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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실패와 상처를 넘어선 신생의 거처

1991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전윤호 시인의 4번째 시집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 [늦은 인사]는 삶의 비극적 조건을 넘어서려는 고투를 시로써 여실히 형상화해온 전윤호 시인의 시작(詩作) 여정이 한 정점을 이룬 시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요즘처럼 소통 부재의 미학, 자폐적 미학이라 부를 수 있는 시적 경향들이 만연한 시대에 전윤호 시인은 모든 거추장스러운 수사를 버리고 담백한 고백의 어조를 통해 실패와 상처를 넘어서 신생의 거처를 궁구하고자 한다.

모성과 화해의 공간으로서의 '도원(桃源)'


시인은 어린 날 뼈아픈 이별을 겪어야 했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의 이별이었다. 상처는 몸속으로 파고들어, 소년은 어디가 아픈 줄도 모르고 아파했다. 아니, 아픈 곳이 어딘 줄 알면서도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오래 침묵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잃어버린 도원(桃源)을 찾아 헤맸다. 시인의 고향에서는 까닭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은 모두 도원으로 갔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가고 싶었다
떠나는 모습을 기억도 못하는
어린 나를 두고 사라진
어머니가 보고 싶어 보채면
사람들은 도원에 마실 간 거라고
실컷 놀고 나면 내가 생각나
쪽배 타고 돌아올 거라고

우리 동네에서
무덤도 없이 사라진 사람은
도원으로 놀러간 거라고 했다


괜히 울적한 저녁이면
강변으로 뛰어가
산 너머로 사그라지는 노을을 보면서
어머니가 돌아오기 전에
그곳에 가고 싶었다
_ 시 [그곳] 부분

도원(桃源)은 어디에 있을까? 그곳이 어디인 줄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큰 산 아래 강이 휘몰아 넓은 땅덩이를 만드니 마을을 이룰 만한 자리"로 사람들이 "전란"과 "징발"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관리가 오면 "바위를 굴리고" 홍수가 나도 "다리도 보수하지 않고 가진 배도 묶인 채 썩어가니" 시간이 흘러 "안과 밖이 서로 잊으니 애달픈 일이 없고 마침내 도원이 되었다"([유래(由來)])고 한다.
도원은 피난과 유민의 공간이자 상처와 고통이 없는, 가장 처음의 완전한 공간이다. 도원에서 "소들은 산과 강변에서 풀을 뜯는다 인간의 소유가 아니니 뿔도 자르지 않고 코도 뚫지 않는다"([소들의 월동지]), "아이들은 짐승의 울음을 흉내 내다가 노래를 터득하게 된다 비 오는 소리와 바람이 부는 소리를 배운 아이도 있다"([아이 마당]), "눈이 많이 내리면 산에서 소나 개 같은 짐승들이 내려오기도 하는데 일단 마당 안으로 들어오면 광을 열어주고 제 발로 갈 때까지 둔다 한 집을 정해 일정하게 내려오는 일도 많으며 밖에서 마주치면 알아보고 길동무가 돼주기도 한다"([사는 법]).
자폐적 시대에 울리는 서정미학의 핵

시인에게 도원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삶의 근원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그곳은 어머니를 잃어버린 공간, 그래서 어머니를 찾기 위해 돌아가고 싶은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도원으로 간 사람들은 모두 죽음의 문인 소(沼)를 거쳐 갔다. 시인이 기억하는 상상의 공간으로서 도원은 실제적 장소로 변환될 경우 상처와 고통을 주는 곳으로 변한다. 그런데도 시인은 소음이 가득한 살아 있는 것들의 세계에서 눈을 뜨면 곧 사라질 것 같은 도원을 그리워하며 "머릿속에 예쁜 문신을 새겨놓은 것처럼...... 도원이 그립다"([시인의 말])고 한다. 시인에게 일상은 삶을 비루하게 만드는 현실이다. 그는 그곳으로부터 벗어나 도원으로 회귀하고 싶어 한다. 시인은 비록 상처투성이일 뿐인 삶일지라도 트라우마의 늪에 빠져 존재를 망각하지는 않고 '물봉숭아'에 매개된 어머니를 찾아 상처와 고통이 없는 가장 처음의 완전한 실존이 보장되는 세계 도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첫차 타고 떠나려고 앞강에서 머리 감다
물봉숭아를 건졌다
어머니가 좋아했던 꽃

꽃밭 찾으려고
안개 속으로
무릎 적시며 걸어갔다
기차역과는 반대편

(중략)

허방을 짚었다
발밑이 꺼졌다
깊은 쪽으로 머리가 빨려 들어간다
물살이 나를 빙빙 돌렸다
잃어버려 잃어버려 다 잃어버려
_ 시 [첫차] 부분

세상은 시인으로 하여금 고향을 잊게 한다. 고향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시인은 도원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도원을 영영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소통 부재의 미학, 자폐적 미학의 시대에 휘황찬란한 수사를 버리고 대신 담백한 고백의 어조로 자신의 상처를 위무한다. 나아가 도원이 비단 시인만의 자폐적 공간이 아닌, 누구든 상처 입은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누구든 언제든 어딘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자신이 떠나온 도원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보도록 한다.

