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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업

원제 : The Pick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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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실패는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새로운 출발점일 뿐이다!

[픽업]은 더글라스 케네디가 쓴 12편의 소설을 수록한 단편 모음집이며 작가의 예리하고 깊이 있는 시각과 뛰어난 감각을 가진 더듬이에 포착된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현대인들의 이상과 현실, 좌절과 고뇌, 성공과 실패를 다루고 있다. 지금껏 출간한 11편의 장편소설을 통해 생에 밀어닥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갈 것인지 진지하고 깊이 있게 모색해왔던 작가는 이 책에 수록된 12편의 단편소설을 통해서도 역시 이상과 꿈을 이루려다 암초를 만나 갈등하고 고뇌하는 인물들이 펼쳐가는 인생의 한 단면을 포착해 강렬하고 흥미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마치 그간 써온 장편소설을 압축시켜놓은 듯 보이는 내용과 문장이 특징이며 그간 써왔던 장편소설들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빠른 속도감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픽업]에 수록된 단편소설들은 인물들의 갈등이 첨예화되어 있는 상황을 집약적이고 세밀하게 보여주는 전개를 통해 현대인들의 고독, 비애, 슬픔, 좌절, 상실 따위를 절절하고 실감나게 담아내고 있다.

출판사 서평

[빅 픽처]작가 더글라스 케네디가 쓴 단편모음집!

[픽업]은 더글라스 케네디의 유일한 단편소설집이다. 그동안 11권의 장편소설을 출간하며 한국 독자들에게도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더글라스 케네디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단편소설이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된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은 롤러코스터를 타듯 속도감 넘치는 전개, 개성만점의 인물들, 강렬하고 매혹적인 스토리, 의표를 찌르는 반전으로 유명하다. 작가는 무려 200주 이상 국내 주요서점 베스트셀러에 등재되었던 [빅 픽처]로 명성을 떨친 바 있다. 그 후, 독일이 통일되기 전 페레스트로이카 시대를 배경으로 미국 출신 여행 작가와 동독 출신 여자 스파이의 감동적인 사랑과 이별을 그린[모멘트],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머니라도 팔아야 할 만큼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할리우드에서 무명작가 생활 10년 만에 시트콤이 빅 히트하며 일약 유명작가가 되지만 표절시비에 휘말리며 다시 추락해가는 방송 작가 이야기를 다룬 [템테이션], 샐러리맨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큰손들의 잔인하고 비열한 음모를 그린 [더 잡]등이 연이어 밀리언셀러에 오르며 화제의 중심에 오르내렸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은 이상과 꿈을 이루기 위한 비상을 갈망하지만 현실에 발이 묶여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는 현대인들의 고뇌를 담아내는 것으로도 유명하고, 특히 출산과 육아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들이 사회적 편견과 문화적 차이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며 고통 받는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내는 작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리빙 더 월드],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위험한 관계]등이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결혼과 더불어 갑자기 바뀐 삶의 환경과 임신과 출산으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는 동안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를 다룬 소설들이다.

우리는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려고 한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양한 칼라를 갖고 있고 저마다 강렬한 개성을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픽업]에 수록된 여러 단편의 등장인물들 역시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전 세계 50여 개국을 여행한 작가의 경험이 자양분이 된 듯 작품의 지리적 배경 또한 미국과 유럽 지역을 광범위하게 넘나든다. 단편소설이지만 더글라스 케네디의 트레이드마크인 스피디하고 흥미로운 전개, 예측불허의 반전,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긴장, 의표를 찌르는 결말은 여전하다. 이야기에 빠져드는 순간 다 읽지 않고는 벗어날 길 없는 중독성과 강렬한 흡인력도 여전히 발군이다.
더글라스 케네디는 여러 작품을 통해 타인-남편, 연인, 가족 포함-에 의존해 행복을 이루려는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야기해왔다. 타인에게 기대어 행복해지려고 하는 순간 충격에 대한 완충장치는 사라지게 된다. 그러하기에 꿈과 행복을 이루길 원한다면 독립적인 삶은 필연적인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픽업]에서도 역시 삶은 위기의 연속이며 비극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에 자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기대지 말고 혼자 굳건히 설 수 있을 만큼 지혜로운 시각과 깊이 있는 사고, 흔들리지 않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려 하기 때문에 평생을 함께 할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눈에 보이는 부분에 매료돼 이면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 [픽업]에 수록된 소설에서도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불행한 삶을 자초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고뇌와 슬픔을 엿볼 수 있다.
유령회사를 만들어 고객들을 등치지만 단 한 번도 법의 심판을 받지 않고 유유히 빠져나가던 프로 사기꾼이 미인계에 당해 피눈물을 흘리게 된 사연 -[픽업], 이혼한 남편은 왜 다이아반지를 되사려는 걸까? 고가의 다이아몬드 결혼반지를 두고 벌어지는 이혼 부부의 심리전 -[크리스마스 반지], 운명의 여자를 떠나보내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비로소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한 남자의 비애 -[여름 소나타], 잘 나가다 한 방에 훅 가는 변호사의 일탈! -[전화], 모든 질타를 수용할 수 있지만 그 질문만은 안 돼! -[당신 문제가 뭔지 알아?], 우리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냉전], 누군가 떠나고 없는 빈 자리는 다시 누군가로 채워진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고급 호텔 바에서 이상형 여자를 발견한 순간! - [가능성], 사랑하는 여자에게 분노조절장애가 있을 줄이야 -[실수] 등 모두가 개성 넘치고 흥미로운 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목차

