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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 문명의 중심

원제 : The Silk Road(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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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동서 문명의 중심 실크로드로 떠나는 특별한 여정

실크로드는 중아아시아를 가로질러 유럽으로 뻗어 있는 옛 교역로였다. 그래서 그 이름은 여전히 중국의 비단과, 향신료 등을 가득 싣고 가는 낙타 행렬, 눈 덮인 설산으로 둘러싸인 오아시스들, 그리고 포도, 고수풀, 발틱산 호박, 지중해의 산호들을 사고파는 혼잡한 시장들의 이국적인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5천 년 이상을 넘나들며, 대영박물관과 다른 나라의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들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이 책은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의 전체적인 그림들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대탐험가들 스타인, 헤딘 등이 직접 촬영한 출판되지 않은 많은 사진들을 포함하고 있어 실크로드를 생생하게 그 시작부터 오늘날까지 발전하고 있는 풍부한 역사를 보여준다.

수천 년 동안 쉼 없이 이어온 동·서의 오고 감은 인류의 삶 그 자체였다. 그것은 일상이었고 별난 움직임도 아니었다. 오늘날에 와서 이러한 삶의 궤적들이 특별해진 것은 서구인들의 이기심으로 인한 파괴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면서 지구의 중심으로 몰려들었고, 하나둘씩 삶의 흐름을 헤집어놓았다. 동서양 문물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와 영국이 주도한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결과물과 돈황 석굴의 유물이 세상에 나오면서부터였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훌쩍 넘었다. 하지만 이 증거들이 단순히 우리의 이국적 취향을 만족시키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할 뿐일까? 과연 지구상의 어떤 나라, 어떤 민족이 이토록 거대한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에게 "실크로드"란 단어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 아마도 이 단어가 문명 교류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고, 또 무한한 환기성을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TV 교양 프로그램이라든가 여행기, 가이드북 등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각들이 대부분 한 분야, 특정한 시기, 또는 흥미로운 에피소드에만 집중되었고, 통사(通史)다운 전체적 기술은 무척 미흡했다. 이 책의 저자 프랜시스 우드는 "심연" 그 자체의 극히 일상적이고 "진부하고" 전체적인 모습들을 스케치하려 노력했다. 저자는 학술적 연구보다는 실크로드 2천 년의 숨결이 울려주는 미세하고도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고자 한다. 마치 실크로드의 흐름을 재연이라도 하려는 듯이 아주 평탄하면서도 생생한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심연"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는 영국의 시인 플레커(James Elroy Flecker)의 시로 시작하며 실크로드의 생명력과 그 환기성을 언급한다. 그리고 문 안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인류 역사의 온갖 물리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실크로드의 생명력은 시공간을 넘어 시들지 않았다. 무엇들이 쉼 없이 오고 간 것일까? 수천 년 동안 유유히 흘러온 이 교역의 강은 이슬람교도들의 무자비한 파괴 속에서도 그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어쩌면 교역보다 훨씬 중대한 상상의 문제"를 그 속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도서관의 중국문헌 담당 큐레이터인 프랜시스 우드는 실크로드와 그 주변의 다양한 나라들에 대한, 여느 실크로드 책에서는 볼 수 없는 도판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보기 드문 시각자료들은 수많은 정보와 생소한 지식을 실어야 하는 실크로드 관련 서적의 특성상 산만하고 난삽해질 수 있는 위험을 완충시키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저자는 현장감을 전하기 위해 각 지역에 관한 수많은 여행기와 탐험기 속에서 이런저런 흥미롭고 유용한 단락을 발췌해내는 놀라운 예리함까지 갖추었다. 이로써 우리는 그녀가 이 책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와 독서를 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녀는 마르코 폴로(저자는 폴로가 중국에 간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전 선교사들의 기록에서부터 1천 년 가까이 돈황의 비밀 석실에 숨겨져 있던 유물들을 영국으로 가져간 오럴 스타인의 탐험기, 나아가 1930년대의 여행기록들까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한편 그녀는 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운 교류의 역사를 균형 있게 기술하고 있다. 법현(法顯)이나 현장(玄?)에 관한 중국사 전문가다운 서술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중국문헌을 참고하는 박식함으로 저술의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도시들과 모래 속에 묻힌 보물들, 이국적 상품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흥미로운 전설들을 접하면서 실크로드의 미스터리와 그 마력에 빠진 사람들은 저자의 식견에 찬사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추천사

