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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리 : 생물학과 유전학의 역사를 바꾼 숨은 주인공

원제 : Fly : An Experiment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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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현대 생명과학의
숨은 영웅에게 바치는 찬가다”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APCTP)가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과학 고전 50’으로 선정한 책

생물학의 역사에서 큰 변곡점을 맞이할 때마다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켰던 주인공이 있다. 1900년 모델 생물로 데뷔한 이후 벌써 120년 넘게 과학자들의 애정을 독차지한 실험동물, 바로 ‘초파리’다.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생물을 빼놓고 지금의 빛나는 생물학을 이야기하기란 어렵다”고 많은 과학자가 입을 모은다. 실로 역대 노벨생리의학상 가운데 최소 6개가 초파리를 활용한 연구 성과였다.
과학비평가로서 수많은 대중 과학서를 집필한 저자 마틴 브룩스는, 8년간 직접 초파리를 연구한 진화생물학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아는 사람만 알고 있던 초파리의 무용담을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런던, 러시아 등 세계 곳곳의 연구실을 배경으로 그려 나간다. 그 이야기는 발생학, 진화생물학, 유전학의 역사와 궤를 함께하며, 나아가 노화생물학과 뇌신경과학의 발전에도 초파리가 어떻게 이바지했고 세계에 대한 인식의 범위를 얼마나 넓혔는지까지,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
이렇듯 책은 초파리 연구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초파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 편의 과학소설처럼 생동감과 유머러스함이 넘친다. 이 책이 “현대 생명과학의 숨은 공신에게 보내는 찬가”라고 일컬어지는 이유이자, 개정판으로 다시 독자들을 찾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격변의 20세기를 거쳐 21세기 생명과학의 현주소를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영감을 줄 흥미롭고 새로운 고전으로 부족함이 없으리라 기대한다.

출판사 서평

초파리, 인류 운명을 바꾼 세기의 만남!

작은 크기와 까다롭지 않은 습성 때문에 초파리는 기르고 먹이는 데 비용이 얼마 들지 않는다. 500밀리리터 크기의 우유병에 썩어 가는 바나나 한 조각만 넣어 두면 초파리 200마리가 2주일 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암컷 한 마리가 알을 수백 개나 낳기 때문에 번식시키기도 쉽다. 게다가 초파리는 한 세대가 사는 시간도 짧다. 태어나서 생식하고 죽기까지 불과 몇 주일밖에 걸리지 않는다. 1900년 초파리가 하버드대학교 연구실에 처음으로 데뷔하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도 초파리가 거의 한 세기 동안 생물학과 유전학의 발전을 이끌어 올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단지 비용이 싸고 구하기 쉽다는 이유로 실험동물로 선택받은 초파리가 생물학사의 한 획을 긋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 작은 생명체는 자연 선택설의 실질적인 증거를 발견하고 멘델의 완두콩 유전 법칙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최초로 유전자 지도를 완성하는 데에도 누구보다 크게 기여했다.
저자는 직접 초파리를 실험동물로 사용하며 이 작은 동물이 이끈 놀라운 발견들을 목격했다. 그가 이 책에서 보여 주는 초파리의 삶은 우리에게도 큰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이 책은 탄생과 학습, 노동, 죽음,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삶의 여러 측면에 대한 보편적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저자는 각 부마다 초파리 생물학을 통해 삶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각각의 단계를 보여 준다. 그와 함께 탄생과 죽음의 순환 고리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생물학적 사건들을 설명한다. 유전학에서부터 배胚 발생에 이르기까지, 학습에서부터 생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개체의 죽음에서부터 새로운 종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생물계를 바라보는 창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초파리의 아버지’라 할 수 있으며 초파리를 생물학계의 총아로 만든 인물인 토머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이 초파리와 만나 생물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장면들을 흥미진진하게 좇는다. 2부에서는 돌연변이mutation의 원리를 초파리에서 찾는 동시에, 돌연변이 초파리 연구가 유전학 연구의 돌파구가 된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3부에서는 모건에 버금가는 초파리 애호가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가 진화유전학evolutionary genetics을 탄생시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초파리의 학습 능력과 알코올에 대한 민감성, 생체 리듬 연구를 통해 이런 성질들과 인간 유전자와의 연관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4부, 초파리 암수의 사랑 이야기와 부모가 되기 위한 경쟁을 다룬 5부도 흥미롭다. 6부에서는 초파리를 통해 노화의 원리를 찾고 있으며, 7부에서는 하와이의 초파리들을 연구하며 세계적으로 2천 종이 넘는 초파리가 생겨난 까닭과 종의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하는가에 대해 파고든다. 8부에서는 잊혀진 초파리 연구실의 위상을 회상하면서 초파리 게놈genome의 염기 서열 분석에 관해 자세히 논하고 있다.

