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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체파리의 비법 : 팁트리 주니어 걸작선

원제 : Her Smoke Rose Up Forever
소득공제

2013년 9월 9일 이후 누적수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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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빨도 없는 종족’ 여성들을 위하여 적당한 시간에 도착한 SF적 상상력

활동할 당시 ‘페미니즘 SF’의 기수로 인정받았고 사후에는 ‘팁트리 상’으로 기림받는 작가인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주요 작품들을 담은 중단편선집이다. 팁트리의 작품이 단행본으로 묶여나오는 것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체체파리 비법]을 표제작으로 하여 7개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펄프 픽션의 외형을 취하면서도 성(젠더), 자아, 환경, 인간성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주는 팁트리의 세계로 빠져보자.

지금이야말로 팁트리를 읽어야 할 때다!

‘SF의 페미니즘적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한 작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주요 작품들을 담은 중단편선집『체체파리의 비법』. 다양한 사유실험으로 이미 수십 년 전에 사람들을 매혹시켰던 저자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표제작 《체체파리 비법》을 포함해 모두 7개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펄프 픽션의 외형을 취하면서도 성(젠더), 자아, 환경, 인간성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주는 저자가 앨리스 셸던과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와 라쿠나 셸던의 세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하며 가장 왕성한 창의력을 가지고 있던 시기인 1969년부터 1980년까지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출판사 서평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의 시대에 팁트리를 읽다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 젠더문제는 매우 첨예한 이슈다. 특히 온라인상에서의 남녀갈등 구도는 극심하다. 이는 지난 십여 년 동안 온라인에서 공기처럼 여겨지던 여성혐오 담론에 대한 일군의 젊은 여성들의 적극적인 대처에서부터 나타났다.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불과 몇 년 전에 비해서 훨씬 더 큰 설득력의 울림을 지닌 단어가 되었으며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고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과학기술과 젠더문제의 관계는?

젠더문제가 첨예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크게 보아 두 개의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하나의 가설은 여전히 남성중심 사회가 공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남성중심 사회가 점점 더 해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대부분 여성들은 전자에 대한 주목을 요구하고, 남성들은 후자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불과 백여 년 만에 삶의 양상을 완전히 뒤바꾸는 식의 사회변화를 겪은 한국 사회에선 기준점을 어디에 잡느냐에 따라 의견이 천지차이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살던 세상과 비교하면 변화가 너무 빠르고, 지구촌 다른 여성들의 세상과 비교하면 변화가 너무 느리다.

젠더문제는 흔히 정체성의 문제로 치부되기 때문에 문화적인 측면에서 많이 고찰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과학기술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남녀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기술은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고 그 변화는 결국 남녀관계도 바꾼다. 우리가 미래에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남녀관계가 올 수 있다 기대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SF의 페미니즘적 가능성과 페미니즘 SF

그런 점에서 볼 때 사변소설의 일종으로서의 SF소설은 젠더문제를 의미있게 지적할 수 있는 유효한 도구다. 성차는 ‘몸’과 ‘습속’에서 모두 나타나는데, 우리의 ‘몸’은 일정 부분 결정된 채로 태어나며 그렇게 태어난 ‘몸’이 ‘습속’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니 말이다. 젠더문제를 얘기할 때 우리는 자신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사변적 가정을 통할 때에만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몸’이 상당 부분을 결정해버리는 성차의 문제에서 몸의 구성 자체를 바꾸어 본다는 가정은 이미 그 자체가 상당히 SF적이다.

그러나 SF에 그토록 많은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 가능성이 언제나 온전하게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장르에도 성차에 대한 편견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SF는 상당히 남성적인 장르로 여겨진다. 과학기술이나 이공계와 같은 전공 자체가 남성에게 어울리거나 익숙한 것이란 편견이 있다. 그렇기에 SF에도 페미니즘의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 장르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장르 자체가 지닌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그런 점에서 볼 때 ‘SF의 페미니즘적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한 작가였다. 이는 그가 활동했던 1970년대가 미국 사회에서 급진적 페미니즘의 시기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당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면서, 특유의 상상력으로 당대의 문제의식을 앞서 나갔다고 생각된다. 한국 사회가 최근 해외의 페미니즘 운동의 조류에 관심을 보이고 동참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 여기’에서 팁트리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적당한 시간에 도착한 팁트리?

