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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푸틴 : 그는 과연 세상을 뒤흔든 요승인가

원제 : Raspu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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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라스푸틴]은 옛 이야기들에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라스푸틴의 허황된 삶, 논란 많은 인간관계, 불가사의한 죽음 뒤에 숨은 진실을 밝힌다. 저자 조지프 푸어만은 라스푸틴의 유년기에서 시작하여 농부와 설교자로 살았던 청년기를 거쳐, 십여 년간에 걸쳐 로마노프 왕가와 맺은 끈끈하고 친밀한 관계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베일에 싸였던 진실들을 낱낱이 추적하고 서술한다. 책은 라스푸틴을 둘러 싼 가십과 추문의 정체를 추적하여 그 진위를 밝히되, 비선실세 라스푸틴의 국정농단을 가능하게 했던 중요한 역사적 실체에 근접한다.

출판사 서평

1917년의 제정러시아와 2017년의 대한민국,
반복되는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만약 라스푸틴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훨씬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다!”
1917년의 제정러시아와 2017년의 대한민국, 반복되는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이 책은 라스푸틴 전기의 결정판이다. 옛 이야기들에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라스푸틴의 허황된 삶, 논란 많은 인간관계, 불가사의한 죽음 뒤에 숨은 진실을 밝힌다. 저자 조지프 푸어만은 라스푸틴의 유년기에서 시작하여 농부와 설교자로 살았던 청년기를 거쳐, 십여 년간에 걸쳐 로마노프 왕가와 맺은 끈끈하고 친밀한 관계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베일에 싸였던 진실들을 낱낱이 추적하고 서술한다.

라스푸틴의 신통력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정말 눈빛만으로 최면을 걸고 다른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었을까? 그는 혈우병에 걸린 황태자의 출혈을 마음대로 멎게 만들 수 있는 치유자였을까? 그는 황후 알렉산드라의 연인이었을까? 영국의 첩보원들이 라스푸틴의 암살 음모에 가담했을까? 이 책은 라스푸틴을 둘러 싼 가십과 추문의 정체를 추적하여 그 진위를 밝히되, 비선실세 라스푸틴의 국정농단을 가능하게 했던 중요한 역사적 실체에 근접한다.

역사의 진실이 여기에 있다. 라스푸틴의 초능력 보유 여부나 성적 일탈 따위가 아니라, 그는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의 소유자로서 제정러시아의 붕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라스푸틴이란 존재를 끊임없이 호출하고 부당한 권력을 위임했던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의 무능과 전횡이 있었다는 것이다. 제정러시아의 비극은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그 비극이 오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라스푸틴 vs. 최태민·최순실

2016년 10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세상에 드러난 직후, 「AFP」「워싱턴 포스트」「CNN」「가디언」 등의 주요 외신은 최순실을 일컬어 ‘한국의 라스푸틴’ 또는 ‘한국의 여자 라스푸틴’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그 이전, 2007년 미국 대사관의 외교 문서에서도 ‘한국의 라스푸틴’이 등장했었다. 당시 주한 미국 부대사였던 윌리엄 스탠튼이 한나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던 박근혜의 배후에 ‘한국의 라스푸틴’이었던 최태민이 있었다고 보고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정러시아 말기의 라스푸틴과 한국의 최태민·최순실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었을까? 이를 간단히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라스푸틴 전기의 결정판

전설에 따르면 라스푸틴은 제정러시아 말기 세상을 뒤흔든 요승으로, 술에 만취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헤매며 수십 명의 여성들과 정을 통했다고 한다. 그는 종교적 극단주의(religious extremism)의 상징으로 신통력을 갖고 있었고, 최면을 거는 듯한 눈에서는 광선을 내뿜었으며,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라스푸틴은 떠돌이 수도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정신도 말짱했다’는 팩트에도 불구하고, 라스푸틴에 관한 수많은 전승들은 온갖 루머와 거짓 주장을 퍼나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라스푸틴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라스푸틴은 제정러시아 말기의 난세를 상징하기도 하며, 최선과 최악이라는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표상하기도 한다. 라스푸틴의 전설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는 것 같다. 시베리아, 벤쿠버, 런던, 방콕에는 그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이 있고, 그의 얼굴이 그려진 맥주와 보드카 상표가 있다. 그에 관련 뮤지컬, 오페라, 카툰, 다큐멘터리가 수두룩하고 ‘시베리아 소농(小農) 라스푸틴’을 주제로 한 영화도 10여 편 만들어졌다.

