국경지대로 볼차노 북동쪽 산등성이 마을들)를 거쳐, 다시 트리에스테 산마르코 카페 인근 공원과 예수성심교회로 돌아오며 끝난다. 말하자면, 카페, 공원, 호수, 산, 마을, 교회 등 지상의 인간에게 삶을 영위하기 위한 근원적 장소가 되는 곳들을 여행지로 삼은 셈이다. 이 여정은 최소 원소로의 존재론적 귀환을 사유하게 한다. 작가가 몸을 내준 주어 없는 이 (괄호 쳐진) 여행자는, 세상이 처음 생겨난 때의 풍경을 답사하며 그려나가는 겹겹의 눈을 지닌 풍경화가 같다. 그러나 그 장소에 깃든 역사, 문화, 사람, 신화, 전설 등을 끌어내는 마그리스의 뛰어난 이야기 솜씨는 영락없이 근원에 대한 영원한 향수와 죽음을 노정한 유한한 생명의 멜랑콜리에 젖은 인문주의자의 붓질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문화사가로서의 박학다식한 면모와 애수 어린 현자의 아포리즘과 작가 특유의 시적 문장들이 인상파 화첩을 넘겨보듯 광대하고 풍성하게 펼쳐진다. '미크로코스모스'는 대개 대우주로서의 자연과 대응하는 소우주로서의 '인간'을 뜻한다. 그러나 작가는 제목을 복수형으로 씀으로써 단일 세계와 프랙털적인 사유로부터 벗어나, 남루하나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각자들이 뿜어내는 다채롭고 경이로운 존재의 빛들로 가득한 은하계를 [작은 우주들]에서 수놓았다.

* [작은 우주들]에 나오는 주연들 자막 일부

[발첼리나]- 러시아 전선으로 갔다가 실종된 아들이 혹시라도 살아 있지 않을까 고대하며 당나귀 모로랑 계곡을 돌고 돌며 늙어가는 말니시오 마을의 루벤, 파솔리니나 투롤도 말고도 여전히 세계와 역사로부터 물러나 자그마한 계곡 마을에 숨어 프리울리 사투리로 시를 쓰며 사는 베노 피뇬이나 로산나 파로니 베르토야 같은 무명작가들, 자신에게 청혼하지 않는 장군 때문에 애꿎은 혼수품만 계속 사들이다 집을 팔아버린 어느 늙은 여인, 환자가 없을 때면 짬짬이 일기를 녹음기에 대고 말하는 온화한 의사이자 은밀한 작가 온가로 등.

[석호들]- 조수와 비와 바람에 삭아가는 거룻배, 언제 발이 푹푹 빠지는 덫이 될지 모를 개펄 진흙과 조개껍질이 뒤엉킨 삶의 진창에서 피어난 생명, 이 그라도 석호를 닮은 시인 비아조 마린, 단지 썰물 때에만 솟았다 다시 물속에 잠기는 땅 벨마, 석호 사이사이 솟은 작은 섬들 위로 지어진 카소네라 불리는 간이 건축물과 이를 배경으로 마리아 칼라스가 주연한 [메데이아] 영화를 찍었던 파솔리니, 그 섬들에 살았다는 신화나 전설 속 유령이나 마녀들, 외골수처럼 수학이나 과학 연구에 몰두한 채 엄청난 격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소진시켰으나 불모의 천재로 살다간 외할아버지 프란체스코 데 그리소고노, 1918년 코토르 반란을 조직하고 이끌었으나 사흘 만에 실패한 혁명으로 볼셰비키로서의 측면은 지워지고 이탈리아 파시즘 치하에서 오스트리아에 저항한 인물로 세탁된 자기 이미지로 고뇌하는 스카라무차 등.