한국 사회에 SF소설이 유입된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와 같은 고전적 명성을 가진 작가가 이제야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이유에 대해 서술하려 든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사실 ‘남자인 척 했던 여성 작가’였다는 팁트리의 고유한 맥락은 그를 소개할 때 작가 개인의 일대기를 지나치게 상세하게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그가 백인 중년남성을 연기할 때에도 선풍적인 주목을 받았고 그는 ‘훌륭한 남성 페미니즘 SF작가’로 여겨졌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SF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인간의 문제를 심오하게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팁트리의 소설은 수십 년 전에 쓰여졌지만 충분히 급진적이며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우리의 나태하고 빈약한 상상력에 경종을 울리면서 다가올 시대의 여러 문제와 갈등들을 예고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팁트리가 너무 늦게 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이야말로 팁트리를 읽어야 할 때다’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경직된 혐오의 시대에 팁트리는 우리의 생각을 자유롭게 만들 여러 가지 사유실험을 제안할 것이다.

‘이빨도 없는 종족’ 여성들을 위하여
적당한 시간에 도착한 SF적 상상력
우리의 나태하고 빈약한 상상력에 경종을 울리는 매력적인 사유 실험

1970년대에 이미 ‘페미니즘 SF’의 기수로 불렸던 사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첫 번째 단행본이 드디어 나왔다


활동할 당시 ‘페미니즘 SF’의 기수로 인정받았고 사후에는 ‘팁트리 상’으로 기림받는 작가인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주요 작품들을 담은 중단편선집이다. 팁트리의 작품이 단행본으로 묶여나오는 것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체체파리 비법>을 표제작으로 하여 7개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펄프 픽션의 외형을 취하면서도 성(젠더), 자아, 환경, 인간성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주는 팁트리의 세계로 빠져보자.

전 세계에 퍼지는 치명적인 질병이란 소재를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와 엮는가 하면, 외계인과 조우하는 상황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을 질문한다. 시간여행과 우주여행과 질병과 복제문제, 그리고 ‘여자들만 사는 세상’이란 상상을 SF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버무리기도 한다, 우주탐험물 속에 인간성에 대한 진한 통찰을 담기도 하고, 기존 문명의 종말 이후를 다루는 소설에서도 개성을 드러낸다. 전 세계적 네트워크망과 원격조작 신체를 배경에 깔아 나중에 올 사이버펑크란 장르를 예비하는가 하면, 가이아 이론이 탄생하기도 전에 쓰여진 소설에서 지구를 유기체적 생물로 보는 시선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처럼 이 작품집엔 다양한 사유실험으로 이미 수십 년 전에 사람들을 매혹시켰던 작가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이 작품집엔 작가가 가장 왕성한 창의력을 가지고 있던 시기, 앨리스 셸던과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와 라쿠나 셸던의 세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하던 1969년부터 1980년까지의 작품 일곱 편이 들어 있다.

추천사

듀나 / SF소설가, 영화평론가


몇 개월 전, 전 마감에 쫓기면서 다소 어처구니없는 초능력을 가진 남자에 대한 짧은 단편을 하나 썼습니다. 전 그 이야기의 화자를 번역가로 설정했습니다. 번역이야말로 제가 절대로 하지 않기로 맹세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죠. 저랑 화자를 구분하는 건 저에게 언제나 중요한 일입니다.
번역가였으니 일을 주어야겠죠. 전 막판에 그 사람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선집의 일부를 번역하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2015년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으니 그건 지극히 논리적이었습니다. 전 그 이야기를 쓰기 몇 년 전부터 인터넷에서 만난 수많은 출판사 사람들에게 묻고 다녔어요. "혹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집을 번역해 내실 생각이 없나요? 곧 백 주년이 되는데?" 아무도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지 않았고 실망한 전 (늘 그렇듯) 제가 만든 허구의 세계에서 그 책을 창조해내야 했습니다.
그 가상의 단편집이 《Her Smoke Rose Up Forever》였다면 참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전 그 책이 한국 출판사가 다루기엔 지나치게 큰 책이란 걸 알았습니다. 장편은 분책해서 팔면 되지만 단편집에도 그런 취급을 해주는 곳은 얼마 없죠. 그래서 전 좀 짧은 단편 위주의 다른 선집을 상상했는데 상상 속에서라도 조금 더 막 나가도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지금 제가 추천의 글을 쓰고 있는 이 책이 바로 두 권으로 나뉘어 출판되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선집 《Her Smoke Rose Up Forever》의 첫 번째 책이니 말입니다.