살아 있는 것들은 소리를 낸다. 가만히 들어보면 말없는 사물들조차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소리를 낸다. 세상은 그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어떤 때는 너무 어지럽다. 도원이 그립다. 지금 내 주변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눈을 뜨면 도원이 사라질 것 같다. 눈을 뜨면 모든 게 곧 잊힐 것 같다. 그러나 웅성거리는 사람들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강변이었다. 식구들의 근심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나는 산 너머 마을로 가겠다고 결심했을 뿐, 어떻게 떠내려온 건지 기억이 없다. 하지만 도원에 관한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점점 더 생생해졌다. 머릿속에 예쁜 문신을 새겨놓은 것처럼. 환하게 욱신거리는 그곳.
(/ 시인의 말 중에서)

추천사

원산지에선 벌써 사라져버린 ‘부조리시(不條理時)’가 새 것으로 유행하는 지금,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일에 시의 전부를 건 전윤호의 시는 오히려 신선하다. ‘초현실주의’를 마지막으로 지난 50년간 세계의 모든 ‘주의(主義)’가 사그라졌다. 남은 것은 시인의 삶이고, 그 삶을 지탱해주거나 무너트리려 드는 현실이다.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전윤호의 시에서처럼 지나친 과장이나 분노 없이, 지나친 자괴심 없이, 살아 있는 예를 달리 찾기 힘들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 정선의 혼을 ‘도원(桃源)’이라 부르지만 이상향으로 그리지 않고, 오지(奧地)만으로 그리지도 않는다. 일찍 이별한 어머니, 혹은 어머니의 상징 꽃인 별로 화려하지 않은 물봉숭아 정도로 그리워한다. 정선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 한밤중/정선역까지 밀려왔다면/강릉여인숙으로 가자/연탄재 부서진 마당엔/세상의 배꼽 같은 수도꼭지가 반짝이고/빙 둘러선 방들이/묶인 배처럼 흔들리는 곳”(「강릉여인숙 1」), 그런 곳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삶의 중심(세상의 배꼽)을 이룬다. 그런 삶이 시를 만드는 고통과 기쁨을 이 시집은 줄 것이다.
- 황동규 / 시인

목차

제1부 메기 낚시|기초 입문|얼음배|낮달|수면사(睡眠寺)|전당사(典當寺) 1|전당사(典當寺) 2|중산충(中産蟲)|내가 고향이다|봄|하프타임|아들의 나비|조각보|동해에서 폭설을 만나다|첫차

제2부 해제(解題)|유래(由來)|물거울|소들의 월동지|하늘 닭|나무 돼지|편지 고양이|아이 마당|술 샘|여자 성인식|남자 성인식|일하는 솥|사는 법|푸른 집의 흔적|물속에서|강가의 소나무 몇 그루|아라리 한 소절 1|아라리 한 소절 2|그곳|유호|입구에서|고개 들어보면

제3부 숟가락 거울|사장|부동산 천국|대관식|도서관에서|노란 발전소|내 안의 발전소|사소한 시인|골키퍼|내 안의 야만 시대|천안함에게|설거지|천오백 몇 십 미터짜리의 그리움|수몰 지구|봄눈 내리는 아침|섬 주막|전산옥|실연|겨울 저녁|강릉여인숙 1|강릉여인숙 2|작은 감자|삼월의 망명|늦은 인사
해설 구모룡|시인의 말

본문중에서

동해에서 폭설을 만나다

바다에서 엄마를 잃어버리고
아버지 손을 잡고 산으로 갔다
계모의 미운 혹이 되어
골방에서 잠들던 어린 날
문설주가 시퍼렇게 어른거려 울었다
그들의 세상이
대충 지어놓은 가건물이었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어
덜덜거리는 고물차를 타고
바다로 간다
연인에게 미안하다는 노래를
반복해서 틀면서
모래밭에 흩어진 조개껍데기들을 본다
파도가 거친 날 휩쓸려 올라와
갈매기들에 살을 쪼이고
껍질만 남은
엄마는 어디로 갔을까
밤새 파도 소리에 뒤척이다가
주먹만 한 눈송이가 내리는 것을 보았다
선잠이 깬 아침까지
눈은 내리고 내려
길을 지우고 차를 지우고
나를 지우는구나
누가 누구에게 미안한 걸까
새벽부터 땀 흘리며 눈을 치운다
자꾸 파 내려가면
묶인 배가 흔들리는
항구가 보일 것 같다

강릉여인숙 1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 한밤중
정선역까지 밀려왔다면
강릉여인숙으로 가자
연탄재 부서진 마당엔
세상의 배꼽 같은 수도꼭지가 반짝이고
빙 둘러선 방들이
묶인 배처럼 흔들리는 곳
방금 광산에서 돌아온
긴 장화를 신은 어둠이
비린내 나는 소주를 권할 때
벽으로 바람이 통하고
머리 위엔 별자리가 보이는
난파선 수리소
어디에서나 뒷걸음질만 치다가
막장에 닿았을 때
청량리에서 기차 타고
정선으로 가자
강릉여인숙엔 오늘도
노란 불빛 새어나오는 방들이
볼 시린 손님을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을 테니

늦은 인사

그 바닷가에서 당신은
버스를 탔겠지
싸우다 지친 여름이 푸르스름한 새벽
내가 잠든 사이
분홍 가방 끌고

동해와 설악산 사이
외줄기 길은 길기도 해
다시는 만날 수 없었네

자고 나면 귀에서 모래가 나오고
버스만 타면 멀미를 했지
아무리 토해도 멈추지 않고
정신없이 끌려가던 날들

가는 사람은 가는 사정이 있고
남는 사람은 남는 형편이 있네
더 이상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는 나이

잘 가 엄마
아지랑이 하늘하늘 오르는 봄
이제야 미움 없이
인사를 보내
(/ 본문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시인 전윤호는 1964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으며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순수의 시대], [연애소설], [늦은 인사], [천사들의 나라]가 있다. 시와시학 작품상 젊은 시인상을 수상했다.

생년월일 1964~
출생지 강원도 정선
출간도서 25종
판매수 2,526권

1964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다.
1991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시집 [천사들의 나라] 외 다수를 썼다.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 한국시인협회 젊은 시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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