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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안에서 :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양장]

원제 : Dentro le mura. Cinque storie ferrare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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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 조르조 바사니의 소설집

이탈리아 북부 도시 페라라를 무대로 한 다섯 단편을 모은 소설집. 20세기 전반기 파시즘 치하에서 살아가는 페라라의 유대인과 그 주변 인물의 일상과 내면 풍경이 정교하게 그려진다. 유대인 청년에게 버림받고 홀어머니와 사는 가난한 젊은 미혼모 모녀 그리고 그들 곁의 한 남자를 다룬 [리다 만토바니], 유대인 청년 의학도 엘리아 코르코스와 서민층 간호원 처녀 젬마 브론디의 신분을 초월한 결혼을 그린 [저녁 먹기 전의 산책], 독일 나치 강제수용소에 잡혀갔다 돌아온 유대인 생존자 제오 요즈의 기이한 저항과 종전 후 재건을 꿈꾸는 시민들의 허위와 기만을 보여주는 명작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 사회주의자 여성의 불굴의 생애와 고독, 방관자의 삶을 산 브루노 라테스의 짙은 회한을 그린 [클렐리아 트로티의 말년], 무솔리니의 살로공화국이 단말마적 광태를 보이던 파시즘 말기 페라라를 뒤흔든 실제 학살 사건을 소재로, 학살을 목격하게 된 하반신 마비의 약사 피노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안나의 이야기를 다룬 [1943년 어느 날 밤] 등이 수록되어 있다.

출판사 서평

시간은 우리 모두를 뚫고 지나갔어!

광란의 오를란도를 노래한 중세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페라라를
'조르조 바사니의 페라라'로 바꾼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

작가 바사니의 탄생을 알린 첫 소설집


인간 존재양식의 죽지 않는 비극성을 뿜어내는 강력한 보편주의.
-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 시인, 작가, 영화감독

★ 1956년 스트레가 상 수상.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소설집).
★ 1955년 스위스 샤를베용 상 수상. [클렐리아 트로티의 말년](단편).
★ 1960년 플로레스타노 반치니 감독이 영화화. [1943년 어느 날 밤](단편).

'기억의 작가'로, '페라라를 영원의 도시로 만든 작가'로 불리는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 조르조 바사니(Giorgio Bassani, 1916~2000)의 [성벽 안에서―페라라의 다섯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성벽 안에서 -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편소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이탈로 칼비노와 W. G. 제발트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극찬을 받은 바 있는 [금테 안경]과 더불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조르조 바사니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다. 특히 바사니의 섬세한 문체와 정교한 구성을 맛볼 수 있게 작가의 개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다섯 편의 뛰어난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바사니는 1956년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출간한 이 소설집으로 그해 이탈리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스트레가 상을 받음으로써 입지를 단단히 다진다.

[성벽 안에서 -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는 부제에 나타난 대로 이탈리아 북부 페라라를 배경으로 한 다섯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소설집을 읽기 위해서는 먼저 페라라에 관한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는 이곳이 중세 르네상스를 꽃피운 데스테 가문의 본거지였고, 장편 서사시 [광란의 오를란도]를 노래한 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고향이기도 했던 문화적 도시라는 사실이다. 또하나 르네상스 이후 페라라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20세기 초 파시즘의 열풍이 불면서라는 점이다.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된 1922년 파시스트의 로마진군을 주도한 세 사람 중 하나인 이탈로 발로가 페라라 출신이었다. 이는 이탈리아 북부의 파시즘이 창궐했던 여러 곳 중에서 페라라가 차지하는 악명 높은 위상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소설집은 이런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진가를 맛볼 수 있다. 특히 작가가 처했던 특수한 상황 또한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요소다. 작가는 페라라의 부유하고 유서 깊은 유대인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다. 과거 사보이아 왕가에서는 유대인들을 우대하고 보호하는 정책을 폈고 따라서 이들 유대인은 자신이 무엇보다 이탈리아인임을 의심하지 않고 나름의 삶을 영위해왔다. 그러나 1938년 인종법이 공포된 이후 페라라 유대인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바뀐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며 분리와 배제, 소외와 핍박의 싸늘한 시선에 늘 노출되는 신세가 된다.