*
팁트리 쇼크에 관해서 이야기해볼까요? 1970년대 말 미국 SF 세계라는 작은 동네에서 일어난 소동입니다.
시작부터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란 SF 작가가 있었습니다. 60년대 말부터 1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불꽃 같은 스타일과 다양한 소재 폭과 흥미진진한 주제의식을 과시하는 놀라운 중단편들을 썼지요. 하지만 SF 세계의 어느 누구도 이 작가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습
니다. 친구들과도 오로지 편지로만 소통을 했고요. 그 이유에 대해선 다들 그러려니 했습니다. 편지에 따르면 신분을 감추고 글을 써야 하는 직장에서 일하는 것 같았어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흥미진진한 점은 그가 페미니스트였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남성적인 톤을 잃지 않으면서도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놀랄 만큼 통찰력 있는 작품들을 썼습니다. 단순히 통찰력이 있음을 넘어서서 당대를 사는 여성의 분노와 고통과 두려움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이야기들이었죠. 70년대 페미니스트 SF를 파는 독자들이라면 온화하고 사람 좋은 어슐러 K. 르 귄의 작품들보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전투적인 작품들이 훨씬 더 와 닿을 거라 생각합니다.
몇몇 독자들은 이 작가가 혹시 여자가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 아이디어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스타일이 여자가 쓴 작품치고는 너무나도 남성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작품 속에 녹아있는 여성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망을 읽었는데, 이 역시 그가 남자라는 증거였습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집에 서문을 쓴 로버트 실버버그는 팁트리가 여자라는 가설이 어처구니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진상이 밝혀진 건 1976년이었습니다. 실버버그의 선언이 있은 지 1년 뒤였죠. 팁트리는 그해에 몇몇 편지에서 자기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그중 몇 명이 시카고 신문을 뒤지다가 그에 맞는 사람의 부고를 찾아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메리 헤이스팅즈 브래들리라는 소설가 겸 여행작가 겸 모험가로, 유족은 앨리스 브래들리 셸든이라는 딸 하나뿐이었습니다.
1977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자신이 앨리스 브래들리 셸든이라고 커밍아웃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SF 팬덤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고 사람들은 이를 팁트리 쇼크라고 합니다.