현대 생물학과 유전학의 오래된 미래

초파리는 생물학 연구의 현실적?재정적?시간적 조건들과 최적의 조화를 이루며, 생물학의 실험 재료로 쓰인 수많은 동물 중에서도 단연 유용한 존재로 자리잡았다. 또한 실제로 과학사에서 아주 오랫동안 명성을 이어왔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이상적인 실험동물이었던 개와 생쥐, 토끼 등에 밀려나 있던 초파리는 박물학이 쇠퇴하고 실험생물학이 떠오르기 시작한 20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주목받았다. ‘짧고 굵게 사는’ 초파리의 매력이 실험 실습에서 큰 영향을 발휘한 것이다. 초파리의 재발견은 기초 유전학뿐만 아니라 발생유전학, 진화유전학으로까지 이어졌다. 지금까지 초파리에 관해 발표된 논문만 해도 10만 편이 넘으며 매일 새로운 논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사실 실험실 밖에서 초파리는 사람들에게 변함없이 쓰레기장을 떠돌아다니는 더럽고 미천한 곤충으로 여겨질 뿐이다. 최초로 완성된 유전자 지도가 초파리의 것이었고, 묻혀 있던 멘델의 이분법을 증명하고, 다윈은 해결하지 못한 고민을 끝낸 것이 바로 초파리였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만 아는 과학계의 비사?史처럼 떠돌아다닌다. 이런 현실은 마치 이 작은 동물이 우리에게 인간뿐만 아니라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 더욱 많은 것을 알려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단순히 초파리의 생물학적 세부 사항들을 알아내기 위해 초파리 연구에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초파리가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생물을 포괄하는 더 넓은 생물학적 그림을 보여 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제는 초파리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생물학 분야를 찾기 힘들 지경이다. 초파리는 암 치료법을 찾는 연구, 알츠하이머병과 헌팅턴무도병 같은 신경변성질환 연구, 알코올 중독과 마약 중독, 수면 장애와 시차증時差症의 유전적 연구에 이용될 뿐만 아니라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대한 조기 경보 시스템으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 하나의 미천한 생물이 20세기 생물학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노벨상 최다 수상은 다름 아닌 초파리?

초파리의 매력은 세월이 지나도 변할 줄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초파리를 통해 발견된 다양한 생물학적 사실들이 인간을 포함해 모든 동물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초파리는 유전학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실험동물이 되었고, 이후 거의 30여 년 간 유전학 발전의 선두를 이끌었다. 유전자들이 염색체에서 직선으로 늘어서 있는 것을 보여 준 최초의 유전자 지도도 바로 초파리의 것이었다.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기술도 맨 처음에 초파리를 대상으로 만든 유전자 지도 작성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 단세포인 수정란이 어떻게 완전한 생물로 발달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것도 초파리였다. 사실, 유전자 치료에서부터 생물 복제와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현대 유전학의 모든 것은 20세기 초에 일어난 초파리 연구가 그 바탕이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3년 토머스 헌트 모건(염색체 유전자 발견)부터 2017년 홀, 로스배쉬, 영(생체 주기 매커니즘 발견)까지 최소 여섯 차례 초파리는 노벨생리의학상의 숨은 공신이었다.
믿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초파리와 인간은 여러 모로 닮았다. 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초파리가 인간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 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초파리의 학습과 기억에서 온오프 스위치처럼 작동하는 ‘리노트’ 유전자와, 장기 기억 스위치를 켜는 역할을 하는 CREB 유전자는 초파리의 지적 능력에도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뿐만이 아니다. 초파리가 알코올을 섭취하면 마치 사람이 취할 때와 같은 행동을 보인다. 밤에는 자고 낮에는 활동하는 일주기를 따라 생체 시계가 흘러가서, 평소의 생활 시간대에 변화가 생기거나 생체 리듬과 관련된 유전자를 조작하면 시차증을 겪기도 한다. 종족 번식을 위한 짝짓기를 둘러싸고 초파리 암컷과 수컷이 벌이는 게임의 전략은 또 어떤가. 그것은 인간 남녀가 행하는 소위 ‘밀당’ 기술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다.
이런 사실들은 그저 인간과 초파리 사이에 비슷한 면이 있음을 보여 주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초파리의 학습과 기억, 알코올에 대한 민감성, 생체 리듬의 작동 과정에 관여하는 다양한 유전자들과 그 기능의 발견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런 유전자들이 초파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살펴보노라면, 인간 역시 유전자에 따라 또 다른 잠재력을 발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된다. 초파리의 교미에서 밝혀진 생존에 대한 갈망과 진화의 전략 역시 양성 간의 갈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초파리가 그야말로 인간의 현재와 미래를 통찰하는 생물학적 창구가 되어 주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비밀을 둘러싸고 앞으로도 풀어야 할 수수께끼는 많다. 차세대 실험동물들이 등장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초파리를 완벽하게 대신할 수 있는 생물은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초파리는 생물학과 유전학의 미래에서도 변함없이 주역의 자리를 지킬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한 한 편의 과학소설