픽업 THE PICK UP
크리스마스 반지 THE CHRISTMAS RING
여름 소나타 SONATA D’ETE
전화 THE CALL
당신 문제가 뭔지 알아? DO YOU KNOW WHAT YOUR PROBLEM IS?
냉전 A COLD WAR
그리고 그다음에는? AND THEN?
가능성 POSSIBILITIES
실수 A MISTAKE
괜찮겠지 HE’LL DO
도박 THE WRONG SIDE OF THE STRIP
각성 UP LATE

본문중에서

현재에 충실하고,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책임지며, ‘이 잔인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사람은 누구나 혼자다.’라는 사실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살아가는 게 내 방식이었다. 나를 떠난 아내는 언젠가 나에게 ‘윤리 나침반을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했었다. ‘횡령을 하든지 사기를 치든지 타인의 재산을 빼앗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종의 방법으로 횡령을 하고 사기를 치고 있을 뿐이었다. 적자생존의 세상, 아무리 친절을 베풀어도 고마워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어찌 보자면 주식시장의 큰손들도 근본적으로는 나와 다르지 않은 횡령이나 사기로 막대한 부를 끌어 모으고 있지 않은가? 정부의 행정 명령이나 법령은 사람들을 쉽게 통제하기 위해 만들었을 뿐 나를 위해 만든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왜 반드시 정부의 행정 명령과 법령이 정해놓은 절차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가?
(/ p.17)

두려움은 무력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감정이었다. 상대가 자기 자신보다 강하다고 판단될 때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있다. 한 번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할 경우 빠른 시일 내의 회복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 반면 분노는 상대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는 너무나 분하고 두려웠다. 내가 세상에서 평생 긁어모은 돈을 모두 빼앗겨 빈털터리가 되기 직전이었으므로 길길이 날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팔다리를 완강하게 묶고 있는 테이프를 끊어내겠다는 듯 심하게 몸부림을 쳤고, 고개를 심하게 가로저으며 어떡하든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테이프에 막힌 소리는 밖으로 시원스럽게 터져 나오지 않고 머릿속에서 뜨거운 열기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 p.65~66)

“그때 내가 준 반지 말이야.”
“반지가 왜?”
“최근에 다시 감정을 받아본 적 있어?”
“한 번 더 감정을 받았는데 값이 계속 오르고 있어. 감정가로 18만5천 달러래.”
“그야말로 땡잡았네.”
“그래, 땡잡았지.”
“그 반지를 팔래?”
“뭐?”
“혹시 반지를 처분할 생각이 있어?”
“누구에게 반지를 처분하라는 거야?”
“그 반지를 나에게 팔아.”
“도대체 왜?”
“그냥 그 반지를 사고 싶으니까.”
“도대체 왜 반지를 사고 싶은지 이유를 말해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그 여자에게 주려고?”
“그건 말할 수 없어. 다만 그 반지가 필요해.”
“왜 반지를 사려고 하는지 이유를 말해 달라니까.”
나는 듣지 않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했다. 토드는 나와 이혼하면서 재산을 흔쾌히 나누어주었다. 3백만 달러짜리 집도 주저 없이 넘겼다. 하지만 반지는 단순한 재산 개념이 아니라 사랑의 정표로 준 물건이었다. 토드는 나에게서 정표로 준 반지를 돌려받아야 비로소 관계가 완전히 청산되는 거라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토드는 늘 상대를 제압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고,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마무리되어야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 p.84~85)

앤은 나처럼 뉴욕 출신에 스무 살 동갑내기였다. 집행 사무실 건물에서 숙소까지 첼로를 메고 가는 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얼른 다가가 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물론 의도적인 접근이었다. 앤을 보는 순간 첫눈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호리호리한 몸매, 길고 풍성한 금발, 하얗고 투명한 피부의 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하늘하늘한 치마를 입고 커다란 첼로를 등에 메고 걸어가는 모습이 뉴잉글랜드의 아침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났다. 치마 아래로 드러난 긴 다리가 그렇게 매혹적일 수 없었고, 자수가 놓인 흰 셔츠도 맑은 피부와 완벽하게 잘 어울려 보였다.
나는 앤을 보자마자 생각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꿈꾸어왔던 보헤미안 여자야. 게다가 첼로 연주자라니, 그야말로 환상적이야.
(/ p.101~102)