[콜리나]- 끝없이 잡다한 수다로 손님들한테 방 열쇠를 늦게 건네려드는 여관주 피에로, 이탈리아 내 자치적 성격을 강하게 띤 알프스 산자락의 보다 프랑스적이고 사보이아적인 피에몬테 지방의 특수한 어제와 오늘, 이탈리아의 근대성과 포스트모던을 일궈낸 사회변혁을 이끈 토리노가 지닌 리더십, 고베티와 그람시가 토리노의 언덕이라 불리는 한 구릉지대 마을에서 했던 운동들, 철학자이자 라틴학자이자 무엇보다 피에몬테 포도주를 좋아했던 삶을 즐길 줄 알았던 사람 좋고 재기발랄했던 돈 지로토 신부, 반교권주의가 심했던 피에몬테에서 1870년 자신에게 총을 쏜 자를 용서했으나 십 년이 지나 다시 총알 서른 발을 맞고 죽은 기구한 운명의 희생자 돈 페를로 신부 등.

추천사

"다뉴브가 하나의 단일한 세계로 가닿는 퍼즐을 재구성하도록 한다면, 작은 우주들은 조각난 세계의 편린들에 대한 사유로 이끈다."
-리베라시옹
"문화와 언어 사이에서 지칠 줄 모르는 불굴의 여행자, 빛나는 기억과 학식의 소유자, 마그리는 자기가 사는 도시에서 망각의 그루터기에 피어난 귀하디귀한 싹을 보는 자다. 이 찬란한 책에 누군들 물을 안 대겠는가."
-뤼마니테
"여행기와 자서전, 인상주의 화가의 화첩이 한데 어우러진 놀라운 조합."
-조너선 키츠, 리터러리 리뷰
"국경 지역을 떠돌며 펼쳐놓는 여행사진, 즉흥곡, 인상주의적 스케치, 짤막한 일화. 이 책은 문학의 국경이라는 비옥한 토양 위에 맺힌 탐스러운 열매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다뉴브에 이어 작은 우주들로 마그리스는 자기 자신을 갑절로 넘어섰다.
-디 차이트
"마그리스는 이 책으로 자신이 유럽 최고 반열의 에세이스트임을 증명해보였다."
-선데이 헤럴드
"겹겹이 쌓는 기술과 색색이 펼쳐지는 이야기, 기막힌 책이다."
-쥐트도이체 차이퉁

목차

산마르코 카페
발첼리나
석호들
스네주니크
콜리나
압시르티데스
안테르셀바
공원
둥근 천장

옮긴이의 말

본문중에서

사랑할 줄도 모르고 행복해할 줄도 모른다는 것, 시간을 불태워 당장 끝장내려는 격분을 누른 채 끝까지 시간과 순간순간을 살아낼 줄 모른다는 것, 아마 원죄란 이런 것이 아닐까. 설득으로도 안 되는 것, 미켈슈테터는 그렇게 표했다. 원죄는 죽음을 끌어들이고, 죽음은 삶을 소유하여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든 순간을 견딜 수 없게 만들어 삶의 시간을 파괴하며 질병이라도 되는 듯 빨리 지나가버리도록 다그친다. 시간을 죽인다는 것은 완화된 형식의 자살인 셈이다.
(/pp. 152~153)

스테파노는 지상의 소금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떠들썩하고 공포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덜 외롭다고 느꼈다. 그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자, 이제 많은 사람이 웃으며 살아가는 일이 더 어려워졌고, 매순간을 깊숙이 있는 그대로 향유하기도 힘들어졌다. 그는 여전히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놀고 있는 어린 성 루이지 곤차가에게 어느 경건하고 거만한 친척이 물었다지. '만약 네가 몇 분 뒤에 죽는다는 걸 알면, 넌 뭘 하겠니?' 아이가 답했다지. '계속 놀 거예요.'"
(/p. 162)

세월이 흐르면서 작별의 조총弔銃 소리는 점점 늘어갈 것이며, 일제히 울려퍼지는 북 소리에 그 소리가 새해 첫날을 위한 것인지 장례식을 위한 것인지도 더이상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쨌든 페체토에서는 공동묘지조차 밝고 잘 정돈되어 있으며, 그 무덤들이 "새로운 휴양객들과 이방인들의 선망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고 비토리오 베네데토 신부는 장담했다.
(/p. 171)