사실 이 책의 저자에게조차도 초파리의 첫인상은 ‘무시할 수밖에 없는 동물’에 불과했다. 순전히 주관적인 저자의 미학적 관점으로 매긴 동물 평가에서도 초파리는 편형동물보다는 위에 있지만, 옆주름고둥보다는 약간 아래, 한마디로 ‘아주 낮은 순위’를 차지했다.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연구 초년생 시절, 저자는 다른 이들처럼 오지에서 살며 화려한 색깔에 깃털이 잔뜩 달린 그럴듯한 실험동물을 찾고자 했다. 물론 그런 그에게 초파리는 일말의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학자들의 진정한 승패가 갈리는 학술회의에서 그는 연구자들을 당당한 승자로 만들어 주는 동물이 다름 아닌 초파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초파리의 스타성을 알아본 사람이 비단 저자 혼자만은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초파리가 슈퍼스타가 되는 데 기여한 사람들과 그들의 연구 과정을 이야기한다. 마치 초파리가 주연이고 과학자들은 조연으로 등장하는 한 편의 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 저자는 진화생물학을 전공한 학자이지만, 대중 독자들을 위한 교양 과학서를 집필하고, 프리랜서 과학 비평가로도 활동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유쾌한 문장과 에피소드들로 초파리의 과학사 데뷔 과정을 기록한다.
프롤로그의 첫 페이지부터 퍼스펙스 병에서 짝짓기에 몰두하는 한 쌍의 초파리에게 존과 요코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손에 땀을 쥐며 응원하는 극적인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후 존과 요코 커플을 비롯하여 다윈, 멘델, 모건, 도브잔스키, 스터티번트 등 다양한 면면들이 지나갈 때마다 이들의 탐구열이 서로 어떻게 얽히고 풀렸는지가 보인다. 저자가 초파리와 모건을 통틀어 털이 덥수룩한 기회주의자들이라 부르고, 만약 다윈이 초파리를 연구할 수 있었더라면 어떤 대가를 치렀을 것인가를 이야기할 때 독자들은 슬며시 웃음이 나면서도 이 책이 여느 교양 과학 도서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저자는 염색체 쌍을 서로 모양이 조금 다른 신발 한 켤레로 비유하거나 초파리의 몸을 미국 지도로 비유하고 멘델의 3:1 법칙을 검은 대문, 흰 대문으로 빗대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렇듯 사전 지식이 없더라도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특징도 이 책의 미덕이다.

[ 주요 내용 ]

초파리 원자로
모건은 실험 진화라는 새로운 연구를 위해 초파리 실험의 규모를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초파리를 수백 마리가 아니라 수만 마리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 돌연변이는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돌연변이를 로또 복권 당첨에 비유한다면, 개개의 초파리는 개개의 복권에 해당한다. 만약 복권을 몇 장만 산다면(실험실에서 초파리를 몇 마리만 기른다면), 당첨될 확률(새로운 돌연변이를 발견할 확률)은 극히 낮다. 그러나 복권의 수를 수천, 수만 장으로 늘리면 당첨될 확률이 높아진다. 초파리를 많이 기르면 짝짓기가 많이 일어나고, 새로운 돌연변이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많은 돌연변이 대립 유전자(대립 형질을 지배하는 한 쌍의 유전자로 염색체 위의 같은 유전자 자리에 위치하며, 대개 서로 우성과 열성 관계에 있다)는 열성 지시이기 때문에, 처음 나타날 때에는 우성인 짝에 가려 그 형질이 발현되지 않는다. 새로운 돌연변이 지시를 발견할 수 있는(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같은 지시를 가진 두 초파리를 짝짓기시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어떤 초파리가 어떤 지시를 갖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무작정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배시키는 초파리 수를 늘리면, 같은 열성 유전자를 가진 두 마리가 짝짓기를 할 확률이 높아진다.
모건은 일단 어떤 돌연변이를 확인하면, 새로운 돌연변이 유전자만 가진 암컷과 수컷을 얻을 수 있도록 초파리들의 짝짓기를 세심하게 조절했다. 그 결과 더 많은 돌연변이가 나타났고, 그러자 다시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진 초파리들끼리 더 많은 교배를 시킬 수 있었다. 몇 달 안에 모건의 실험실은 초파리 원자로 비슷한 공간으로 변했다. (본문 80~81페이지 중에서)