*
전 종종 이 쇼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곤 합니다. 남자 필명을 쓴 작가가 여자로 밝혀진 것이 그렇게 놀라운 일이었던 걸까요? 조르주 상드에서부터 조지 엘리어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성 작가들이 남자 이름으로 작품을 썼습니다. 심지어 《해리 포터》의 작가도 중성의 J.K. 롤링이었습니다. 완벽하게 성공적인 방식으로 남자들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여성작가들도 많습니다. 20세기 중반에 펄프 시장과 영화계에서 활동했던 여성작가들이 얼마나 마초스러울 수 있었는지 아시나요? 남자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들은 디폴트 성이고 감추어진 게 없습니다. 반대는 그보다 조금 힘듭니다. 하지만 이 역시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표준어를 구사하는 사투리 사용자와 그 반대를 생각해보세요.
전 팁트리가 그때까지 쓴 작품들을 읽고도 대다수 사람이 이 작가가 여성일 가능성을 부정했다는 사실이 더 재미있습니다. 이건 작가가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잖아요. [보이지 않는 여자들]를 보죠. 매우 남성적인 어조로 말하는 남성 내레이터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읽어도 이 남성 캐릭터는 허수아비이고 놀림감이며, 이 이야기에서 진짜로 작가의 목소리를 내는 캐릭터는 그와 함께 멕시코의 밀림을 여행하는 중년 여성 루스 파슨스임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남자가 썼을 수도 있습니다. 남성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없었던 건 아니니까요. 유쾌하고 친절한 존 발리 같은 사람들이 있었죠. 하지만 발리는 팁트리처럼 냉정하고 단도직입적이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팁트리의 직설적인 공격성은 남자들이 멸종한 미래의 지구에 도착한 남자 우주비행사들의 이야기인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에서 절정을 이루죠.
물론 팁트리가 그린 여성과 남성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에 나오는 평화롭지만 정체된 여성 사회가 과연 긍정적이기만 한 곳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팁트리는 과학 기술의 발전을 남성적인 것으로 봤던 걸까요? 아니면 과학 기술의 정체가 멸망 직전까지 갔던 그 특정한
문화의 특성이었던 걸까요? 여자들을 오로지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보이지 않는 여자들]의 내레이터를 놀려대는 건 쉬운 일이지만, 팁트리가 여성 캐릭터를 성적 대상으로 보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작가가 여성일 가능성을 부정하는 단서가 되는 건 아니죠. 페미니스트 작가가 반드시 유토피아물이나 디스토피아물만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 많은 남편과 평온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60대 가정주부도 얼마든지 다른 여자들에 대한 성적 욕망을 담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여성적 목소리와 남성적 목소리의 경계는 훨씬 흐릿한 법이고 그 경계선을 나누는 것은 개별 목소리가 아니라 그들을 보는 편견입니다.
가면으로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남성은 디폴트 성입니다. 사용방식에 따라 여성에 대립하는 성이 아닌 중립적인 무언가일 수도 있는 것이죠. 앨리스 셸든이 팁트리라는 가면을 쓰면서 얻은 것도 그런 중립적인 자유였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셸든은 남자를 흉내 냈다기보다는 여자들에게 주어진 제한과 불필요한 관심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썼던 것이죠. 셸든은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자긴 자기 직업의 첫 번째 여성이 된 경험을 지나치게 많이 했기에 이를 피하려 했다고요. 물론 여기엔 퀴어적인 의미도 있었습니다. 앨리스 셸든에게 새 남자 이름은 한 번도 여자들과 제대로 사귀어본 적이 없으면서도 늘 간직하고 있던 동성애 욕망을 편안하고 솔직하게 표출할 수 있는 도구였지요.
이런 가면이 필요하지 않았고 쓸 생각도 없었던 동시대 여성 작가들이 있었습니다. 어슐러 르 귄이 그랬고, 페미니스트와 퀴어 액티비스트로서 전투력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를 몇 배 능가했던 조애나 러스도 그랬습니다. (여담이지만 두 사람 모두 팁트리의 펜팔 친구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모든 작가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조건과 환경이 있기 마련이고 앨리스 셸든에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라는 가면은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도구였습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자신의 탐구를 막는다면 새로운 작품에 어울리는 또 다른 작가를 만들어 내면 되었습니다. 이 책 제목이기도 한 [체체파리의 비법]은 그렇게 만든 새로운 아이덴티티인 (이번엔 여성이었습니다) 라쿠나 셸든의 작품이었죠.
이런 식으로 만들어낸 가상 아이덴티티의 레이어를 거쳐 작품을 써가는 작가의 모습에서 [접속된 소녀]의 이야기를 읽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이런 행위를 남성 아이덴티티를 더 매력적으로 보는 SF 팬덤을 유혹하는 행위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전 그 표면적인 동기만큼이나 가면극 자체의 매력 역시 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가면극의 적극적인 참여 과정에서 젠더와 아이덴티티와 같은 팁트리 소설의 중요한 주제들이 이야기 속에서 꽃피웠다고도요. '커밍아웃' 이후 앨리스 셸든이 그처럼 힘들어했던 것도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가면극과 꼭두각시극의 전문가에게서 가면과 인형을 빼앗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정체가 밝혀진 뒤에도 앨리스 셸든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이름으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습니다. 당시 셸든의 작품 활동에 '커밍아웃'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연구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면 제가 정말 사랑해 마지않는 [마지막으로 멋지게 할 만한 일] 같은 단편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이름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그 작품은 라쿠나 셸든의 몫이었을까요?
1991년, 카렌 조이 파울러와 팻 머피에 의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젠더에 대한 이해의 확장과 이해에 이바지한 SF와 판타지 책들에 주는 이 상의 수상작으로 국내에 출판된 작품으로는 메리 도리아 러셀의 《스패로》, 캐서린 M. 벨몬트의 《소녀와 비밀의 책》과 같은 책들이 있지요. 하지만 정작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자신의 작품만을 수록한 책은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 출판된 적이 없었습니다. 몇몇 단편들만이 앤솔로지의 일부로 소개되었을 뿐이죠. 이 책 《체체파리의 비법》과 그 후속편은 이 멋진 작가를 소개하는 첫발입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마지막이 아니길 빌 뿐입니다.