토리노 출신 독일어문학자라는 말은, 운명과도 같은 근대와 타협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요람이자 그 유토피아의 강점과 약점을 보여주는 이데올로기적이고 역사적인 무대였던 독일과 타협할 것을 뜻했다. 토마스 만이 말했듯, 횔덜린을 읽는 마르크스의 꿈, 말하자면 소외로부터 해방된 세상의 산문과 마음의 시 사이의 타협은 근대 독일 문학의 핵심이었고, 토리노의 문화는 그 꿈을 충분히 체험했다.
(/p. 178)

꼬치에 꿰어 돌아가는 어린 양 옆에서, 자기 배로 관광객들을 데리고 갔다가 라브 섬에서 돌아온 미로가, 벌써 오래전부터 해오던 이야기인데 매년 약간씩 다르게 바뀌곤 하는 이야기를 꺼낸다. 이차대전 중에 라브 섬의 캄포르 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독일군 장교들의 감독하에 로아타 장군이 지휘하는 이탈리아군이 세웠던 강제수용소가 있었는데, 그 고문자들 중 한 명이 휴양객 차림으로 돌아왔더라는 이야기다. 그 수용소에서 어린이를 비롯해 많은 슬라브인과 유대인이 죽었다. 매년 여름 라브 섬에서 누군가는?늘 대부분 독일인?관광객을 보고 예전 고문자들 중 하나가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옳다거니 틀리다거니 반박하다가, 얼마 후면 이 모든 잡담과 염탐도 허무 속으로 녹아든다. 시간은 메이크업 전문가이며, 윤곽과 표정을 조정하고 손질한다. 따라서 오랜 세월 뒤에는 손톱이 뽑힌 채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누군가를 위에서 바라보던 그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게 되고 만다. 게다가 살인자들은 대개 매우 평범한 모습이고 많은 사람과 비슷하다.
(/p. 212)

어느 날 한 경찰이 그를 풀어주었는데, 그더러 귀를 잘 열고 있으면서 누가 체제에 대해 불평하는지 자기들에게 보고하라고 했단다. "그런 것은, 제기랄, 나는 절대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풀려난다는 생각에...... 하지만 그는 해결책을 찾아냈다. 토요일마다 그는 몰래 경찰에게 갔고, 누가 욕을 했는지, 언제나 비가 온다는 둥 물고기가 별로 없다는 둥 누가 불평을 해댔는지, 누가 장모와 싸웠는지, 누가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말했는지 소상히 그들에게 이름을 알려주었다. 몇 주 동안 이런 고발만 해대자 경찰은 그 쓸모없는 정보원을 그냥 내버려두기에 이르렀고, 마르코는 늘 하던 어부 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p. 222)

로자리야는 루베니체에서 성직자가 상대적으로 많이, 세 명이나 나온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교회를 돌보고, 꽃병에 물을 갈아주고, 촛불을 켜는 일들에 만족해하고 있다. 그 위에까지 와본 일부 관광객이 크리스마스 때 규칙적으로 보내주는 엽서를 자랑할 때도 있다. 주름살투성이 얼굴로 장난꾸러기처럼 근시 눈가에 웃음을 지으며 날렵하게 움직이는 그녀는, 작고 가볍다. 삶의 어떤 중력도 그녀를 아래로 끌어당기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되면 한 번 훅 부는 바람에 깃털처럼 천국으로 갈 것이다.
(/p. 230~231)

한 젊은이의 발이 조개껍질을 밟고, 그 조개껍질은 부서진다. 날카로워진 파편에 발이 다친다. 생명의 피다. "사랑은 호두와 같아./ 깨뜨리지 않으면 맛볼 수 없어." 조개껍질이 바닷가에 부서진 채 펼쳐져 있다. 바닷물이 그 발의 흔적을 씻어 없애준다. 세월이 조수처럼 흐르고, 파편들은 둥글어지고, 또다른 맨발 아래서 곱게 부서져 사라진다.
(/p. 234)