"폴리오 소사이어티의 출처에 어울릴 만큼 충분하게 도판을 실은 이 책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전설로만 아는 세계에 대한 훌륭한 개론서이다."
- 퍼거스 플레밍 / [타임스]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길에 대한 아주 특별한 역사서이다."
-찰스 매튜스 / [산호세 머큐리뉴스]

"수천 년의 역사에 바치는 아름다운 찬사로, 그 속에서 실크로드는 교역의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풍부하고 값지게 묘사된 역사이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

목차

옮긴이의 말
명칭의 표기에 대하여

1. 끊임없이 흐르는 삶의 궤적
2. 반룡(盤龍)과 가는 양털-옥과 실크
3. 그리스-로마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그리스-로마로
4. 하늘이 버린 민족-흉노와 한(漢)나라 시대의 교역
5. 교역과 종교의 확산-토하라인과 소그드인
6. 중앙아시아 문물의 유행
7. 천불동-실크로드의 불교
8. 탕구트족, 몽골족, 네스토리우스교도 및 마르코 폴로
9. 장미 정원-명나라와 사마르칸트에 간 사람들
10. 그레이트 게임과 실크로드
11. 아시아의 차가운 품에 사로잡힌 사람들-실크로드의 탐험가들
12. 사냥 전리품과 호랑이 창자-실크로드에서의 사냥과 이론화
13. 표본의 확보-오럴 스타인
14. 마지막 발굴-펠리오, 폰 르 코크, 워너
15. 아기 장군-1930년대의 실크로드 여행

에필로그- 오늘날의 실크로드
찾아보기

본문중에서

자이덴슈트라세(Seidenstrasse) 또는 실크로드(Silk Road)라는 로맨틱한 이름은 사실 최근에야 등장한 것이다. 1877년 독일의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인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이 이 명칭을 붙이기 훨씬 전부터, 적어도 기원후 1세기부터 중국인들은 수도에서 "서역(西域)"(대략 옥수스 강까지)으로 가는 남로와 북로 등을 지칭하는 자신들의 용어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비단이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유럽까지, 즉 중국에서 로마에 이르는 길들을 따라 운송되었고, 그리고 이러한 몇 갈래의 길들을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을지라도 "실크로드"라는 말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용어는 끊임없는 여행을 암시하지만, 실제로 상품들은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거치면서 일련의 중개상과 루트를 통해 이동되었다. 실크로드의 전 구간을 실제로 가로지른 사람의 수는 매우 적었다. 초창기에 그들은 주로 다양한 신앙을 가진 선교사들이었으나 19세기부터는 탐험가, 지리학자, 고고학자들도 등장했다.
(/ p.14)

실크로드에 관한 이야기를 남긴 유럽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경~1324경) 또한 타림 분지로 가는 길에 겪은 추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파미르라고 하는 이 고원을 지나려면 꼬박 12일을 가야 한다. 이 12일 내내 사람의 거주지도 몸을 피할 만한 곳도 없다. 여행자는 반드시 식량을 지니고 가야 한다. 여기서는 고도와 추위 때문에 새 한 마리도 날지 않는다. 그래서 내 장담하건대, 이 엄청난 추위 때문에 여기서는 불을 피워봤자 불빛이 그리 밝지도 않고 색깔도 다른 곳과는 차이가 있으며 음식이 잘 익지도 않는다. 이제 북동쪽과 동쪽으로 우리의 경로를 따라가 보자. 이러한 12일간의 여정이 끝나면 여행자는 동쪽-북쪽-동쪽으로 꼬박 40일도 넘게 산을 넘고 비탈길과 협곡을 따라가면서 수많은 강과 사막을 건너야 한다. 이러한 여정 내내 사람의 거주지도 피난처도 찾을 수 없으며 식량은 직접 준비해 가야 한다." 타림 분지 가장자리로 내려오면서는 "넓은 모래 지역을 만나고 (...) 꼬박 5일간 모래 황무지를 지나가야 하는데, 그곳의 물은 대체로 고약하고 쓰지만 몇 군데에서는 깨끗하고 달다"라고 기록했다.
(/ p.22)