출판사 서평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의 시대에 팁트리를 읽다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 젠더문제는 매우 첨예한 이슈다. 특히 온라인상에서의 남녀갈등 구도는 극심하다. 이는 지난 십여 년 동안 온라인에서 공기처럼 여겨지던 여성혐오 담론에 대한 일군의 젊은 여성들의 적극적인 대처에서부터 나타났다.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불과 몇 년 전에 비해서 훨씬 더 큰 설득력의 울림을 지닌 단어가 되었으며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고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과학기술과 젠더문제의 관계는?

젠더문제가 첨예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크게 보아 두 개의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하나의 가설은 여전히 남성중심 사회가 공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남성중심 사회가 점점 더 해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대부분 여성들은 전자에 대한 주목을 요구하고, 남성들은 후자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불과 백여 년 만에 삶의 양상을 완전히 뒤바꾸는 식의 사회변화를 겪은 한국 사회에선 기준점을 어디에 잡느냐에 따라 의견이 천지차이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살던 세상과 비교하면 변화가 너무 빠르고, 지구촌 다른 여성들의 세상과 비교하면 변화가 너무 느리다.

젠더문제는 흔히 정체성의 문제로 치부되기 때문에 문화적인 측면에서 많이 고찰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과학기술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남녀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기술은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고 그 변화는 결국 남녀관계도 바꾼다. 우리가 미래에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남녀관계가 올 수 있다 기대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SF의 페미니즘적 가능성과 페미니즘 SF

그런 점에서 볼 때 사변소설의 일종으로서의 SF소설은 젠더문제를 의미있게 지적할 수 있는 유효한 도구다. 성차는 ‘몸’과 ‘습속’에서 모두 나타나는데, 우리의 ‘몸’은 일정 부분 결정된 채로 태어나며 그렇게 태어난 ‘몸’이 ‘습속’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니 말이다. 젠더문제를 얘기할 때 우리는 자신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사변적 가정을 통할 때에만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몸’이 상당 부분을 결정해버리는 성차의 문제에서 몸의 구성 자체를 바꾸어 본다는 가정은 이미 그 자체가 상당히 SF적이다.

그러나 SF에 그토록 많은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 가능성이 언제나 온전하게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장르에도 성차에 대한 편견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SF는 상당히 남성적인 장르로 여겨진다. 과학기술이나 이공계와 같은 전공 자체가 남성에게 어울리거나 익숙한 것이란 편견이 있다. 그렇기에 SF에도 페미니즘의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 장르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장르 자체가 지닌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그런 점에서 볼 때 ‘SF의 페미니즘적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한 작가였다. 이는 그가 활동했던 1970년대가 미국 사회에서 급진적 페미니즘의 시기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당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면서, 특유의 상상력으로 당대의 문제의식을 앞서 나갔다고 생각된다. 한국 사회가 최근 해외의 페미니즘 운동의 조류에 관심을 보이고 동참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 여기’에서 팁트리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적당한 시간에 도착한 팁트리?

한국 사회에 SF소설이 유입된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와 같은 고전적 명성을 가진 작가가 이제야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이유에 대해 서술하려 든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사실
‘남자인 척 했던 여성 작가’였다는 팁트리의 고유한 맥락은 그를 소개할 때 작가 개인의 일대기를 지나치게 상세하게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그가 백인 중년남성을 연기할 때에도 선풍적인 주목을 받았고 그는 ‘훌륭한 남성 페미니즘 SF작가’로 여겨졌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SF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인간의 문제를 심오하게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팁트리의 소설은 수십 년 전에 쓰여졌지만 충분히 급진적이며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우리의 나태하고 빈약한 상상력에 경종을 울리면서 다가올 시대의 여러 문제와 갈등들을 예고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팁트리가 너무 늦게 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이야말로 팁트리를 읽어야 할 때다’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경직된 혐오의 시대에 팁트리는 우리의 생각을 자유롭게 만들 여러 가지 사유실험을 제안할 것이다.