라스푸틴의 흥망을 다룬 수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대부분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선정적인 측면을 과도하게 부각시켰다. 이 책의 저자 조지프 푸어만은 러시아 연구의 권위자로, 그가 1990년에 출판한 『라스푸틴: 하나의 삶(Rasputin: A Life)』은 지금껏 라스푸틴에 관한 최고의 책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푸어만은 구소련이 무너진 직후인 1991년부터 구소련의 서고에서 잠금 해제된 라스푸틴에 관한 기밀문서와 라스푸틴과 차르 니콜라이 2세·황후 알렉산드라가 주고받은 미공개 서신 등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 책 『라스푸틴 - 그는 과연 세상을 뒤흔든 요승인가(Rasputin: The Untold Story)』를 다시 펴냈다. 이 책은 라스푸틴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는 최고의 평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구도자에서 요승으로

라스푸틴은 숭고한 의도와 진정한 확신을 가진 구도자였으며, 루머와 전설의 영역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매혹적인 삶을 살았지만, 결국 탐욕·욕망·유혹의 화신으로 전락했다. 그는 총명하고 흡인력이 있으며 수많은 선행을 베풀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권력을 탐했고, 권력을 얻으려면 특권층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황후를 구워삶아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한 후, 나랏일에도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수상의 해임과 임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올랐다.

라스푸틴은 정치적 술수를 동원하여 세속 권력의 정점으로 승승장구하였다. 뇌물을 받기 시작하였고, 술과 섹스에 빠져들었으며, 우울과 탐욕과 방종에 젖어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영적 위기를 느끼며 영적 재능이 사라지고 있다고 느꼈고 최면술을 배우기도 했다. 그리고 점차 수많은 적들이 그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권력의 정점에서 몰락의 순간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사는 반복되고,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비극으로 점철된다

라스푸틴에게 권력을 위임한 것은 차르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였다. 러시아 황실은 라스푸틴을 신의 대리자이자 민중의 대변자로 여겼으며, 특히 알렉산드라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였다. 그 이유는 황실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알렉세이가 혈우병(hemophilia)을 앓고 있었는데, 라스푸틴이 기도하면 상태가 호전되었기 때문이다. 알렉세이의 주치의들은 라스푸틴을 경멸하면서도, 그가 황태자의 고통을 줄여주었다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주치의 표도로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알렉세이의 출혈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라스푸틴이 불쑥 나타나자 순식간에 출혈이 멈췄다.”

라스푸틴의 배후에는 제정러시아의 황실이 있었다.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무능했고, 황후 알렉산드라는 라스푸틴을 맹신했다. 제정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 측으로 참전하였다가 연거푸 패전했으며 백성들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정국은 불안하였고 교회는 완전한 혼란 상태였다. 차르의 권세는 급격히 쇠락했고 라스푸틴의 국정농단은 정점에 달했다. 이제 라스푸틴은 가장 막강한 권력인 동시에 가장 매도되고 경멸받았다.

1916년 12월, 라스푸틴은 유수포프와 드미트리 등에 의해 암살당한다. 그리고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폐위된 뒤, 이듬해 볼셰비키에 의해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 책은 제정러시아의 몰락 과정에서 라스푸틴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배후에는 최고 권력자의 무능이 있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라스푸틴을 둘러싼 역사의 진실이 여기에 있다. 제정러시아의 비극이, 2017년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도 낯설지 않다. 역사는 반복되고, 기억하지 않은 역사의 반복은 대개 비극으로 점철된다.