실크로드 주변의 야생동물은 겁이 많아 좀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그보다도 오늘날 이 지역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오아시스의 북적거리는 시장에서 여전히 다양한 민족들과 마주칠 수 있다는 것이다. 늘 그래왔듯 그들은 통치자들의 흥망성쇠와 정치적 변동에도 아랑곳없이 카슈가르의 일요시장 같은 장터로 모여든다. 염소 떼와 작고 강인한 말들, 그리고 드문드문 보이는 낙타들의 발길에 먼지가 이는 가운데, 오래된 번화가의 비좁은 거리에서는 항아리와 냄비, 안장과 마구, 전통 악기 따위를 만들고 있으며, 양고기 케밥이나 당근과 쌀을 넣은 필래프를 노점에서 요리하고 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상업에 종사하는 유목민들은 아직도 의상으로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다. 위구르인은 검은 벨벳으로 수를 놓은 챙 없는 모자를 쓰며, 지금도 여성들은 이카트(ikat) 직조로 줄무늬를 넣어 만든 비단옷을 입곤 한다. 키르기스 남자들은 테를 위쪽으로 젖힌 검은 모자를 쓰는데 흰색으로 안을 댄 경우도 있다. 그리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정 코르덴 코트를 걸치는데, 중국 상인에게 누비이불을 주고 사온 화려한 비단이나 커다란 분홍 장미 무늬가 있는 붉은 면(綿)으로 안을 댄다.
(/ p.29)

실크로드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약 7천 년 전부터 중앙아시아 사막 주변의 오아시스 도시들과 중국 사이에서는 물품들이 교역되었다. 실크로드 남쪽 루트에 있는 호탄 지역으로부터 운송되었던 최초의 물품은 옥(玉)이었다. 옥과 비교했을 때 비단이 훨씬 더 먼 거리에 걸쳐 교역되었다는 사실만 없었다면, 지금도 옥이 호탄에서 중국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운반되고 있으므로 실크로드보다는 "제이드 로드(Jade Road)"라는 이름이 더 적절했을지도 모른다. 한때는 신석기시대에 중국에서 가공된 모든 옥이 이 지역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그 이후로 다른 옥 산지들이 중국 남동부의 태호(太湖)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 p.33)

흉노로 알려진 유목민족의 약탈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서역"을 탐험하도록 이끄는 자극제가 되었다. 중국 북서쪽 변방에 살던 유목민들은 인접한 땅에서 농사를 짓는 중국인들을 끊임없이 침략했고, 이에 진저리가 난 중국은 그들을 자기네 땅 밖에 묶어두고자 감숙성(甘肅省)에서 만리장성의 구축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장벽도 별 효과가 없었다. 기원전 201년 흉노는 산서성(山西省)을 침략하여 대동(大同) 근방에서 황제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중국 영토 깊숙이까지 침투해 들어간 이런 식의 공격은 기원전 182년, 181년, 177년, 169년에도 발생했으며, 기원전 166년에는 14만의 흉노 기병대가 중국 수도에서 불과 3백 리 떨어진 지점까지 육박하기도 했다.
(/ p.61)