추천사

몇 개월 전, 전 마감에 쫓기면서 다소 어처구니없는 초능력을 가진 남자에 대한 짧은 단편을 하나 썼습니다. 전 그 이야기의 화자를 번역가로 설정했습니다. 번역이야말로 제가 절대로 하지 않기로 맹세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죠. 저랑 화자를 구분하는 건 저에게 언제나 중요한 일입니다.

번역가였으니 일을 주어야겠죠. 전 막판에 그 사람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선집의 일부를 번역하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2015년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으니 그건 지극히 논리적이었습니다. 전 그 이야기를 쓰기 몇 년 전부터 인터넷에서 만난 수많은 출판사 사람들에게 묻고 다녔어요. "혹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집을 번역해 내실 생각이 없나요? 곧 백 주년이 되는데?" 아무도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지 않았고 실망한 전 (늘 그렇듯) 제가 만든 허구의 세계에서 그 책을 창조해내야 했습니다.

그 가상의 단편집이 [Her Smoke Rose Up Forever]였다면 참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전 그 책이 한국 출판사가 다루기엔 지나치게 큰 책이란 걸 알았습니다. 장편은 분책해서 팔면 되지만 단편집에도 그런 취급을 해주는 곳은 얼마 없죠. 그래서 전 좀 짧은 단편 위주의 다른 선집을 상상했는데 상상 속에서라도 조금 더 막 나가도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지금 제가 추천의 글을 쓰고 있는 이 책이 바로 두 권으로 나뉘어 출판되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선집 [Her Smoke Rose Up Forever]의 첫 번째 책이니 말입니다.

팁트리 쇼크에 관해서 이야기해볼까요? 1970년대 말 미국 SF 세계라는 작은 동네에서 일어난 소동입니다.

시작부터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란 SF 작가가 있었습니다. 60년대 말부터 1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불꽃 같은 스타일과 다양한 소재 폭과 흥미진진한 주제의식을 과시하는 놀라운 중단편들을 썼지요. 하지만 SF 세계의 어느 누구도 이 작가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친구들과도 오로지 편지로만 소통을 했고요. 그 이유에 대해선 다들 그러려니 했습니다. 편지에 따르면 신분을 감추고 글을 써야 하는 직장에서 일하는 것 같았어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흥미진진한 점은 그가 페미니스트였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남성적인 톤을 잃지 않으면서도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놀랄 만큼 통찰력 있는 작품들을 썼습니다. 단순히 통찰력이 있음을 넘어서서 당대를 사는 여성의 분노와 고통과 두려움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이야기들이었죠. 70년대 페미니스트 SF를 파는 독자들이라면 온화하고 사람 좋은 어슐러 K. 르 귄의 작품들보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전투적인 작품들이 훨씬 더 와 닿을 거라 생각합니다.

몇몇 독자들은 이 작가가 혹시 여자가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 아이디어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스타일이 여자가 쓴 작품치고는 너무나도 남성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작품 속에 녹아있는 여성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망을 읽었는데, 이 역시 그가 남자라는 증거였습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집에 서문을 쓴 로버트 실버버그는 팁트리가 여자라는 가설이 어처구니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진상이 밝혀진 건 1976년이었습니다. 실버버그의 선언이 있은 지 1년 뒤였죠. 팁트리는 그해에 몇몇 편지에서 자기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그중 몇 명이 시카고 신문을 뒤지다가 그에 맞는 사람의 부고를 찾아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메리 헤이스팅즈 브래들리라는 소설가 겸 여행작가 겸 모험가로, 유족은 앨리스 브래들리 셸든이라는 딸 하나뿐이었습니다.

1977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자신이 앨리스 브래들리 셸든이라고 커밍아웃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SF 팬덤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고 사람들은 이를 팁트리 쇼크라고 합니다.