연주가 끝났을 때에도 백 스테이지에 가서 앤에게 인사를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일에는 늘 겁쟁이였으니까.
과연 복을 스스로 차버리는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나밖에 없을까? 물론 나만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행복을 마다하고 결국 아무런 기쁨도 주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의 생은 미리 써놓은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니까.
행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힘든 일인가?
그 질문에 대해 나는 아무런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오래전 내가 스스로 떠나보낸 여자가 연주하는 브람스의 곡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깨달았다. 앤이 연주한 브람스의 곡에는 내 마음을 괴롭히는 깊은 슬픔이 녹아들어 있었다.
나는 돌아가는 즉시 가방을 싸 집을 나왔다.
(/ p.110~111)

일을 하는데 그런 사치품들이 왜 필요할까? 혹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두려움과 허무감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그런 두려움과 허무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세계도처를 오가며 사람들을 만나 협상하고, 밤새도록 서류를 붙잡고 씨름하는 일들이 사실은 그저 겉만 그럴싸하게 포장돼 있을 뿐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우리가 판매하는 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었고, ‘성공’이라는 글자는 웨하스처럼 쉽게 바스러질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과자는 맛이 없으면 언제라도 쉽게 버려질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두렵고 허무할 수밖에…….
(/ p.136)

나는 리처드를 만나기 전 세 번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상대를 만나 연애에 실패했다. 세 번의 실패를 겪는 동안 극심한 좌절과 고통을 겪었기에 더는 사랑을 믿지 않게 되었다. 바로 그때 리처드를 만났고, 그를 무조건 믿고 싶었다. 머릿속에서 계속 조심하라는 속삭임이 들려왔지만 리처드에게 끌리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리처드는 대화를 나눌 때 설명을 덧붙였다. 갈등 상황이 빚어지면 길게 토론을 해서라도 단시간 내에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나는 리처드의 적극성을 높이 샀다. 그렇다고 내가 리처드를 붙잡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우리는 고칠 수 있어.”
평소 리처드가 즐겨 쓰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그때 나는 30대 막바지였고, 시간이 갈수록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상실하게 될까 봐 초조했다.
당신 문제가 뭔지 알아?
(/ p.168~169)

그 아이도 내 간절한 마음을 알았을까?
여자아이가 버스에 오르기 전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 아이의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여자아이는 금세 고개를 돌리고 버스와 함께 사라졌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도 그때 그 장면이 오래된 기억의 창고를 벗어나 생생하게 떠오를 때가 많았다. 얼굴에 살짝 번져 있던 미소 그리고 이내 고개를 돌리던 모습……. 그때 그 여자아이가 남긴 짧지만 강렬한 인상이 미래에 전개될 내 연애에 대한 예언의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일찍이 얻은, 사랑의 현혹에 대한 교훈.
여자아이가 버스와 함께 사라지고 나서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저 아저씨와 아는 사이예요?”
“저 개자식은 오늘 처음 봤어. 네가 탈 버스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버지가 화를 낼 때마다 내 어깨는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처럼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아버지가 움츠러든 내 어깨를 보았다.
“남자는 서 있을 때 어깨를 쭉 펴야 한다고 했잖아. 이제 좋아하는 여자아이도 생겼으니 어깨를 더욱 당당하게 펴고 다녀야지.”
(/ p.182~183)

50세가 넘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유전자의 룰렛 게임이다. 그 나이가 되면 누구나 우리의 몸이 벌이는 룰렛 게임의 인질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삶에는 왜 불행이 만연할까? 우리의 삶이 불확실하기 때문일까? 인생이 절망과 실패로 점철되어갈 때 우리는 왜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지 않는가?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아온 사람이 과연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한 순간이 지나갈 때까지 세면대를 계속 붙잡고 서 있었다. 그 다음, 세수를 하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레베카가 앉아 있던 테라스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웨이터가 내가 테이블에 놓아둔 20유로에서 계산하고 남은 거스름돈을 레베카가 남긴 쪽지와 함께 내밀었다.
(/ p.211)