최근의 분석에 따르면 누란 묘지의 미라들은 일찍이 기원전 2000년경에 매장된 것으로 보이는 반면, 체르첸 매장지는 기원전 100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이곳이 소금기가 감돌고 바람이 몰아치는 불모의 모래땅이지만, 묘지를 둘러싼 마른 나무줄기 고리, 무덤 속의 마황(麻黃) 가지 다발, 화살과 바구니 등은 모두 수천 년 전에 반(半)정착생활을 가능하게 했던 다른 환경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나라 시기의 중국인들이 처음 중앙아시아로 들어갔을 때만 해도 누란은 풍부한 물과 음식이 있는 카라반의 주요 휴게소였다. 기원후 330년경 발생한 끔찍한 홍수는 도시를 파괴했으며, 로프 호수는 점점 말라 소금지대가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많은 여행자들은 계속 관례적으로 쉼터나 양식도 제공되지 않는 이 북쪽 루트의 누란 유적을 지나갔다. 이때 이후로 남쪽 루트가 좀 더 길긴 하지만 더 안전한 길이 되었다.
(/ p.80)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와 중국인의 의복과 건축, 생활방식을 변화시킨 놀라운 수입품은 의자였다. "7세기 일본은 당(唐)나라를 복식과 문화의 귀감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다면, 지금도 남아 있는 일본인의 관습을 통해 중국인들이 바닥에 깔린 방석 위에 앉았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최근까지 간직되어온 일본의 전통 가운데 많은 측면이 당나라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건축에서 서법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문화의 차용이 그 당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기모노는 그 이후 서서히 변해왔지만, 높은 허리라든가 꽉 끼는 몸통 등의 기본 형태는 (양귀비 때문에 보급된 넉넉하고 허리가 느슨한 중앙아시아 양식 또는 후대 송宋나라의 앞섶을 교차시키는 헐렁한 예복보다는) 7세기의 중국 의상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일본의 전통 건축물은 당시 초점이 (방바닥을 기준으로 하여) 낮았던 중국 건물의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방바닥을 기초로 하는 과거 자리배치의 흔적이 지금도 중국어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 p.107)

사막의 오아시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꼽으라면 단연 돈황(敦煌)과 그 부근의 천불동(千佛洞), 즉 1천 부처가 있는 동굴일 것이다. 돈황은 거대한 오아시스 거주지로서 상당한 인구에 갖가지 신앙을 위한 사원들도 많이 있었다. 목화밭이 무성했고, 양이며 염소들이 널따란 초지에서 풀을 뜯었다. 몇십 킬로미터 떨어진 사막의 모래땅 한가운데 솟아오른 기다란 역암 절벽 밑으로 조그만 강이 흐르고, 그 제방 위에는 포플러나무가 빽빽이 늘어서 있다. 기원후 4세기에 이 절벽에 동굴들이 파이기 시작했으며, 이후 일곱 세기에 걸쳐 점토로 만든 불상이라든가 바미얀(Bamiyan)과 간다라 같은 옛 불교 지역의 영향을 받은 벽화가 석굴들 속에 점차 들어찼다. 산뜻하고 푸른 포플러 울타리 뒤편의 절벽은 여전히 장관을 뽐낸다. 컴컴한 석굴들이 층층이 절벽을 뒤덮고 있으며, 거대한 불상을 품고서 절벽 한가운데 서 있는 낡은 전각의 굽이진 흑색 기와지붕이 절벽 꼭대기 위로 솟아 있다.
(/ p.110)

탕구트족의 최후는 아직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카라호토에 기반을 둔 나라는 1227년 칭기즈 칸이 벌인 원정(칭기즈 칸도 이때 죽었다)으로 멸망했음이 분명하지만, 카라호토의 대불탑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그중 몇 가지는 150여 년 뒤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동양학연구소의 탕구트 전문가인 크세니아 케핑(Ksenia Kepping) 박사는 이 불탑에 두 차례에 걸쳐 유물이 채워졌던 것이라고 보았다. 처음에는 어느 이름난 여승의 묘탑으로 축조되었는데, 원나라가 명나라에 함락될 즈음(14세기 중엽) 다시 열렸고 이때 불탑 속에 안치된 유물들이 결국 미니아 또는 탕구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되었다. 이러한 후대 유물들의 연대는 역사가들에게 난제를 던져준다. 가령 몽골의 침략에 관한 전설로 연상되는 바는, 카라호토와 그곳에 있던 미니아 또는 탕구트 주민들이 1227년에 완전히 사라졌으며, 13세기 말 카라호토라는 번성한 도시가 있었다는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가 폴로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또 하나의 사례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탕구트 유물의 연대가 그보다 더 늦다는 것은 탕구트 문명이 몽골의 정벌 이후에도 어떠한 형태로든 존속했음을 시사한다.
(/ p.142)