전 종종 이 쇼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곤 합니다. 남자 필명을 쓴 작가가 여자로 밝혀진 것이 그렇게 놀라운 일이었던 걸까요? 조르주 상드에서부터 조지 엘리어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성 작가들이 남자 이름으로 작품을 썼습니다. 심지어 [해리 포터]의 작가도 중성의 J.K. 롤링이었습니다. 완벽하게 성공적인 방식으로 남자들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여성작가들도 많습니다. 20세기 중반에 펄프 시장과 영화계에서 활동했던 여성작가들이 얼마나 마초스러울 수 있었는지 아시나요? 남자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들은 디폴트 성이고 감추어진 게 없습니다. 반대는 그보다 조금 힘듭니다. 하지만 이 역시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표준어를 구사하는 사투리 사용자와 그 반대를 생각해보세요.

전 팁트리가 그때까지 쓴 작품들을 읽고도 대다수 사람이 이 작가가 여성일 가능성을 부정했다는 사실이 더 재미있습니다. 이건 작가가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잖아요. [보이지 않는 여자들]를 보죠. 매우 남성적인 어조로 말하는 남성 내레이터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읽어도 이 남성 캐릭터는 허수아비이고 놀림감이며, 이 이야기에서 진짜로 작가의 목소리를 내는 캐릭터는 그와 함께 멕시코의 밀림을 여행하는 중년 여성 루스 파슨스임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남자가 썼을 수도 있습니다. 남성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없었던 건 아니니까요. 유쾌하고 친절한 존 발리 같은 사람들이 있었죠. 하지만 발리는 팁트리처럼 냉정하고 단도직입적이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팁트리의 직설적인 공격성은 남자들이 멸종한 미래의 지구에 도착한 남자 우주비행사들의 이야기인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에서 절정을 이루죠.

물론 팁트리가 그린 여성과 남성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에 나오는 평화롭지만 정체된 여성 사회가 과연 긍정적이기만 한 곳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팁트리는 과학 기술의 발전을 남성적인 것으로 봤던 걸까요? 아니면 과학 기술의 정체가 멸망 직전까지 갔던 그 특정한 문화의 특성이었던 걸까요? 여자들을 오로지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보이지 않는 여자들]의 내레이터를 놀려대는 건 쉬운 일이지만, 팁트리가 여성 캐릭터를 성적 대상으로 보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작가가 여성일 가능성을 부정하는 단서가 되는 건 아니죠. 페미니스트 작가가 반드시 유토피아물이나 디스토피아물만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 많은 남편과 평온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60대 가정주부도 얼마든지 다른 여자들에 대한 성적 욕망을 담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여성적 목소리와 남성적 목소리의 경계는 훨씬 흐릿한 법이고 그 경계선을 나누는 것은 개별 목소리가 아니라 그들을 보는 편견입니다.

가면으로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남성은 디폴트 성입니다. 사용방식에 따라 여성에 대립하는 성이 아닌 중립적인 무언가일 수도 있는 것이죠. 앨리스 셸든이 팁트리라는 가면을 쓰면서 얻은 것도 그런 중립적인 자유였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셸든은 남자를 흉내 냈다기보다는 여자들에게 주어진 제한과 불필요한 관심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썼던 것이죠. 셸든은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자긴 자기 직업의 첫 번째 여성이 된 경험을 지나치게 많이 했기에 이를 피하려 했다고요. 물론 여기엔 퀴어적인 의미도 있었습니다. 앨리스 셸든에게 새 남자 이름은 한 번도 여자들과 제대로 사귀어본 적이 없으면서도 늘 간직하고 있던 동성애 욕망을 편안하고 솔직하게 표출할 수 있는 도구였지요.

이런 가면이 필요하지 않았고 쓸 생각도 없었던 동시대 여성 작가들이 있었습니다. 어슐러 르 귄이 그랬고, 페미니스트와 퀴어 액티비스트로서 전투력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를 몇 배 능가했던 조애나 러스도 그랬습니다. (여담이지만 두 사람 모두 팁트리의 펜팔 친구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모든 작가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조건과 환경이 있기 마련이고 앨리스 셸든에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라는 가면은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도구였습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자신의 탐구를 막는다면 새로운 작품에 어울리는 또 다른 작가를 만들어 내면 되었습니다. 이 책 제목이기도 한 [체체파리의 비법]은 그렇게 만든 새로운 아이덴티티인 (이번엔 여성이었습니다) 라쿠나 셸든의 작품이었죠.