이 소설집의 원래 제목은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였다. 하지만 1973년 '성벽 안에서'로 제목을 바꾸었고 이후 1974년 [페라라 소설]이라는 연작을 출간하면서 '성벽 안에서'라는 제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목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이 소설집에는 페라라에서 삶을 영위한 다양한 사람들의 여러 가지 삶이 이야기된다. 앞서 말한 대로 사건의 무대인 페라라는 다른 여러 고장들이 나름의 역사성과 사연을 지닌 것처럼, 이곳도 그 나름의 역사성과 사연을 지녔다. 다섯 편 모두 저자의 시점은 대체로 종전 이후에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을 띤다. 그러면서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역사의 격동기인 1938년 이후의 페라라, 그리고 1943년 12월의 페라라를 집중 조명한다. 또하나 흥미로운 특성은 각 단편에 등장했던 인물이 이후 다른 소설에도 그대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파시스트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검은셔츠단의 행동대원 카를로 아레투시, 일명 '시아구라'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네번째 단편소설 [클렐리아 트로티의 말년]에 잠깐 등장한 악한의 상징 시아구라는 마지막 단편 [1943년 어느 날 밤]에서는 보다 자세히,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또한 훗날 명망 높은 정치가가 되는 보테키아리도 계속해서 여러 단편에 등장한다. 이들은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이나 [금테 안경] 같은 다른 작품에서도 계속 교차해서 등장함으로써 각각의 작품들을 하나로 아우르며 연작 [페라라 소설]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물론 다른 작품에서는 필요한 만큼만 노출된다. 따라서 이 소설집은 전체 연작의 어떤 시발점, 훗날의 어떤 사건들이 있기 이전, 각 인물들이 간직했던 숨겨진 전사前史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럼, 아래에 각 단편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리다 만토바니]의 제목은 주인공 여인의 이름을 그대로 빌려온 것이다. 리다 만토바니는 미혼모의 딸로 성장한 가난한 처녀다. 그녀는 부유한 유대인 청년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와의 사이에서 아기 하나를 낳은 뒤 버림받는다. 미혼모였던 어머니 처지가 고스란히 거울처럼 대물림된다. 그러나 이 사슬을 끊어줄 누군가가 나타난다. 이웃의 제본소 주인 오레스테 베네티가 이 모녀를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충실한 베네티는 마침내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결혼의 의미가 각자에게 서로 달랐음이 나중에야 밝혀진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페라라 전통사회에 기층민들이 어떻게 결합하는가를 통해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차분히 되묻는다.

[저녁 먹기 전의 산책] 또한 남녀 간의 결합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유대인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첫 소설과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른바 메잘리앙스(낮은 신분과 높은 신분 간의 결합을 이르는 프랑스어)가 주요 모티프다. 부유한 유대인 의사 엘리아 코르코스와 서민 출신의 간호사 젬마 브론디 부부,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사랑을 오랫동안 남몰래 간직했던 아우실리아 브론디의 이야기가 중층적으로 겹쳐진다. 이 작품은 특히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특별할 것 없는 낡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과거로, 그 먼 역사 속의 공간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현재로 빠져나온다. 마치 카메라의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바사니가 시각예술로부터 큰 영감을 받았고 실제 영화에도 지속적으로 관여했음을 확인시켜주는 묘사가 작품 전반에 가득하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인종법 이후 유대인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소외의 도립상을 과거 페라라의 신분제 사회에서 찾는다. 낮은 신분, 가난한 계층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소외가 어떤 방식으로 페라라에 겹쳐져 있는지를 말이다.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은 그야말로 역설이 가득한 뛰어난 작품으로 이 소설집의 백미라 할 수 있다. 1938년 이후 독일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던 이탈리아 유대인 백팔십삼 명 중 유일하게 살아돌아온 젊은이 제오 요즈의 이야기다. 이 소설 또한 첫 도입부가 대단히 인상적이다. 페라라 마치니 거리에 있는 시나고그, 즉 유대교 회당에 한 미장이가 명판을 붙이고 있다. 회당 입구 이 미터 높이에 붙게 될 그 명판은 나치 독일 절멸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는 추모 명판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한 뚱뚱한 남자 하나가 명판 속에 명단 중 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고, 자신은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다면서 그 작업을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죽음의 수용소에서 페라라로 살아돌아온 제오 요즈는 한동안 시민들로부터 환대를 받는다. 하지만 그 환대는 오래가지 않는다. 재건을 꿈꾸는 페라라 사회에서 유대인은 망각되어야 할 존재였다. 이 소설은 늙은 파시스트 스코카 백작의 뺨을 후려갈긴 요즈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왜 수용소에서 입던 옷을 입고 나타나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뚱뚱하던 몸이 갑자기 왜 비쩍 마르게 됐는지, 그리고 마침내 그가 왜 페라라의 시민들 사이에서 다시 사라져야 했는지를 진지하게 되묻는다.

