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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무휴의 사랑 : 나와 당신을 감싼 여러 겹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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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나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반하면서 시야를 넓혔고
그래야만 성숙해질 수 있는 유類의 인간이니까”


[연중무휴의 사랑]은 1990년생 백말띠 여성 임지은의 산문집이다. 그가 여기에 쓴 33편의 글엔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연민이 배어있고, 그 톤은 서늘한 동시에 유쾌하다. 무엇보다도, 터무니없을 만큼 솔직하다. 이 산문집은 어느 딸의 책이며, 어느 장녀의 책이다. 누군가의 언니가 쓴 책이자, 누군가의 연인이 쓴 책이다. 그리고 어느 페미니스트의 책이다. 페미니즘의 언어가 식당에서 새벽까지 일하는 엄마를 와락 껴안아줄 수 있길 바라는, 페미니스트의 책이다. 때때로 엄마가 여성의 편을 들지 않더라도, 그녀를 끊임없이 기다려주고 같이 몸 부딪치며 걸어가려는 페미니스트의 책이다.

임지은은 이 기울어진 남성중심사회에 만연한 개수작들을 밝히며 통렬하게 분노한다. 그는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곤죽이 되기 쉬운 일이었는지를 낱낱이 복기한다. 동시에 그는 거기 살아오며 직면했던 마음속 복잡함과 들쭉날쭉함, 자기 경험의 얼룩진 흔적들도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흔적들이 지닌 엉성함과 모호함을 숨기지 않고 모조리 기록해두었다. 지긋지긋한 가난, 부모의 이혼이 남긴 상처, 아름다움에의 탐닉, 남자들과의 관계, 섹스와 결혼과 임신에 관한 고뇌, 내면의 은밀한 상승 욕구, 그리고 그 모든 걸 뛰어넘은 우정과 연대의 가치에 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연중무휴의 사랑]은 바로 그 길고 긴 성찰의 기록이다.

출판사 서평

슬픔과 다정함으로 단단해진
어느 페미니스트의 분노와 자기반성, 성찰적인 고백
‘끝끝내 누군가를 연민하고 포옹하는 일에 관하여’


임지은은 SNS를 중심으로 활발히 글을 쓰면서 <언유주얼 매거진>과 <빅이슈>, <슬로우뉴스> 등의 매체에 글을 기고해 온 1990년생 작가다.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고 섬세하게 기록하며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을 전하는 그의 글쓰기는 몇 년 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의 출발은 언제나 자신의 경험이다. 그의 경험이 곧 그의 재산이자 재능이며, 그의 경험이 그의 글쓰기를 지탱하는 무기다. 그는 자기 경험과 복잡다단한 내면을 숨기지 않을 용기를 지녔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이 쓸 수 있는 페미니즘적인 글쓰기를 이어왔다.
소년도 아닌 남성 권력자들이 소년처럼 자신의 방종을 즐겼던 세상, N번방을 비롯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지긋지긋하게 계속되는 세상이다. 많은 여성이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여성 연예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여전히 남성들은 “모든 남성이 다 그런 건 아니야”라는 말을 기계적으로 되뇌는 세상이다. 그는 이런 세상에 끔찍이 분개하는 페미니스트이다. 또 이를 뛰어넘기 위해선 여성 스스로를 얽어매고 있는 내면의 매듭 역시 아주 명민하고 주의 깊게 풀어내야 한다고 믿는 페미니스트이다. 이러한 믿음이 그의 이번 책 [연중무휴의 사랑]에 차곡히 담겨있다.