책속으로 추가

스톨리핀은 데듈린의 조사 결과를 기반으로 하여 조사 범위를 확대했다. 스톨리핀의 보고서는 오늘날 행방이 묘연하지만, 우리는 그가 색안경을 끼고 라스푸틴을 바라봤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비밀경찰의 행동과 태도는 그다지 비밀스럽지 않았다. 수사관들의 특이한 복장을 보고 낌새를 눈치챈 라스푸틴은 황제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황제는 스톨리핀을 불러, “며칠 후 라스푸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고할 때, 라스푸틴도 그 자리에 참석하게 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스톨리핀은 황태자가 혈우병 환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가 그 사실을 공개했다면, 세상 사람들은 라스푸틴이 알렉산드르 궁전을 빈번히 드나드는 이유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사람들은 그저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건 스톨리핀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니콜라이 2세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겸손한 농사꾼을 헐뜯느라 혈안이 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순진한 차르는 라스푸틴을 ‘신을 섬기는 자’이자 ‘민중을 대변하는 목소리’로 간주했으며, 사람들이 그를 그 이상으로 생각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차르는 ‘스톨리핀도 라스푸틴을 만나보기만 하면,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갖게 될 거야’라고 생각했다.
_6. 로마노프가의 어릿광대들, 112~113쪽

라스푸틴이 일리오도르라는 난적을 잘 처리하자, 니콜라이 2세는 또 다른 말썽쟁이 성직자, 헤르모겐 주교를 손봐달라고 부탁했다. 헤르모겐의 본명은 그리고리 달가노프로, 크림반도에서 대부호의 아들 로 태어났다. 법률을 공부하다가 포기하고 사제 겸 수도자가 되었으며, 1903년 사라토프의 주교로 부임했다. 헤르모겐은 총명하고 인상적인 인물로, 큰 키와 근육질 몸매, 텁텁한 턱수염의 소유자였다. 카스트라토(castrato)라는 특이한 고음을 구사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가 투철한 신앙심 때문에 스스로 거세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헤르모겐과 일리오도르는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또한 헤르모겐은 1905년 혁명 후 만들어진 두마를 가리켜, “정통신앙을 가진 러시아인들의 적으로서, 러시아를 파멸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도둑들과 강도들의 패거리”라고 혹평했다. 헤르모겐의 발언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좌익이 아니었던 게 분명한) 지방의 고위 성직자들까지도 편집자들이 그를 잘 다룰 수 있을 때까지 교구 신문의 발간을 금지했다.
_ 7. 경비대장의 비밀 보고서, 129쪽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편지는 1909년 2월 7일 알렉산드라가 라스푸틴에게 보낸 연서(戀書)였다. “사랑하는 당신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기뻐요. 범사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아무리 드려도 부족한 것 같아요.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당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드는 거예요. 당신은 우리의 전부예요. 선생님, 나를 용서해주세요. 내가 지금껏 죄를 지었고, 지금도 죄를 짓고 있다는 걸 잘 알아요. 그러니 인내심을 발휘하여 용서해주세요.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요. 나의 생각과 행동이 옳지 않다는 걸 알아요. 나는 훌륭한 사람,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아요. 그래서 가끔씩 나쁜 습관과 싸우기도 한답니다. 그러나 날 버리지 말고 도와주세요. 나는 연약해서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쉬워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믿어요. 당신을 곧 만날 수 있는 기쁨을 허락해주세요. 당신에게 따뜻한 키스를 보내요. 나를 축복하고 용서해주세요. 나는 당신 앞에서 한갓 어린아이에 불과하답니다.”
_ 9. 알렉산드라의 연서, 169~170쪽