마르코 폴로의 책은 여행자들에게 더없이 귀중한 정보였다. 저 유명한 항해에 이 책을 가져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마르코 폴로가 일본에 대해 써놓은 몇 줄을 보고 쿠바를 일본으로 착각하기도 했다(폴로는 일본에 간 적이 결코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매카트니(Macartney) 경은 중국 사행(使行)(1792~94)을 준비하면서 이 책에서 배경지식을 얻었다. 하지만 만리장성은 어떤 대목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어마어마한 건축적 위업에 맞닥뜨린 영국 대사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초에 중앙아시아 사막을 건너던 오럴 스타인은 마르코 폴로의 영혼이 자기와 함께한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탐험 이야기를 쓰면서 수시로 그의 말을 인용했다. 역사가이자 작가인 윌리엄 달림플(William Dalrymple)은 1980년대 말에 실크로드와 옛 도성 카라코룸의 유적을 탐사하고자 했는데, 그 계기는 물론 마르코 폴로의 책이었다. 그리고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가 보기에 마르코 폴로는 최고의 이야기꾼이었다. 쿠빌라이 칸이 저녁 땅거미나 "비 온 뒤의 코끼리 냄새"에 기분이 축 처져 있을 때면, 소금의 무게라든가 거리 같은 따분한 것들만 나열하는 다른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마르코 폴로가 그럴싸하게 꾸며 "인적이 드문" 도시나 무역도시, 숨겨진 도시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기운을 돋워주었던 것이다.
(/ p.154)

호탄은 중요한 교역 중심지이자 수천 년 동안 (19세기에 미얀마에서 산지를 발견하기 전에는) 중국에서 가공되는 옥의 주산지였으며, 비단의 생산지이기도 했다. 645년경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호탄을 지나던 중국의 구법승 현장(玄?)은 시장에서 파는 짙고 연한 옥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비단에 찬사를 보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440년에 중국의 공주가 틀어올린 자기 머리에 누에고치를 숨겨서 가져옴으로써 호탄 오아시스에 비단이 유입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비단은 독특한 이카트 직조법으로 짰는데, 날실에 무늬가 들도록 홀치기염색을 하여 물결치는 줄무늬를 만들어냈다. 마르코 폴로도 호탄을 지나갔다고 하지만, 으레 요점을 벗어나곤 하던 능력을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휘한 그는 비단이나 옥에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그저 "무명, (...) 밀, 아마포, 삼베, 술"을 꼽았을 뿐이다.15) 폴로는 또한 이곳 사람들이 포도원과 정원을 가지고 있으며 상업과 제조업으로 살아가고, 군인은 없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보다 6백여 년 뒤에 호탄을 찾아간 오럴 스타인의 눈에는 "수비대 중에서 선발되었음을 나타내는 미늘창과 칼을 지닌 독특한 모습"의 군인들이 확 띄었다. 이때 그는 "중국인들의 취향에 쏙 들어맞는 고운 노란색 리버티(Liberty) 수단(繡緞)"을 선물로 가져갔다.
(/ p.195)

실크로드의 황량한 지역을 이곳저곳 여행한 최초의 대탐험가는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Nikolai Przhevalsky, 1839~88)였다. 첫 번째 탐험(1870~73)에 나설 때 그는 러시아 전쟁부와 제국지리학회, 상트페테르부르크 식물원에서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의 포부는 오르도스 고원의 지도를 그리고 남몽골을 탐험한 다음 야심차게 황하의 수원지를 찾아내고 라싸(拉薩)에 가는 것이었다. 마지막 두 목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전쟁부에 야쿠브베그의 반란 및 카슈가르에 기반을 둔 서투르키스탄 제국에 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다. 또한 제국지리학회를 위해 1만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지역을 측량하고 지도를 그렸으며, "식물표본 5천 개, 조류 1천 마리, 크고 작은 포유동물의 가죽 130장, 파충류 표본 70개, 곤충 3천여 마리"를 채집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과학아카데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 p.216)