이런 식으로 만들어낸 가상 아이덴티티의 레이어를 거쳐 작품을 써가는 작가의 모습에서 [접속된 소녀]의 이야기를 읽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이런 행위를 남성 아이덴티티를 더 매력적으로 보는 SF 팬덤을 유혹하는 행위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전 그 표면적인 동기만큼이나 가면극 자체의 매력 역시 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가면극의 적극적인 참여 과정에서 젠더와 아이덴티티와 같은 팁트리 소설의 중요한 주제들이 이야기 속에서 꽃피웠다고도요. '커밍아웃' 이후 앨리스 셸든이 그처럼 힘들어했던 것도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가면극과 꼭두각시극의 전문가에게서 가면과 인형을 빼앗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체가 밝혀진 뒤에도 앨리스 셸든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이름으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습니다. 당시 셸든의 작품 활동에 '커밍아웃'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연구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면 제가 정말 사랑해 마지않는 [마지막으로 멋지게 할 만한 일] 같은 단편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이름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그 작품은 라쿠나 셸든의 몫이었을까요?

1991년, 카렌 조이 파울러와 팻 머피에 의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젠더에 대한 이해의 확장과 이해에 이바지한 SF와 판타지 책들에 주는 이 상의 수상작으로 국내에 출판된 작품으로는 메리 도리아 러셀의 [스패로], 캐서린 M. 벨몬트의 [소녀와 비밀의 책]과 같은 책들이 있지요. 하지만 정작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자신의 작품만을 수록한 책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출판된 적이 없었습니다. 몇몇 단편들만이 앤솔로지의 일부로 소개되었을 뿐이죠. 이 책 [체체파리의 비법]과 그 후속편은 이 멋진 작가를 소개하는 첫발입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마지막이 아니길 빌 뿐입니다.
- 듀나 / SF소설가, 영화평론가

목차

추천의 글 - 듀나

체체파리의 비법(THE SCREWELY SOLUTION)
접속된 소녀(THE GIRL WHO WAS PLUGGED IN)
보이지 않는 여자들(THE WOMEN MEN DON'T SEE)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HOUSTON, HOUSTON, DO YOU READ?)
아인 박사의 마지막 비행(THE LAST FLIGHT OF DR. AIN)
덧없는 존재감(A MOMENTARY TASTE OF BEING)
비애곡(SLOW MUSIC)

작품 해설 및 옮긴이의 글
작품 단행본 목록

추천의 글 - 듀나 . 7

체체파리의 비법(THE SCREWELY SOLUTION) . 19
접속된 소녀(THE GIRL WHO WAS PLUGGED IN) . 57
보이지 않는 여자들(THE WOMEN MEN DON'T SEE) . 121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HOUSTON, HOUSTON, DO YOU READ?) . 175
아인 박사의 마지막 비행(THE LAST FLIGHT OF DR. AIN) . 273
덧없는 존재감(A MOMENTARY TASTE OF BEING) . 297
비애곡(SLOW MUSIC) . 437

작품 해설 및 옮긴이의 글 . 513
작품 단행본 목록 . 529

저자소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1915

본명은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 부모님과 함께 아프리카와 인도를 여행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화가, 예술 비평가, 군 정보원, CIA 정보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고 전역 후에는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실험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을 끝마치던 1967년, 51세의 나이에 SF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라는 필명을 만들었다(‘팁트리’는 식료품점에서 흔히 보이는 과일잼의 브랜드명이다). 군대나 CIA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원치 않은 주목을 받았던 그는 ‘여성 SF 작가’로서 받게 될 관심에서 벗어나고자 남성처럼 보이는 필명을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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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역]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

저자 이수현은 SF작가이자 번역가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패러노말 마스터》로 제4회 한국판타지문학상 우수상을 받았으며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이웃집 슈퍼히어로》 등 앤솔로지에 참여했다. 조지 R. R. 마틴의 《왕좌의 게임》 등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어슐러 르 귄의 《로캐넌의 세계》 등 '헤인' 시리즈,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 릭 라이어던의 ‘퍼시 잭슨과 올림포스의 신’ 시리즈 등 SF와 판타지 소설을 주로 번역했다.
옮긴 책으로는 어슐러 르 귄의 『빼앗긴 자들』, 『로캐넌의 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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