그 후 이틀에 걸쳐 수백만 명의 백성들이 기도했지만, 알렉세이의 병세는 악화되었다. 10월 8일, 알렉산드라가 급히 휘갈겨 쓴 쪽지를 통해 종말이 다가왔음을 알렸을 때, 니콜라이는 내빈들과 점심을 먹고 있었다. 차르는 아들의 병석으로 달려와, 탈진한 황후와 함께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바실리예프 신부는 마지막 의식을 집전했고, 다음 날 아침 황태자의 사망 소식을 알릴 포고문이 이미 준비되었다. 상황은 매우 심각했지만, 알렉산드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라스푸틴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라스푸틴의 전보가 도착한 후에 벌어진 일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니콜라이의 일기장을 보면, 그날 오후 두 시쯤 알렉세이는 평온을 되찾으며 잠이 들었고 체온도 떨어졌다고 한다. 그 후 24시간 동안 알렉세이의 증세가 현저하게 호전되자, 의사들은 ‘니콜라이가 위기를 넘겼다’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백성들에게 발표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출혈은 멈췄고 부종도 가라앉았다. 그러자 스팔라에서 진행되던 ‘회복을 위한 기도회’는 ‘감사 기도회’로 바뀌었다. 차르는 사냥터로 갔고, 알렉산드라는 알렉세이의 회복을 축하하는 만찬을 열어 방문객들을 대접했다.
_ 10. 신에게 응답받은 기도, 177~179쪽

알렉산드라가 니콜라샤를 용서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 그가 라스푸틴을 미워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차르를 이렇게 세뇌시켰다. “니콜라샤는 우리 친구의 적이므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거예요. 그가 수행하는 작전은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고, 그가 제안하는 전략은 적군을 물리치는 데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을 거예요. 라스푸틴은 니콜라예비치 대공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반대했었어요. 라스푸틴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니콜라샤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늘 험담만 하고 있어요. 만약 우리가 라스푸틴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신이 우리의 약점과 죄악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라스푸틴은 차르의 감정에 부채질을 함으로써, 러시아 역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로 떠오를 기세였다. 알렉산드라가 급히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오라는 전보를 쳤을 때, 그는 시베리아에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차르의 허파에 바람을 넣는 데 라스푸틴의 도움이 필요했으며, 차르의 구상은 알렉산드라와 라스푸틴이 바라던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라스푸틴은 1915년 7월 31일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는 즉시 알렉산드르 궁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흘 후에는 니콜라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폐하의 직관과 황후의 조언을 따르십시오”라고 말했다. 차르가 결심을 굳히자, 라스푸틴은 8월 5일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로 향했다. 그는 (신하들의 말에 이끌려) 차르의 마음이 바뀔까 걱정되어 그 후 아흐레 동안 일곱 통의 전보를 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바위처럼 단단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에 하나 주저하신다면 백성과 병사들이 모두 죽을 것입니다.” “신이 은혜를 베풀어, 부정한 자들을 모두 물리칠 것입니다.” “승리는 결단력과 영적 강인함과 신앙에서 옵니다.” “폐하가 군 통수권을 장악하는 순간, 모든 전선에서 승리를 알리는 종이 울릴 것입니다.”
_ 14. 병권을 얻고 나라를 잃은 차르, 244~245쪽

차르는 알렉산드라의 편지를 읽다가, 라스푸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대충 건너뛰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온갖 정책과 구상을 보고하는 숱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의 달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방이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할 때 ‘점잖은 침묵’으로 거절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알렉산드라가 스타프카로 보내는 편지에 동 봉한 물건만큼은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예컨대 그녀는 포도주가 담긴 바이알(주사용 유리 용기)을 보냈는데, 그 포도주는 라스푸틴이 영명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니콜라이는 마데이라(Madeira)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알렉산드라의 주장에 의하면 그가 포도주를 잔에 부어 라스푸틴의 건강을 기원하며 마셨다고 한다. 한번은 (기름이 번드르한 라스푸틴의 머리칼이 치렁치렁 감겨 있는) 빗을 보냈는데, 알렉산드라의 말이 걸작이었다. “어려운 회의나 의사 결정을 하기 전에 이 빗을 사용하세요.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알렉산드라는 (물고기를 움켜쥐고 있는 새가 새겨진) 지팡이를 하나 보내며, “이건 라스푸틴이 축복의 표시로 보내는 거예요. 가끔 이걸 사용하면 좋을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_ 15. 제1차 트로이카, 260쪽