나의 페미니즘은 왜 엄마를 밀어내는가
동시에 그녀를 얼마나 더 사랑하게 하는가


임지은은 부모의 이혼으로 ‘여자 셋만 사는’ 낡은 빌라와 반지하 주택에서 10년 넘게 살아왔다. 그는 매일 새벽까지 식당일을 하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둔 그 집의 장녀였으며, 그래서 일찍부터 대한민국이 얼마나 여성이 살기에 형편없는지를 절감했다. 그는 자신들이 여자라 무시하는 집주인에 맞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싸웠고, 한 가정에 남자가 없으면 당연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세간의 인식에 분노했다. 이 책의 1부 ‘여자 셋만 살았던 집에는’에는 바로 그런 내용들이 담겨있다.
그는 페미니즘의 언어에 반감을 드러내던 ‘무지한’ 엄마와 오래도록 갈등했다. 그는 자신이 맏딸의 권위를 내세우는 동시에, 엄마보다 많이 배운 페미니스트로서 ‘세련된 말을 구사하며’ 엄마에게 폭력적으로 굴었음을 알고 있다. 엄마는 왜 ‘옳은 말’로 더 낫게 바뀌지 않았는가? 그녀를 바꾸는 것은 왜 그토록 힘든 일인가? 가난이 죄인 이 세상에서, 엄마는 발바닥에 박인 굳은살을 아파하며 자신을 키워냈다. 임지은은 엄마의 실금 같은 흰머리를 뽑아주면서, 자신의 페미니즘이 그녀가 오랫동안 보여준 사랑의 언어를 좀 더 닮게 되길 바란다. 누군가가 실수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봐주고, 실수 혹은 실패가 누군가를 키울 때까지 그의 옆에 있어주는 사랑의 언어를.
더불어 임지은은 이제 명절에나 만날 수 있는 아빠를 그리워하며, ‘언니’의 책임감과 무게감을 놓아버리고 동생의 고유성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누군가가 지닌 고유성을 사랑한다. 누군가의 고유한 인격을 사랑하고 존중하기에, 아티스트 니키 리가 이 책에 부친 추천사처럼, 그는 끊임없이 ‘애매한 마음’을 견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비혼을 권할 수밖에 없는 이 불평등한 세상 속에서 한 남성과 사랑에 빠진 자신을 스스로를 바라본다. 그 사랑은 물론 쉽지 않지만, 쉽지 않을수록 더 가치 있고 고귀하다는 명제는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다정하고 성실하게 누군가를 포옹하기 위하여
우리가 성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틀린 사람을 향해서 ‘당신은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에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책의 2부 ‘머뭇거리는 순간들’에는,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는 ‘방식’ 또한 틀림의 지적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이 사회는 형편없이 기울어져 있는 게 분명하다. 허나 작가는 이미 기울어진 곳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어딘가 구겨지고 망가진 이들을 뿌리치지 않고 다정하게 손을 내민다. 그는 오랫동안 그런 다정함을 갖추려 노력했다. 자신과 타인을 둘러싼 여러 겹의 흔적들을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이다.
임지은은 누구든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며, 우리 모두 상처를 주는 데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는 과거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던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그는 여자가 여자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 수 있는지, 약자 또는 소수자가 타인에게 얼마나 권위적으로 굴 수 있는지, 지성의 언어가 때때로 얼마나 폭력과 닮을 수 있는지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강자는 약자에게, 남자는 여자에게 상처를 준다. 약자도 종종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간혹 페미니스트도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임지은은 그 사실을 아프게 인정한다.
책의 3부 ‘무해함에 관하여’에서 임지은은 그처럼 자신을 무해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부정확한 일인지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세상은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하고, 타인과의 구체적인 관계-맺기는 언제나 어렵다. 여기서 우리가 자신을 무해한 존재로 단정해버리면 놓치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 ‘무해한 사람’의 언어는 이 사회의 반복되는 폭력과 많은 이들의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 정확한 언어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상처를 줄 수 있으며, 바로 그러한 인식만이 진정 다정하고 성실하게 누군가를 포옹하게 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작가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 것은 그러한 다정함이었다.

서로에게 무해해야 한다는 편견 너머로
기어이 무언가를 무릅쓰는 일에 관하여


임지은은 과거 중요한 결정 앞에서 머뭇거리며, 수없이 실수하고 실패했다. 그는 자신이 엉성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책의 4부 ‘엉성한 사람’에 잔잔히 펼쳐지듯, 그는 성형외과에서 견적을 받아보았고, 여러 남자들과 의미 없는 관계를 맺어보았으며, 자신의 특별함에 취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그는 엉성하면서도 자신의 엉성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또 다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무언가를 무릅쓰면서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곁에 지금 단단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남아있다.
그는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누려야 마땅한 독립적인 삶의 지평을 아끼고 사랑한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위해 밥을 차리고 설거지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엄마, 하루 12시간이 넘게 노동하는 택시기사, 청각장애와 지체장애 때문에 층간소음을 유발하는 윗집 아저씨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한다. 그는 세상의 개수작들을 복기하고 독설을 퍼부으면서도, 예의 지식인의 ‘세련된 언변’에서 소외된, ‘세련되지 않은’ 이들에 관해 말하는 걸 멈추지 못한다. 그는 세련됨의 가치를 알고 있고, 기울어진 세상을 알고 있고, 엉성하면서도 들쭉날쭉한 스스로를 알고 있으며, 끝끝내 다른 이들과 이 세상을 향한 애정과 윤리의 가치를 알고 있다. 또 믿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 ‘연중무휴의 사랑’은, 연중무휴 쉬지 않고 자기가 얼마나 ‘복잡하고 유해한’ 존재인지를 정직하게 인식하려는 그의 다짐과도 같다. 작가의 말처럼, 잘 안 되는 상황에서도 자꾸자꾸 사랑을 생각하면 정말로 더 나은 길이 열릴지도 모르니까. 우리가 서로에게 무해하다는 손쉬운 편견 너머에는 윤슬처럼 반짝이는 사랑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연중무휴의 사랑’이란 표현에는 다른 이들의 고유성을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그들과 함께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작가의 의지가 담겨있다. 이 책 [연중무휴의 사랑]은 지극히 성실했던 그 존중의 기록이다.