[클렐리아 트로티의 말년]은 유서 깊고 아름다운 체르토사 수도원 옆 페라라 시립 공동묘지에 묻힌 어느 사회주의자 여인의 삶과 투쟁을 되짚어보고 자신을 냉정히 돌아보는 일종의 회고담이다. 클렐리아 트로티와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맺었던 유대인 젊은이 브루노 라테스가 수년 전의 일들을 가만히 떠올린다. 인종법이 발효된 이후인 1939년 그녀를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그녀와 같은 사회주의자였으나 이제는 정치가로 성공을 꿈꾸는 변호사 보테키아리, 파시스트 비밀경찰의 감시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는 산타마리아인바도 광장 교회 옆에서 공방을 하는 구두장이 로비가티, 그리고 폰도반케토 거리 36번지 은둔지의 집 주인 코데카 부인과 그 남편 등을 만난다. 이 소설은 20세기 초 일차대전 때부터 이차대전 말기 이탈리아의 사상적 갈등과 변화를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격조 있게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유복한 유대인 브루노는 사회주의자의 열정과 이상에 공감하지만 삶을 온전히 던지진 못한다. 사회적 약자들, 특히 나이든 퇴락한 여성 혁명가 트로티에게 큰 동감을 느끼면서도 본질적인 자신의 어떤 속성, 돌이킬 수 없는 냉정함, 차별의식을 부정하지 못한다. 비겁한 자신에게 트로티는 거울 같은 존재였지만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이상과 같은 존재였음을 천천히 깨닫게 된다.

[1943년 어느 날 밤]은 페라라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각색하여 반치니 감독에 의해 1960년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소설은 1943년 12월 15일 밤 페라라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학살을 다룬다. 유대인 출신으로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약국을 상속받은 약사이자 누구나 흠모할 만한 미모를 지닌 여성 안나 레페토와 결혼한 피노 바릴라리가 주인공이다. 결혼 후 얼마 안 돼 하반신 마비가 된 피노는 사건이 있기 수년 전인 1939년부터 약국 건물 꼭대기층 창가에서 쌍안경으로 로마 거리를 관찰하는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1943년경 이탈리아 반도는 연합군 세력에 의해 해방된 남부와 나치 독일의 꼭두각시 정권인 살로공화국이 수립된 북부로 양분되었고, 당연히 북부 페라라는 이른바 형제살해 싸움의 소용돌이, 동족상잔의 비극 한복판에 있게 된다. 1943년 9월 나치와 무솔리니에 맞서서 여러 정당이 연합한 민족해방위원회 같은 거대 레지스탕스 단체가 조직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볼로냐 지부에서 파시스트당 재건을 위해 페라라 지부로 파견됐던 볼로녜시 대령이 암살된다. 이를 계기로 1943년 12월 15일 밤, 데스테 성 맞은편 델라보르사 카페 길 건너편에서 파시스트 행동대 검은셔츠단이 시민 열한 명에게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는 사건이 빚어진다. 남편이 하반신 마비가 된 뒤로 외간남자를 만나곤 했던 안나 레페토는 그날 밤 다른 데서 귀가하다가 우연히 학살을 목격한다. 시체 더미를 본 순간 약국 건물 위를 봤을 때 남편과 눈이 마주친다. 혼돈의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 학살자(그중에서도 특히 사건의 주모자인 시아구라)를 기소해 재판이 진행된다. 피노는 주요 목격자로 법정에 선다. 하지만 그의 증언은 오직 한마디의 말뿐이었다. "자고 있었어요." 정말일까? 그 순간 사람들은 시아구라가 던진 은밀한 공모의 눈짓이 피노를 향하는 것을 보았다고 느낀다. 초기 파시즘에 많은 유대인이 동조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피노 또한 십대 시절 로마진군에 동참했던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건 전체를 덮어버린 그 증언에 정당성을 줄 수 있는 걸까? 그는 어째서 그런 증언을 했던 걸까?

목차

리다 만토바니
저녁 먹기 전의 산책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
클렐리아 트로디의 말년
1943년 어느 날 밤

옮긴이의 말
조르조 바사니 연보
추천의 말_안젤로 조에
조르조 바사니 [페라라 소설]을 펴내며_김운찬
페라라 지도

본문중에서

어리둥절한 리다는 쏘아보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그렇게 서둘러요? 그녀는 물었다. 왜 그렇게 변했어요?
그는 머뭇거렸다. 절망의 눈,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결승점 앞에서 꼬꾸라져버리는 경주마 같아."
('리다 만토바니' 중에서 / p.59)

게다가 아직까지 그녀는 페라라에서, 특히 아름다운 봄날, 저녁 먹기 직전 조베카 대로를 걸어오면서 근엄하고 비딱하게 모자를 들어 인사하며 습관적으로 좌우를 경계하던 엘리아 코르코스의, 느닷없고 불가피한 어떤 호기심의 반영도 어떤 긴장된 탐색도 가로막던 그 공손함의 장벽을 뚫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던 유일한 사람 아니던가?
('저녁 먹기 전의 산책' 중에서 / p.59)

