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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기의 남인계 실학파 문인이자 학자인 이학규의 산문선집. 32세이던 1801년부터 56세이던 1825년까지, 24년간 경상남도 김해에서 유배생활을 보낸 남인계 실학파 문인이자 학자인 저자의 산문을 모아 엮었다.

저자는 유배지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고, 어린 두 자녀를 잃어버리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그의 유배지는 문화적 환경이 열악하여 학문적 연구를 지속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허무한 인생에서의 애상과 한아한 정취에서의 추구를 글로 빼어나게 형상화했다.

형식적 파격과 기이함 추구 등을 엿볼 수는 없지만, 불우한 심사와 정신적 고뇌에 대해 토로하고, 회상과 기억의 정조를 통한 삶의 우수감을 표출하며, 명징한 언어로 한아한 삶의 추구를 그려냈다는 것이 저자의 산문이 독특한 이유다.

이학규李學逵(1770-1835)는 정약용과 함께 남인계 실학파 문인이며 학자이다. 이학규 집안과 정약용 집안은 모두 남인 계통이었다. 그리고 두 집안은 대대로 혼인관계를 맺어 두터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학규의 부인은 나주정씨로, 정약용과 10촌간이었다.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났을 때 그는 외삼촌 이가환李家煥, 9촌 숙부 이승훈李承薰, 인척 정약용 형제 등과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보냈고, 이학규는 경남 김해에서 24년 동안 유배생활을 보냈다. 32세에 유배를 떠나 1825년 56세에 유배지에서 풀릴 때까지 황금 같은 인생의 시간대를 이학규는 김해 지방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울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유배지 김해에서 인자한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했고,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고, 어린 두 자식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이학규의 유배지였던 김해 지방은 문화적 환경이 열악하여 학문적 토론과 저술을 지속할 만한 여건을 갖추지 못하였다. 정약용이 많은 저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강진 지방에 거주하던 해남 윤씨 집안의 후원과 수많은 제자들의 도움이 자리하고 있다. 경제적 궁핍과 열악한 문화적 환경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이학규는 학문적 연구를 체계적으로 계속해 나가기가 어려웠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학규는 답답하고 울울한 심사의 자기 고백, 삶에 대한 허무와 애상의 감정 노출, 한아한 정취에의 추구 등을 빼어난 글을 통해 잘 형상화하였다. 형식적 파격과 기이함의 추구 및 해학미 등을 엿보기는 어렵지만, 불우한 심사 및 정신적 고뇌에 대한 자기고백적 진정의 토로, 회상과 기억의 정조를 통한 삶의 애상과 우수감의 표출, 그리고 간결하면서도 명징한 언어를 통한 한아한 삶의 추구 등은 그의 산문 세계가 보여주는 독특한 면모다. 이러한 심정을 아래 글에서 읽어낼 수 있다.

아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옛날 일이 기억나는구려. 내가 서울집에 있던 어느 초가을, 땔나무도 없고 끼니도 잇지 못할 지경이었소. 한번은 당신이 박고지를 삶고 냄새나는 된장으로 나물죽을 끓이고는 나에게 먹어 보라고 권하였소. 그때 나는 당신에게 먼저 맛보라고 권하면서 서로 바라보며 웃었던 적이 있었다오. 그 뒤로 가세가 더욱 기울어 아이들은 병들어 누워 있고, 박고지와 나물죽마저 맛보라고 권할 수 없게 되었소. 급기야는 계속된 굶주림에 자식마저 병을 얻어 죽게 되었소. 내가 당신과 이별하게 되자, 당신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머리를 숙인 채 내 옷자락을 어루만졌소. 그때 당신의 눈가에는 눈물이 어른거렸소. 그 뒤로 병이 깊이 들어 숨을 헐떡이며 흐느낄 때에도 나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네지 못했다오(?이 아픔, 어찌 말로 다하랴 擬祭丁孺人文?).

유배지에서의 고통 외에 가족사의 불행을 연이어 겪은 이학규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희망과 미래가 없는 참담하고 덧없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는 암담한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한 방편으로 공상과 상념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한다.

우리들 같은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오직 이 망상妄想 한 가지가 있을 뿐이지요. 지금 세상에서 우리들처럼 남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없고 세상에 바라는 것도 없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오. 그런데 이 한 가닥 망상만은 홀연히 하늘 높이 올라가기도 하고 홀연히 저승 세계를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크게는 드넓은 천하 세계를 떠돌고, 작게는 작은 터럭 끝을 헤매기도 하지요. 망상이 모여들면 쇠털처럼 빽빽하고, 변화를 할라치면 공중의 꽃보다도 빠르게 변한답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모습은 마치 잠자리가 물 위를 살짝 스치듯 날아가는 듯하고, 아무리 보내도 다시 돌아오는 모습은 주마등이 빙글빙글 도는 것과 같지요. 밤중에 머리를 숙이고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결코 한 시각도 떠나지를 않는다오. (?꿈꾸는 자의 자유 答某人?)

또한 춥고 굶주리고 번민이 쌓일 때, 혹은 고통과 절망이 심신을 덮쳐올 때, 자기의 현재 상황보다 더 열악한 상황을 애써 상상해 본다. 두려움 속에서 땅 속에 산 채로 순장당하는 사람이나 세상의 근심을 놓지 못하며 목숨을 놓는 사형수보다는 자신의 처지가 낫다고 자위하는 그의 처절한 처지가 참으로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가족을 떠나 유배지에 홀로 있는 작가의 마음은 깜깜한 땅 속에 생으로 묻힌 듯,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는 사형수가 된 듯하였을 것이다.