스타인의 첫 번째 중앙아시아 탐험(1900~01)은 남쪽 실크로드의 서쪽 끝에 있는 고대 유적 몇 군데를 지도에 담기 위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나온 필사본들이 차츰 인도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영국 외교관들이 문헌자료에 목말라하던 인도의 문헌학 동료들을 위해 호탄이나 카슈가르의 시장에서 사들인 것이었다. 일찍이 회른레가 정부에 주재관들에게 고문서 수집을 지시해줄 것을 호소한 끝에 필사본들이 유입되기에 이르렀고, 그중 다수는 이슬람 아훈(Islam Akhun)이라는 호탄의 보물 사냥꾼이 후의를 베푼 덕분에 입수할 수 있었다.
(/ p.254)

1901년 펠리오는 프랑스 극동학교의 지시로 책을 수집하러 다시 중국에 가서, 삽화를 곁들인 방대한 18세기 백과사전 [도서집성(圖書集成)] 한 질, 도교 경전인 [도장(道藏)]의 어느 명대(明代) 간본 대부분, 그리고 티베트의 칸규르(Kangyur)와 텐규르(Tengyur)를 입수했다. 지금 이것들은 모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06년 그는 "지리학자이자 천문학자" 루이 바양(Louis Vaillant) 박사, "박물학자이자 사진작가" 샤를 누에트(Charles Nouette)와 함께 자신의 첫 중앙아시아 "과학 탐사"에 나섰다. 이들은 타슈켄트에서 출발하여 카슈가르로 갔고, 여기서 펠리오는 "언어학적 조사"에 착수했다. 타림 분지의 툼슈크(Tumshuq)에서는 그레코-불교 양식의 작은 조각상이며 다채색의 조각상을 수집했고, 1907년 1월 2일 쿠차에 이르러 필사본들을 얻게 되었다. 근처의 불에 타버린 사원에서 그는 산스크리트어와 쿠차어로 쓰인 필사본과 목간을 발견했다. 그러고 나서 당시 신강(新疆)의 성도이던 우루무치에서 그들은 스타인이 돈황에서 보물을 찾아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 p.273)

외국인에 의한 실크로드의 고고학적 탐사는 사실상 랭던 워너(Langdon Warner)의 탐험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1881년 번듯한 양키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오늘날 일본 나라(奈良) 부근의 호류지(法隆寺)에 기념되어 있다. 이 절에 서 있는 석탑에는 "교토와 나라를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에서 구한 미국인 학자"에게 바치는 비문이 있다. 그가 일본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기는 했지만, 이 서술은 엄밀히 말하자면 정확하지 않다. 어쨌든 이는 "일본 성인전(聖M人傳)" 속 워너의 위상을 반영하는 것이며, 한편으로 이런 명예는 "중국 악인전(惡人傳)"에서 그가 처한 위치로 인해 상쇄되고 있다. 1904년 그는 라파엘 펌펠리가 서투르키스탄에서 실시한 지리학적·고고학적 탐사에 (엘즈워스 헌팅턴과 함께) 참여하여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조사했다. 그러고 나서 (아직 독립국이었던) 히바 한국을 단독으로 여행함으로써 이곳을 조사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1908년에는 나라 도다이지(東大寺)의 조각 복원가 밑에서 공부를 했으며, 1913년에는 북경에 들어설 미국고고학학교(스미스소니언Smithsonian의 분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자리에 취임하기 전에 그는 파리에 있는 펠리오와 샤반을 찾아갔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러 코즐로프가 카라호토에서 가져온 그림들을 본 다음, 베를린으로 가서 폰 르 코크가 투루판 지역에서 수집한 프레스코들을 구경했다.
(/ p.283)