발생이라는 퍼즐을 맞추다
발생은 이처럼 서로 다른 여러 마스터 조절 유전자 집단이 차례로 활성화되며 진행되고, 이것들이 합쳐져 순차적으로 신체의 지역 분할과 배치가 일어난다. 수정란일 때 초파리는 확실한 형태가 없는 타원체로, 눈에 띄는 특징이 거의 없다. 발생이 진행되면서 머리 끝 부분과 꼬리 끝 부분, 상반신과 하반신이 생겨난다. 그리고 분할이 계속 일어나 몸은 일련의 체절들로 분할된다. 체절들은 한참 뒤에야 상동 이질 형성 유전자의 지시로 각자 고유한 특성을 나타낸다.
루이스와 뉘슬라인폴하르트와 위샤우스는 발생이라는 퍼즐에 중요한 조각들을 일부 첨가했고, 그 덕분에 일관성 있는 이야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포들은 스위치가 켜지는 유전자들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세포로 발생하며, 유전자들을 켜고 끄는 일은 마스터 조절 유전자가 담당한다. (본문 118~119페이지 중에서)

종의 기원이 발생하는 장면
1930년대 중엽에 도브잔스키는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서식지에서 초파리를 채집했다. 남쪽으로는 멕시코, 북쪽으로는 캐나다 서부의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와 알래스카, 동쪽으로는 네브래스카 주와 노스다코타 주까지 여행했다. 이렇게 수집한 수만 마리의 초파리를 패서디나로 갖고 와 현미경으로 염색체를 자세히 관찰했다. 도브잔스키가 연구 결과를 대량으로 쏟아 내자, 개체군을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체들의 집합으로 보던 낡은 개념은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갈 운명임이 명백해졌다. 도브잔스키가 조사한 모든 개체군은 유전적 다양성이 풍부했다. 그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유전적 변이는 비정상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
앞에서 말했듯이, 도브잔스키가 맨 먼저 발견한 것은 각 개체군 내에 유전적 변이가 아주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신발 비유로 바꾸어 이야기해 보자. 각 도시마다 대여섯 종류의 신발이 있었다. 그런데 변이성은 개체군 내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개체군 사이에도 존재했다. 다시 말해 도시마다 신발 종류의 명단이 제각각 달랐다. 예를 들어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지저스 부츠Jesus boots(히피 등이 신는 남자용 샌들)와 모카신moccasin(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납작한 신)이 유행했지만, 미니애폴리스에서는 그런 신발은 보기 드물고 대신에 스노 부츠가 인기를 끌었다. 댈러스에서는 지저스 부츠와 스노 부츠를 모두 찾아보기 힘들고, 대신에 카우보이 부츠가 인기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디자이너 스니커즈가 유행하지만, 시애틀에서는 그것을 보기 힘들고 고무장화가 인기를 끌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뉴욕에서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가죽 옥스퍼드 슈즈를 비롯해 모든 종류의 신발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본문 142~144페이지 중에서)