근심스러울 때에는 사형수를 생각해본다. 혀가 꼬부라지고 숨을 헐떡이는데 눈빛은 아직 죽지 않았고 감정의 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옆을 바라보니, 늙으신 부모가 부르는데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착한 아내가 흐느껴 우는데 무엇을 부탁해야 하나? 자식들을 어떻게 결혼할 수 있게 할까? 집안 세간과 전답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고 있는 사이 저승사자가 도착하니 손을 내저으며 목숨이 끊어지게 된다. (?아침은 언제 오는가: 떠오르는 상념들 譬解?)

이학규의 편지글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와 암담한 상황을 직서하는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작가의 내면 깊이 자리한 번민과 슬픔을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적절한 비유와 상황 설정을 통해 드러내는 데에 이학규 글의 특징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겪는 네 가지 괴로움은 다른 괴로움에 비할 바가 아니니, 그대가 잘 알고 있겠지요. -- 아아! 안락하게 사는 사람은 가시에 손톱을 한 번 찔려도 고통스럽다고 여기고, 파리 한 마리가 살갗을 빨아도 고통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유독 어떤 사람이기에, 혼자서만 이런 고통을 모두 받고 있으며, 이 고통을 구제해 줄 사람도 없고, 이 고통에서 벗어날 곳도 없는 것일까요? 오늘 그대에게 이러한 고통을 다 알려드린다고 하더라도, 저에게는 진정 어떤 보탬이나 손해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온 세상을 둘러보아도 이러한 상황과 이러한 제 마음을 알릴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유배지에서 겪는 괴로움 與某人?)

우리들은 곤궁하고 비천한 사람들일 뿐이지요. 하루 걸러 죽 한 그릇도 제대로 먹지 못할까 걱정하는 형편인데, 어찌 보리밥을 꺼리고 막걸리를 마다할까요? 지금부터는 밥 그릇 박박 긁는 일을 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술 사발이 가득 흘러넘치게 마시는 일을 뜻밖의 행복이라고 여길 겁니다. 다만 이러한 일조차 자주 있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지요. (?보리밥과 막걸리의 행복 答某人?)

이학규는 편지글에서 자신이 겪는 고통을 애써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고통에 처한 자신의 참담한 현실을 여과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는 이 네 가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희망도 없고 그 괴로움에 대해 토로할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절망한다. 죽 한 그릇, 술 한 사발도 뜻밖의 행복이 될 정도의 빈한한 처지를 짤막한 편지글 속에 잘 나타내었다. 당장의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곤궁한 처지에 대한 자조 섞인 한탄이 짙게 묻어나온다.
때로는 유배지에서의 일상을 시시콜콜하게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유배지에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학규의 하루 일상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대는 제가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신지요? 요 근래 저는 천식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담배 한두 대를 피워 무는데, 어느덧 아침 해가 동쪽 창문의 두 번째 눈금에 가 있게 되지요. 아침 밥상을 막 물리고 나면 창난젓 냄새가 속을 뒤집어 놓아, 입과 코를 틀어막아도 그 냄새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깜박 고개를 떨어뜨리고 잠이 듭니다. 잠에서 깨어보면 곁에 있는 사람이 짚신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도 볏짚을 골라 짚신 삼는 걸 도와준답니다. (?무료한 나날들 答某人?)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서 그를 도와 줄 형편이 못 되었고 그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야 했다. 유배지에서의 고통스러운 일상이 손에 잡힐 듯 자세하게, 그리고 자신의 표현대로 시시콜콜하게 그려져 있다. 아침 이부자리에서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중에 잠들기까지의 과정이 시간 순서에 따라 그려져 있다. 창난젓의 냄새가 익숙하지 않아 고생하는 모습도 보이고, 유배지에서의 어려운 살림에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여 이웃의 권고로 짚신을 삼는 일을 도와주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다음에 보이는 편지글에서는 자신이 사용하던 붓 한 자루와 먹 반 조각을 보내면서 아들을 보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일전에 너에게 닳아빠진 붓 한 자루와 소나무 그을음으로 만든 먹 반쪽을 보내 주었는데, 모두 다 못 쓰게 된 것이란다. 네가 글씨를 예쁘게 쓰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내가 일 년 동안 지니고 있던 물건이니, 네가 그 물건들을 보면서 나를 보듯이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는 시 몇 편을 지을 때 이것들로 글씨를 써서 나에게 보내다오. 그러면 나도 네가 손을 움직여 글씨 쓰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구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3 與某人?)

자신이 보낸 붓과 먹이 닳고 닳은 쓸모없는 것이지만, 아버지의 손때와 체취가 묻은 것인만큼 그 붓과 먹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유배지에 홀로 떨어져 지내야 하는 상황에서 가족을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산문들을 통해 조선 후기 실학파 문인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학규의 불우했던 삶의 내면을 조금 더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 일러두기
- 태학산문선을 발간하며
- 버림받은 영혼의 절망과 우수 / 이학규론

1. 만남과 이별
2. 유배지에서의 생활
3. 생활의 발견
4. 글쓰기의 의미
5. 1부 원문
6. 2부 원문
7. 3부 원문
8. 4부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