코테초게임에서는 이기는 사람이 진다. 더 많은 카드를 얻고 더 많은 점수를 얻는 사람이 지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삶이랑 닮았다고 토니는 말한다. 삶은 종종
(아주 가벼워 보이지만 조만간 무거워져 당신을 아래로 끌어당기고 마는) 다이아몬드 에이스나 스페이드 킹처럼, 이런 매력적인 것까지 포함하여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더 많이 우리를 기만하기도 한다. 상대편이 게임에서 지게 하려고, 시공간곡률이나 하느님의 마음속에 있는 거미줄처럼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계산들과 개연성을 끊어나가면서 완승할 때처럼, 실제로 매번 이겨 모든 걸 거둬들일 일이 없는 한 말이다.
(/p. 239~240)

C는 공원을 안심할 만한 곳으로 만들고 꺾인 꽃을, 주위의 모든 그림자를 잊도록 해준다. "정말로 예쁜 빨간 물고기이구나." 물이 가득한 그릇을 들고 앞으로 지나가는 아이한테 호의를 보이며 이렇게 말하는 그는, 배를 거의 허공으로 향한 물고기나 아이의 얼굴에는 신경도 안 쓴다. "정말 예쁘네. 좋겠구나." 아이는 아무 말이 없다.
(/p. 299)

저녁 무렵이 되면 목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하늘은 깊고 검푸른 빛이고, 핏빛 송진 같은 석양이 나무 몸통을 따라 흘러내리다 까진 무릎에 맺힌 피처럼 나무허리 틈새에도 물든다. 지척에서 박쥐 한 마리가 날다가 산책로에서 흔들리고 있는 가로등 아래로 훅 지나가자, 순간적으로 그 그림자가 거대해져서는 얼굴 위로 밤처럼 커다란 날갯짓이 느껴진다. 밤은 드높아, 저 위를 바라보노라면 현기증이 난다. 세상은, 모든 감각을 다 잃을 때까지 반복되는 한 낱말이다.
(/p. 305)

트리에스테다운 것이란 활력과 우울이며, 모든 타협을 의식하고 있되 타협에 굴할 때라도 이것이 곧 타협임을 잊지 않고 거기에 이끌리지 않는, 순수함에 대한 향수다. 청소년기에 요구되는 진정한 삶을 위한 책무이자, 노년기에 지녀야 할 거짓 삶에 맞서는 의식이다. 이제는 술집에서 흥청망청하는 난봉밖에 안 남아 있으니 말이다.
(/p. 311)

저자소개

클라우디오 마그리스(Claudio Magris)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39.04.10~
출생지 트리에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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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4월 10일 트리에스테 출생. 2000년대부터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수차례 거론된 이탈리아 현대 작가이자 명망 있는 중부유럽 연구가. [현대 오스트리아 문학에 나타난 합스부르크가와 신화](1963)로 독문학 연구가로서 성공적인 첫발을 뗐고, [그곳에서 멀리. 요제프 로트와 히브리-동양 전통](1971)으로 중부유럽 문학에서 히브리 문학의 맥락을 재평가한 선구자로 주목받았다. 1970년에서 1978년까지 토리노 대학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있었고, 이후 트리에스테 대학에서 현대 독일문학을 강의하며 이탈리아 신문 [코리에레 델라 세라]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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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교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지도하에 화두(話頭)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기초교양교육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현대 기호학과 문화 분석], [신곡 읽기의 즐거움 - 저승에서 이승을 바라보다]가 있고, 옮긴 책으로 칼비노의 [마르코발도 혹은 도시의 사계절], [팔로마르], [우주만화], 단테의 [신곡]과 [향연],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 에코의 [거짓말의 전략], [이야기 속의 독자], [논문 잘 쓰는 방법], 모라비아의 [로마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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