모든 동물에게 보편적인 학습과 기억의 유전자
초파리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학습 및 기억 유전자는 이미 다른 동물들에서도 발견되었다. 사람, 생쥐, 쥐, 선충, 갯민숭달팽이도 초파리의 CREB 유전자와 DNA 염기 서열이 일치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 사실, CREB 유전자는 동물계 전체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분자 스위치로 보인다. 예를 들면, CREB 유전자는 초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생쥐에서도 장기 기억 스위치를 켠다. CREB 유전자를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면, 단기 기억만 하는 생쥐가 태어난다. 발생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학습과 기억 유전자도 보수적 성격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 역시 초파리와 똑같은 유전자 주형으로 만들어져 있다면 어떨까? 기억 조작이 가능한 흥미로우면서도 두려운 미래의 모습이 눈앞에 다가올 것이다.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다 배웠다가 거기서 나오는 순간 그것을 싹 잊어버리는 자신을 상상해 보라. 또, 첩보 요원에게 CREB 유전자를 과다 주입함으로써 사진적 기억력을 갖게 만들면 어떨까? 열 충격 촉진제를 써야 한다면, 그 첩보 활동은 아프리카나 중동처럼 더운 지방에 국한될 것이다. 열 충격 촉진제를 없애도 된다면, 전 세계 어디서나 환상적인 첩보 활동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온도를 조절하는 인자가 전혀 없다면, 여러분의 뇌는 금방 정보 과부하 상태가 되고 말 것이다.
좀 더 진지하고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초파리는 새로운 약과 유전자 요법을 이용해 선천적 학습 장애나 뇌졸중 환자, 알츠하이머병 환자를 치료하는 미래를 시사한다. 머리에 손상을 입어 상실한 기억은 되살리는 반면,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외상성 기억은 화학적으로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183~184페이지 중에서)

암컷을 조종하는 정액 단백질
이러한 발견은 정액의 전통적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다. 정액은 단지 정자를 운반하는 액체 매개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전통적 견해였다. 그 속에 포함된 다양한 화학 물질은 정자가 난자를 찾아 떠나는 긴 여행을 돕기 위한 일종의 화학적 도시락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가설은 어디까지나 추측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초파리와 일부 곤충의 정액을 제외하고는, 정액 속에 포함된 화학 물질들이 실제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사람의 경우에도 정액 속에 포함된 대부분의 성분들이 정확하게 어떤 기능을 하는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초파리의 정액이 좋은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최초의 단서는 1950년에 곤충생리학자들이 정액이 암컷의 행동을 조종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등장했다. 암컷 몸에 직접 주입한 정액 은 암컷의 성적 충동을 억제하고 산란을 촉진했다. 만약 맨 마지막에 교미를 한 수컷이 자신의 정자로 이러한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 수컷은 태어나는 새끼의 아비가 될 확률이 크게 높아질 것이다.
훗날 이러한 효과를 일으키는 화학 물질은 고환 바로 옆에 위치한 부속샘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부속샘 안에서는 단백질이 만들어지는데, 이 단백질은 사정을 통해 적의 영토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대기한다. 지금까지 모두 20여 종의 단백질이 확인되었지만, 최근의 추정에 따르면 이 단백질 분자 무기에는 많게는 100여 종의 단백질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부모가 되기 위한 경쟁 때문에 정액 단백질은 암컷의 몸속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간다. 일부는 생식관 근처에 머물고, 일부는 아주 멀리까지 가는데, 혈액을 타고 흘러가 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결과로 진화는 자기도 모르게 암컷의 몸을 모든 전선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으로 바꾸어 놓은 셈이다. (본문 214~215페이지 중에서)

‘므두셀라’ 돌연변이는 왜 널리 퍼지지 않았을까?
‘므두셀라’ 돌연변이 초파리는 광범위한 환경 스트레스에 강한 저항력을 보인다. ‘므두셀라’ 초파리는 단 하나의 유전자에 일어난 한 가지 변화만으로도 열과 굶주림, 그리고 자유 라디칼 생성을 촉진하는 제초제를 잘 견딜 수 있다. 이 유전자가 만들어 낸 단백질이 왜 이러한 마법의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아직 아무도 확실히 모른다. 이 단백질은 세포막 안쪽에 자리 잡고서 전체 방어 전략을 살피면서 지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단백질의 놀라운 효능은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에서 분자의 반응을 조절하는 속도 또는 효율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므두셀라’ 돌연변이는 흥미로운 생물학적 역설을 제기한다. 만약 어떤 돌연변이 유전자가 초파리에게 스트레스에 더 잘 견디고 더 오래 살 수 있게 해 주는 새로운 형태의 단백질을 만들게 한다면, 왜 진화는 이 돌연변이를 진작 발견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것이 그렇게 유리한 것이라면, 왜 ‘므두셀라’ 돌연변이가 자연 초파리 개체군 사이에서 널리 퍼지지 않았을까? (본문 248~249페이지 중에서)

추천사

전주홍(서울대 의과대학 생리학교실 교수 | 《과학하는 마음》 저자)
《초파리》 감수와 추천사를 의뢰받고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모르게 감탄과 탄식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지금까지 이 책을 모르고 있었을까. 초파리의 공은 박물학의 전통을 실험생물학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알고 보면 초파리는 생물학의 역사에서 큰 변곡점을 맞이할 때마다 늘 그 자리를 지켰던 주인공이었다. 그 주인공 덕분에 우리는 생명의 비밀을 쥐고 있는 유전자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라도 이 책을 읽고 추천할 수 있어 얼마나 큰 다행인가.