러시아는 격앙된 분위기에서 1916년을 맞이했다. 전쟁에서는 참혹한 손실을 입었고, 백성들은 식량과 연료 부족에 시달렸으며, 정국은 불안정했으며, 교회는 완전한 혼란 상태였다. 흐보스토프를 둘러싼 스캔들은 차르가 황후와 라스푸틴의 충고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보여준 사례였다. 그러나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라스푸틴의 전횡은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더욱 위세를 떨쳤다.
라스푸틴은 흐보스토프의 후임자를 물색하는 게 당연히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법무장관인 셰글로비토프가 수상 자리를 넘보고 있지만, 그는 사기꾼이라 안 되겠어. 저녁을 먹자며 접근하는 걸 보니 크리자노프스키도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는 협잡꾼이야. 심지어 벨레츠키도 수상 자리를 노리는데, 내가 지금까지 암살당하지 않은 걸 보면 그는 내 편인 게 분명해.” 라스푸틴은 보리스 튀르머에게 수상과 내무장관을 겸직시키는 걸로 낙착을 보았다. 차르도 라스푸틴의 의견에 동의하고, 그대로 실행했다.
_ 17. 장관들의 널뛰기, 297~298쪽

라스푸틴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1916년 가을 최고조에 달했다. 프랑스식 고급 레스토랑의 매니저 요셉 베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라스푸틴을 (동물의 시체를 파먹는) 콘도르에 비교하며, “그의 날개가 러시아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라스푸틴을 ‘러시아의 실질적 지배자’로 여겼고, 그를 향해 제기된 ‘반역자’라는 비난은 고스란히 황후에게도 해당되었다. 자유주의 정치가 파벨 밀류코프는 듀마에서 행한 연설에서, ‘러시아를 위협하는 어둠의 세력’을 강력히 비난했다. 밀류코프는 정부와 군의 부패 및 무능을 조목조목 열거하며, 핵심적인 부분이 나올 때마다 수사법을 동원하여 “이게 바보짓입니까, 아니면 반역입니까?”라고 물었다. 구르코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황실을 둘러싼 괴담은 혁명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라스푸틴의 영향력이 군주제의 원칙을 약화시킨다’는 소문의 효과가 모든 혁명과 폭동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력했다.”
_ 18. 제정러시아의 황혼녘에 드리워진 그늘, 318~319쪽

드미트리는 망을 보고, 다른 공모자들은 라스푸틴의 시체를 처리했다(운 좋게도, 다리를 지키는 보초병은 잠이 들어 있었다). 공모자들은 시체를 난간 위에 올려놓은 다음, 미리 봐뒀던 얼음 구멍을 겨냥하여 힘껏 던졌다. 잠시 후 첨벙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 것으로 보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 같았다. 그러나 푸리슈케비치는 “무거운 물건이나 체인을 이용하여 시체를 강바닥에 가라앉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며 곧 후회했다. 게다가 라스푸틴의 오버슈즈 하나가 다리 위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오버슈즈 한 짝을 난간 너머로 집어던졌지만, 하필이면 얼음 틈새로 떨어진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더욱이 나머지 한 짝은 승용차 바닥에 깔려 있었는데, 일시적으로 잊고 있었다. 시체가 강물에 실려 핀란드만까지 떠내려갈 거라고 확신한 공모자들은,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하며 승용차에 올라 모이카 궁전으로 되돌아왔다. 유수포프는 간밤에 겪었던 일로 신경쇠약과 탈진에다 히스테리 증상까지 겹쳐 침실로 직행했다. 다른 공모자들은 급히 작별 인사를 나누고 각자 헤어졌다. 때는 다음 날 아침 여섯 시였다.
_ 20. 모이카 궁전의 살인 사건, 349~350쪽