이봐, 너에게 온갖 의무를 받아들이라고 협박하며 머리에 총을 겨눈 사람은 없잖아. 누가 너에게 제니와 결혼하라고 강요하기라도 했어? 공허하기 그지없는 교외 주택가에 집을 사라고 강요한 사람이라도 있어?
우리는 주어진 삶이 못마땅하다며 늘 발을 동동 구르고 비명을 지르지만 사실 모든 게 자업자득일 뿐이었다.
‘당신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다름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이야.’
잔에 든 얼음이 서서히 녹아들고 있었고, 내 마음도 따라서 녹고 있었다. 내 바로 앞 테이블에 함께 달아나고 싶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서른다섯 살쯤 된 나이에 쇼트커트로 자른 검은 머리, 세련된 검정색 슈트를 입고 있는 여자였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 날씬한 몸매,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인상도 매력적이었다. 손에 결혼반지를 끼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싱글이 분명했다. 내 주관적인 해석일 뿐이었지만 남자가 대시해주길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혼자 앉아 있는 여자의 테이블에는 화이트 와인이 한 잔 놓여 있었다. 여자는 혼자 시간을 보내기에 적당한 휴대폰이나 노트북컴퓨터도 없었고, 장식 없는 검정색 수첩에 만년필로 뭔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 p.222)

나는 왜 이미 오래 전에 진실을 목도하고도 애써 외면하려 했을까?
나는 그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사랑을 갈구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갈구하던 사랑을 지트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지트도 나처럼 사랑을 갈구했었다. 비록 지트의 공격적인 성향이 우리의 사랑이 지속되는 걸 방해했지만 그녀는 나를 사랑했고, 내가 사랑해주길 바랐다.
결국 실패로 끝난 우리의 사랑에 대해 지트만 탓할 수는 없었다. 나에게도 큰 잘못이 있었다.
처음부터 지트는 나에게 경고하지 않았던가?
“나에게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성향이 있어.”
지트가 스스로 진실을 밝혔지만 나는 그 말을 애써 외면했다. 결국 나 자신을 속인 사람은 지트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지트가 화장을 마쳤다. 거울에 비추어져 있던 분노의 얼굴은 거실을 향해 걸어오는 동안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는 얼굴로 바뀌었다.
(/ p.276)

“하긴 뭐 영원히 괜찮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사람은 누구나 변하게 마련이지.”
어머니는 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아버지와 함께한 결혼생활이 못마땅했다는 사실을 은근히 말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나에게 ‘네가 데렉에게 바라는 걸 반드시 얻어내야 해. 데릭이 널 영원히 사랑해주길 기대하는 건 무모한 짓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어머니의 말은 마치 빅토리아시대 여성의 관점을 대변하는 듯했다. 결혼을 사랑의 결실이나 평생의 약속으로 여기기보다는 사회적 계약으로 보려는 관점이었다. 데렉과 나의 결혼이 ‘더 이상 허비하다가는 아이를 못 낳을 수도 있다.’는 조바심 때문에 급히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나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출산이 불가능해지는 나이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조바심치게 만들었다. 당장 결정하지 않으면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결혼을 서두르게 된 이유라는 건 변명의 여지없는 사실이었다.
(/ p.286~287)

연주가 끝났을 때에도 백 스테이지에 가서 앤에게 인사를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일에는 늘 겁쟁이였으니까.
과연 복을 스스로 차버리는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나밖에 없을까? 물론 나만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행복을 마다하고 결국 아무런 기쁨도 주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의 생은 미리 써놓은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니까.
행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힘든 일인가?
그 질문에 대해 나는 아무런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오래전 내가 스스로 떠나보낸 여자가 연주하는 브람스의 곡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깨달았다. 앤이 연주한 브람스의 곡에는 내 마음을 괴롭히는 깊은 슬픔이 녹아들어 있었다.
나는 돌아가는 즉시 가방을 싸 집을 나왔다.
(/ p.110~111)

저자소개

더글라스 케네디(Douglas Kennedy)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55~
출생지 미국 뉴욕 맨해튼
출간도서 42종
판매수 148,452권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고 현재는 런던, 파리, 베를린, 몰타 섬을 오가며 살고 있다. 조국인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작가로 유명하며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한다. 프랑스문화원으로부터 문화공로훈장을 받았고, 2009년에는 프랑스의 [르 피가로]지에서 주는 그랑프리상을 받았다. 한때 극단을 운영하며 직접 희곡을 쓰기도 했고, 이야기체의 여행 책자를 쓰다가 소설 집필을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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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이매진》 수석기자, 《야후 스타일》 편집장, 《TTL 매거진》 편집 주간을 지냈으며, 현재 번역가와 자유 기고가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소울푸드』(공저), 『시대의 애인: 우리가 사랑한 50인』(공저) 등이 있고, 참여한 책으로 『여섯 빛깔 무지개』, 『타자 종로3가/종로3가 타자』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정키』, 『텔레니』, 『싱글맨』, 『독거미』, 『빅 픽처』, 『가위 들고 달리기』,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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