돌아오는 길에 난주(蘭州)에서 워너는 중국지질조사소의 스웨덴인 수장 안데르손(Andersson) 박사를 만났다. 이 지역에서 여러 신석기 유적을 발굴한 안데르손은 붉은 점토에 검정 소용돌이무늬가 장식되어 무척 아름다운 장례용 항아리를 건져내기도 했다. 이들은 독주를 마시며 안데르손의 최근 발굴품을 감상했다. 이런 식의 만남은 중앙아시아 여행자들의 이야기 속에 끊임없이 나온다. 스타인도 하미 근방에서 우연히 세실 클레멘티 경을 만나지 않았던가. 어느 날에는 외로이 사막을 여행하다가도 다음 날 느닷없이 자기네 족속과 마주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카슈가르에 도착하는 장면들에서는, 러시아, 영국, 스웨덴, 독일의 탐험가들이 실제로는 서로 경쟁하는 사이면서도 분주히 왕래하는 그림이 연상된다. 이듬해 워너는 두 번째 포그 미술관 탐험을 위해 중국에 돌아왔다. 이 탐험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장날 뻔했다. 상해에서 영국 경찰이 학생 시위대를 향한 발포 명령을 내려 11명이 사망하는 바람에 중국인들의 배외감정이 위험스러운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내륙에 있던 선교사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해안의 조약항으로 소환되었을 무렵, 랭던 워너 일행은 돈황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북경의 화학자에게서 얻은 정착액과 접착제를 가져간 것은 물론 젊은 미국인 프레스코 전문가도 데려갔다. 그러나 이들은 석굴에서 성난 농민들 무리와 맞닥뜨렸고, 멀지 않은 곳의 소규모 석굴군에 캠프를 차리려고 하자 같은 일이 또 벌어졌다. 마침내 중국은 서양인 보물 사냥꾼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그고 있었으니, 두 번째 포그 미술관 탐험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워너는 그 대신 미국으로 돌아가 교수하다가 일본을 방문했다. 돈황 17호 석굴의 내용물은 오늘날 북경,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 런던, 그 밖에 세계 곳곳의 소규모 컬렉션에 분산되어 있다. 돈황 필사본을 비롯한 실크로드 발굴품이 분산된 사례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정토진종(淨土眞宗)의 법주(法主)인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가 1902~14년에 불교적 탐사를 세 차례 벌이면서 모은 컬렉션이다. 1908년에는 카슈가르 영사인 조지 매카트니가 휴가를 떠난 사이 대리로 근무하던 A.R.B. 셔틀워스(A.R.B. Shuttleworth) 대위가 이들을 눈여겨보기도 했다. 이 필사본들은 급작스러운 자금난에 빠진 오타니가 별저(別邸, 컬렉션이 소장된 곳)를 처분할 때 함께 팔렸다. 저택의 새 주인이 된 실업가는 조선의 일본 총독에게 광산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컬렉션의 3분의 1을 넘겨주었고, 지금 이것들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또 다른 3분의 1은 오타니가 직접 만주 여순(旅順)의 일본 도독에게 주었고, 나머지는 일본에 남아 있다가 도쿄 국립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독일의 컬렉션은 독일인들이 작업을 벌였던 투루판, 쿠차, 쿰투라 주변 오아시스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수많은 돈황 파편(코즐로프는 천불동을 뒤늦게 찾아갔다)이 있으며, 최상급의 카라호토 발굴품 컬렉션도 간직되어 있다.
(/ p.291)