권오길(강원대 생명과학과 명예교수 | 《인체 기행》 저자)
저자는 이 책에서 지난 100여 년 동안 초파리가 실험동물로 살아온 역사를 돌아보고 하나의 미천한 생물이 20세기 생물학게 어떻게 큰 도움을 주었는지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책을 읽다 보면 초파리를 통해 생물계 전반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고, 연구실에서 인생을 다 보내는 학자들의 즐거움과 슬픔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깊은 과학 지식이 없어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어 좋다. … 호기심 왕성한 청소년들, 혹은 나이와는 관계없이 초파리라는 곤충에 궁금증을 느끼는 이들이라면 열독할 만한 책으로 책임지고 추천한다.

목차

개정판 추천의 글 / 숨은 영웅에게 바치는 헌사
초판 추천의 글 / “초파리를 빼놓고 생물학을 논하지 말라.”

프롤로그 / 초파리, 20세기 생물학과 유전학의 상징


1. 유전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다
현대 유전학의 기초를 세운 만남
최적의 실험동물을 찾아서
진화론의 맹점
더프리스의 돌연변이설
멘델의 유전 법칙
흰색 눈을 가진 초파리
최초의 유전자 지도

2. 돌연변이와 유전자 지도
유전학 연구의 돌파구
즉각적인 돌연변이 시대의 의미
수정란은 어떻게 완전한 생물로 성장할까?
마스터 유전자의 발견
조절 유전자와 발생
유전자 낚시

3. 진화유전학의 탄생
야외로 나간 초파리 실험
수학이 유전학의 방향을 바꾸다
자연 선택을 뒷받침하는 증거
초파리실의 분열
진화유전학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만약 다윈이 초파리를 연구했더라면……

4. 초파리가 인간에 대해 알려 준 것
초파리의 뛰어난 지적 능력
점핑 유전자를 이용한 새로운 돌연변이
학습과 기억 유전자의 미래
우리는 왜 술을 좋아하는가?
생체 리듬의 수수께끼

5. 짝짓기를 둘러싼 진화 게임
초파리의 성생활 연구
부모가 되기 위한 경쟁은 뜨겁다
무엇이 암컷의 수명을 단축시키는가
양성 갈등에 대한 새로운 시각

6. 노화의 비밀을 밝혀라
장수 유전자의 발견
생물은 왜 늙는가
자유 라디칼의 공격
종마다 수명이 제각각 다른 이유
영원한 삶을 얻으려면 섹스를 포기하라
최선의 답은 무엇일까?

7. 세상에서 종 분화가 가장 활발한 곳
종의 기원이 만발한 장소
지구상에서 가장 외딴 군도
종 분화의 수수께끼
‘종’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도브잔스키의 종 개념이 흔들리다

8. 초파리, 거의 모든 생물학의 역사
사람들에게 잊혀진 초파리실
초파리에 관한 또 하나의 위대한 발견
초파리의 세기
첫 번째 에필로그 / 초파리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
두 번째 에필로그 / 초파리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열 가지

감사의 말

저자소개

마틴 브룩스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

진화생물학자이자 과학비평가로서 수많은 대중 과학서를 집필하였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에서 생물학을 공부하고, 8년간 초파리를 연구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손에 잡히는 유전학Get a Grip on Genetics》과 《무엇이 위대한 아이디어일까?-유전학What’ the Big Idea?-Genetics》 《극단적 조치-프랜시스 골턴의 빛과 그림자Extreme Measures-The Dark Visions and Bright Ideas of Francis Galton》 등이 있다.

이충호 [역]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영문학을 부전공했다. 현재 과학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1년 우수 과학 도서 번역상과 제20회 한국 과학 기술 도서 번역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블랙홀 여행', '과학의 슈퍼스타 20'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말랑하고 쫀득한 과학 이야기', '말랑하고 쫀득한 세계사 이야기', '물리가 뭐야?', '화학이 뭐야?', '신의 괴물', '이야기 파라독스', '와인 전쟁', '놀라운 하늘', '1001마리 개미', 진화심리학', '천개의 뇌'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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