페트로그라드의 시민들은 ‘라스푸틴이 유수포프와 드미트리에게 암살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사람들은 일제히 국가를 부르고, 모르는 사람들끼리 거리에서 서로 얼싸안고, 가게에서는 암살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판매했다. 라스푸틴의 이름을 인쇄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신문들은 라스푸틴을 ‘고로호바야 거리에 사는 사람’이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증권거래뉴스」는 12월 17일 오후에 “그리고리 라스푸틴, 페트로그라드에서 사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냄으로써 언론 검열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기사의 내용은 짤막했지만, 편집진은 12포인트짜리 활자로 크게 뽑았다. “오늘 아침 여섯 시,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페트로그라드의 중심부에 있는 귀족의 대저택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한 후 급사했다.”
_ 21. 이상한 장례식, 354쪽

라스푸틴의 경력은 밝고 유쾌한 햇빛 속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게 가능했던 것은 그의 당초 의도가 선량하고 태도가 낙관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어둠 속에서 우울하고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라스푸틴은 총명하고 흡인력이 있으며 많은 선을 행한, 주목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탐욕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권력을 탐했고, ‘권력을 얻으려면 특권층(예: 카잔의 주교, 몬테네그로의 자매들, 니콜 라이와 알렉산드라)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황후를 구워삶아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한 후, 나랏일에도 관여하기 시작했다. 라스푸틴은 이윽고 수상의 해임과 임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역한 것이었기에,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차르는 제위에서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으니, 결국 라스푸틴이 죽을 수밖에. 라스푸틴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라스푸틴의 스토리와 그 결말을 모두 알게 된 사람이라면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게 당연할 것이다. “만약 라스푸틴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훨씬 더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다.”
_ 에필로그, 388쪽

목차

프롤로그
주요 등장인물, 장소, 용어

1. 아웃사이더
2. 구도자와 지도자
3.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
4. 새로운 라스푸틴
5. 교회의 반격
6. 로마노프가의 어릿광대
7. 경비대장의 비밀 보고서
8. 주교가 된 땅다람쥐
9. 알렉산드라의 연서
10. 신에게 응답받은 기도
11. 영적 위기
12. 라스푸틴의 엉덩이에 비수를 꽂은 여인
13. 모스크바에 매설된 지뢰
14. 병권을 얻고 나라를 잃은 차르
15. 제1차 트로이카
16. 사냥개의 발밑에 깔린 교회
17. 장관들의 널뛰기
18. 제정러시아의 황혼녘에 드리워진 그늘
19. 저격
20. 궁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21. 후폭풍
22. 실제로 라스푸틴을 죽인 사람은 누구인가?

에필로그
참고문헌

본문중에서

어쨌든 사람들이 시체를 놓고 이렇게 소란을 피운 것만 봐도, 라스푸틴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논란 많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를 둘러싼 의문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성자였을까, 아니면 악마였을까? 그의 이름 ‘라스푸틴’은 정말 ‘방탕하다’는 뜻의 형용사에서 유래한 것일까? 그는 ‘신을 섬기는 자’였을까, 아니면 단지 교활한 조작자(manipulator)에 불과했을까? 그는 정말 기도를 통해 사람들을 치유했을까? 그가 여성들을 사로잡은 비법은 뭘까? 그는 차르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을까? 그는 알렉산드라의 연인이었을까?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러시아 정부를 조종했을까? 독일의 스파이였을까? 그의 국정농단은 러시아혁명에 얼마나 기여했을까?
_ 프롤로그, 8쪽

라스푸틴의 묘한 눈망울과 특이한 연설법에는 힘이 있었다. 그는 연설하기 전에 사람들을 응시했는데, 특히 청중들의 얼굴에 날카롭고 불편한 시선을 던지는 게 특징이었다. 그의 말은 일관성이 없고 불확실하게 느껴졌다. 문장들은 혀끝에서 굴러떨어지듯 퍼져나가며 특이한 의식의 흐름을 형성했다. 그는 단편적인 생각들을 말했고 삶과 종교를 성찰하며 성적인 언급을 곁들였다. 그는 신경이 과민한 듯 사지를 비틀고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근처에 있는 사물을 더듬어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에게는 집중하라고 다그쳤다.
_ 1. 아웃사이더, 38~39쪽