소련이 붕괴되면서, 실크로드의 몇몇 민족은 모스크바로부터 독립을 달성하여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자신들의 공화국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 지역의 자원을 스스로 개발할 수 있게 되었지만, 부패가 만연하는 바람에 대다수의 주민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기술이 향상되고 다른 곳의 광물자원이 고갈되어가면서, 유전 유망지를 탐사하기가 점점 용이해지고 있다. 교역로로서 실크로드는 대체로 초기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상인들은 이 오아시스에서 저 오아시스로 비교적 짧은 거리를 여행하고, 대부분의 상품도 육로로 로마나 이란까지 운송되기보다는 비교적 짧은 거리를 이동한다. 한 가지 예외는 티베트로 연결된 중국의 공급로로, 예정된 철도가 건설될 때까지는 돈황을 거쳐 다니게 된다. 기다란 유조차 "카라반"이 정기적으로 가욕관과 돈황을 우릉거리며 지나간다. 그러나 오늘날의 실크로드 여행자들은 대부분 관광객이다. 관광업을 장려한 소련 치하에서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여행이 기획되었다. 중국이 통치하는 지역에서도 1980년대 말에 실크로드 관광업이 크게 팽창했고, 계속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옛 유적들은 복원되었다. 사마르칸트의 청록빛 돔들은 햇살보다도 밝게 번쩍거리고, 널따란 레기스탄(Registan) 광장도 여전히 인상적이다. 중국에서는 가욕관의 옛 만리장성 요새가 재건되었으며, 천불동 뒤편 사구(沙丘)에 있는 월아천(月牙泉) 주변의 사원들도 복원되었다. 중국과 구소련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관광업으로 돈을 벌 채비?옛건물을 복원하고, 카슈가르를 중국 철도망에 연결하며, 사막 여행에 필요한 낙타를 공급하는 일 등?를 한 반면, 파미르 고원 건너편의 아프가니스탄은 종족분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마치 그레이트 게임이 결코 끝나지 않은 듯 초강대국들의 먹잇감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광신적이고 호전적인 이슬람 단체 탈레반이 갑작스럽게 출현하면서 수백 년 이상 서 있던 문화유물에 비타협적인 파괴의 광풍이 몰아쳤다. 예전에도 우상파괴적 약탈을 겪은 바 있는 바미얀(Bamiyan)의 대불(大佛)들은 현대식 폭탄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카불과 카피사(Kapisa)의 박물관에 있던 소장품들은 흩어졌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문화적 영향이 전파된 증거인 실크로드의 보물들이 사라진 것이다.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보물들은 2천 년 대서사시의 유산이다. 여러 민족이 어우러진 카라반 숙사, 그리고 면면히 이어진 선교사와 탐험가, 모험가들의 물결을 가슴에 품고 사는 이들에게 이런 식의 문화적 말살은 숨이 멎을 듯한 충격을 던져준다. 뜻밖의 급변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지가 가진 힘은 너무도 강력하여,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좌우한다(언제나 좌우해왔다). 지금도 실크로드의 역사는 계속해서 우리를 강렬하게 매혹한다 제임스 일로이 플레커(James Elroy Flecker)의 상인들도 인정했듯 이런 매혹은 교역 못지않은, 어쩌면 훨씬 중대한 상상의 문제였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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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우드(Frances Wood)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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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 전문 학자로 현재 영국 국립도서관 중국문헌 담당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국제 돈황 프로젝트(International Dunhuang Project)의 운영위원이다. 그녀는 1995년 마르코 폴로의 책은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 여러 여행기를 모아놓은 것이라는 내용의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 갔는가?(Did Marco Polo Go To China?)]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우리에게 이름을 알렸다. 이후 [진시황과 병마용(China's First Emperor and His Terracotta Warriors)](2008), 가장 최근에는 [중국의 매력- 마르코 폴로에서 발라드까지의 작가들(The Lure of China- Writers from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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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E.P.H.E. IV(파리 소르본)에서 둔황 문학과 예술로 박사학위(2001)를 받고, 귀국하여 동서양 문화교류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소개하는 일에 전념하는 독서인이다. 역서로는 『돈황이야기』(공역), 『실크로드』, 『중국의 시와 그림 그리고 정치』(공역) 『안득장자언』, 『바다의 왕국들: 제번지 역주』, 『정원에 물을 주며(관원 선생 문집)』, 『8세기 말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두 갈래 여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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