맞군요!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추모 명판을 다시 만들어야 할 텐데, 저기에 헌정된 이름, 저 한구석을 차지한 제오 요즈가 다름아닌 '나'거든요, 하면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 중에서 / pp.111~112)

홍수로 인해 방대하게 인근 들판에 범람했던 큰 강과 마찬가지로, 세상은 이제 자신의 강바닥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것이 요점이었다.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 중에서 / p.150)

그 가혹했던 마지막 삼 년의 초기에 브루노의 부모는 달아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해 가짜 서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독일인들에게 끌려갔고, 둘의 이름은 지금 유대인 공동체가 마치니 거리의 성전 앞에 붙여놓은 추모 명판에 새겨져 있다. 이백 명에 달하는 다른 유대인들의 이름과 함께. 그렇다면 그는? 브루노는 반대로 페라라에서 달아났다. 제때 달아났기에 자기 부모와 똑같은 운명을 겪지 않았고, 살로공화국의 파시스트들에게 그해 12월에 총살당하지도 않았다.
('클렐리아 트로티의 말년' 중에서 / p.170)

외로움과 집중, 자기 자신 말고는 달리 친구가 없다는 점은 은혜로운 일이지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자신의 성향에 맞서 싸우는 것, 그리고 때로는 거기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은 감방의 네 벽 사이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지요. 1930년 감옥에서 나올 때, 나는 내 36호실을(우연의 일치지요? 내 동생의 집 번지와 똑같아요) 정말 우울한 마음으로 떠났어요. 마치 나 자신의 일부를 거기에 버려둔 것처럼 말이에요.
('클렐리아 트로티의 말년' 중에서 / p.213)

누가 페라라에서 1943년 12월 15일 밤을 잊을 수 있을까? 누가 그날의 그 긴 밤을 잊을까? 모두에게 끝없는 고통을 선사한 그 밤을, 덧창문 틈새로 눈에 불을 켜고 캄캄한 어둠에 잠긴 거리를 유심히 살피면서, 정적을 깨는 기관총 소리에, 무장한 이들을 태운 트럭이 황급히 지나는 요란한 소리에, 번번이 심장이 터질 듯 두근대던 그 밤을.
('1943년 어느 날 밤' 중에서 / p.237)

하지만 검은셔츠단 대원은 저 유리창 너머에서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 피노 바릴라리, 그 사람의 윤곽이 비친 창문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저 위의 저 신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맹세코 정말 머리가 빈 사람인지, 어떤 위협이나 협박, 어떤 기관총 사격을 가해도 단 일 밀리미터도 움직이게 하지 못했거든요.
('1943년 어느 날 밤' 중에서 / p.247)

그는 재판장의 질문에 또박또박 또렷한 발음으로 단 한마디의 말만 증언했다. "자고 있었어요." 그 말은 공기로 부풀어오른 부레를 바늘 끝으로 콕 찌른 것처럼 법정에 가득한 숨막히는 긴장을 허무하게 해결해버렸고(그의 얼굴을 살피느라 불안하게 몸을 숙인 아내는 물론, 누구 하나 숨도 못 쉴 만큼, 아주 깊은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상당수의 사람들은 시아구라가 찡긋, 피노 바릴라리에게 재빠른 화해의 인사를 건네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눈짓, 거의 감지할 수 없는 공모의 눈짓이었다.
('1943년 어느 날 밤' 중에서 / p.259)

저자소개

조르조 바사니(Giorgio Bassani)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16~2000
출생지 이탈리아 볼로냐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1916년 3월 4일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태어난다. 부유한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유년기와 청년기를 페라라에서 보낸다. 1934년 볼로냐 대학 문학부에 입학해 미술사가 로베르토 론기에게서 수학한다. 대표적인 반파시즘 지식인 베네데토 크로체의 글에 심취해 있던 대학 시절, 페라라의 일간지 [코리에레 파다노]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1938년 반유대주의적 인종법이 선포될 무렵부터 반파시즘 활동에 참여하다 1943년 체포되어 구금된다. 무솔리니가 실각하면서 풀려난 뒤 로마에 정착한다. 이차대전 후에는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나가는 동시에, 당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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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교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지도하에 화두(話頭)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기초교양교육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현대 기호학과 문화 분석], [신곡 읽기의 즐거움 - 저승에서 이승을 바라보다]가 있고, 옮긴 책으로 칼비노의 [마르코발도 혹은 도시의 사계절], [팔로마르], [우주만화], 단테의 [신곡]과 [향연],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 에코의 [거짓말의 전략], [이야기 속의 독자], [논문 잘 쓰는 방법], 모라비아의 [로마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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