라스푸틴은 자신이 1898년에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즉, 하루는 들판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는데, 성모 마리아가 하늘에 나타나 자기 주변을 맴돌며 날아다니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명령을 기다렸지만, 성모 마리아는 아무 말 없이 지평선을 가리키기만 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는 그에게 또다시 순례를 떠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것은 창작이었을까, 환각이었을까, 기적이었을까?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그 경험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그것은 이를 테면 제2의 회개, 즉 거듭남이었다. 그는 훗날 “어느 날 밤 방에서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그리고리, 나는 인간의 죄를 위해 울고 있단다. 가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거라’”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_ 2. 구도자와 지도자, 52쪽

황태자의 가정교사 중 한 명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알렉세이는 황실의 중심이며 희망과 애착의 촛불이었다. 그는 부모의 자랑거리이자 기쁨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곧 절망에 무릎을 꿇었다. 아들이 태어난 지 6주 후, 니콜라이는 이렇게 적었다. “알렉산드라와 나는 걱정이 매우 많다. 오늘 아침 젖먹이 알렉세이의 배꼽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간혹 멈추기도 했지만, 완전히 그치지 않고 저녁때까지 계속되었다.” 출혈은 3일째 되는 날에 멈췄지만, 차레비치(황태자)가 그 후 몇 달 동안 기어다니며 넘어지기를 반복하자 사지에 흉하고 시커먼 멍이 생겼다. 첫 번째 생일 직전에 유모차에서 굴러떨어졌을 때, 알렉세이는 유난히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의사의 진단 결과, 황태자는 혈우병(hemophilia) 환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_ 3.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 79~80쪽

두 번째 만남은 결과가 좋았던 게 분명하다. 1906년 10월 13일, 라스푸틴이 또다시 알렉산드르 궁전에 초대되었으니 말이다.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르는 '러시아인의 목소리'를 대변할 사람을 원했는데, 라스푸틴을 그런 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우리가 그토록 찾던 인물이 바로 라스푸틴’이라고 생각했으며, 라스푸틴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정도로 교활했다. 세 번째 만남은 라스푸틴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되었다. 차를 마시고 난 뒤, 라스푸틴은 네 명의 딸들(올가, 타티야나, 마리아, 아나스타샤)과 두 살짜리 아들 알렉세이를 소개받았다. 니콜라이 2세는 일기장에, “몸이 좋지 않아서 그랬는지, 내 아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라고 적었다.
마리아 라스푸틴은 “내 아버지가 알렉세이의 건강을 위해 처음으로 기도한 것은 1906년의 어느 날이었다”라고 했는데, 그날은 10월 13일일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3일 후, 황제가 스톨리핀 수상에게 이런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나와 황후는 그 농사꾼에게 큰 인상을 받았소.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예정되었던 5분을 훨씬 넘어 30분 이상 지속되었소.” 이어서 차르는 “나와 알렉산드라는 라스푸틴이 ‘기도를 통해 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임을 알게 되었소. 라스푸틴을 초청하여 나탈리야의 치료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해보시오”라고 권유했다.
_ 4. 새로운 라스푸틴, 85~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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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양병찬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직장 생활을 하다 진로를 바꿔 중앙대학교에서 약학을 공부했다. 약사로 활동하며 틈틈이 의약학과 생명과학 분야의 글을 번역했다. 지금은 생명과학 분야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포항공과대학교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바이오통신원으로, 《네이처》와 《사이언스》 등 해외 과학 저널에 실린 의학 및 생명과학 기사를 번역해 학계의 최신 동향을 소개하고 있다. 『아름다움의 진화』로 제60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그 밖에 옮긴 책으로 『유리우주』 『모든 것은 그 자리에』 『크레이지 호르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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