추천사

옳고 그름 앞에서도 머뭇거리게 되는 애매한 마음이 있다. 살다 보면 딱 들어맞지 않는 순간들이 있으니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사회에서 그런 마음은 이용당하기도 쉽다. 숱한 위험을 감수하고도 애매한 마음에 대하여 한 번쯤 생각해보자는 임지은을 응원한다. 그 마음은 세상을 좀 더 말랑거리게 할 것 같으니까.
- 니키 리 / 아티스트

가령 법치주의란 개념은 정의하기 어렵지만 사람들은 쉽게 법치주의를 긍정한다. 그에 비해 페미니즘을 말할 때에는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이는 게 익숙한 사회다. 임지은은 초장부터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밝힌다. 그러고선 성실하고 다정하게 이 사회를 살아내는 임지은을 탐색한다. 그 성실하고 다정한 집중이 곧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스트가 쓴 페미니즘, 만세.
- 류영재 / 판사

임지은이 써내려가는 글을 사랑했다. 그의 서사에는 무엇인가, 침을 꿀떡하고 삼켜가며 그의 영혼을 궁금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는 엉망인 세상에서 엉망인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신의 불가해함을 고민한다. 그 글쓰기의 결과물은 우리를 감싼 여러 겹의 흔적을 한 꺼풀씩 벗겨내 우리에게 보여준다. 타인의 깊은 이야기는 자신 또한 되돌아보게 하는 법이다.
- 남궁인 / 의사, 작가

목차

제1부 여자 셋만 살았던 집에는

1. 나의 페미니즘은 왜 엄마를 밀어내는가 10
2. 이혼한 부모를 가진 이에게 18
3. 이혼시 고추없어구 여자셋만살아동 만만한번지 25
4. 자영업자의 딸 33
5. 한여름밤의 꿈 39
6. 달려라, 효원 44
7. 비혼을 말하면서 결혼을 생각하는 건 51
8. 페미니스트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상) 56
9. 페미니스트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하) 63

제2부 머뭇거리는 순간들

1. 소화되지 않는 말과 기왕의 다정함
2. 약자‘도’ 상처를 준다
3. K가 김희철에게 했어야 하는 건
4. 숏컷 그리고 탈코르셋 소회
5. 탈코르셋과 페미니스트의 조건
6. 바디 포지티브 대실패
7. 뜨거운 굴과 프로준비러
8. 우리는 사랑보다 미움에 소질 있는지 몰라
9.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제3부 무해함에 관하여

1. 균형감각
2. 성당에서의 사춘기
3. 교수님과 개수작 (상)
4. 교수님과 개수작 (하)
5. H는 힙스터의 H
6. N번방을 대하는 당신의 정확한 언어
7. 거기 무해하려고 죽은 사람이 있었다

제4부 엉성한 사람

1. 어느 날의 성형외과
2. 사랑에 무능했던 20대 후반의 초상
3. 전 연인의 결혼 소식
4. 내 친구 김진희
5. 나의 게이 친구 슈에무라
6. 승객과 택시
7. 도전, 비건!
8. 윗집 아저씨께

본문중에서

이 책은 90년생 여성 임지은이 살아오며 마주한 것 중 덜 모르겠는 것 위주로 써내려간 수필이다. 임지은이 근 몇 년간 써온 것 중 가장 나은 실패작들이며, 임지은의 애매한 마음들이 거기 있음을 저 나름 존중해온 결과이다. 책은 페미니즘 에세이라고 알려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보여도 괜찮고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내 삶을 이야기하려는데 내가 사는 사회를 경유하지 않을 수는 없고, 몇 년간 페미니즘은 내가 그 사회와 더불어 내 마음을 응시하게 하는 힘을 길러주었으니까.
( '서문' 중에서)

그런 걸 떠올리며 나는 카메라를 가져오고, 사진을 찍기 싫다는 미경을 어르고 보채 가끔 사진을 찍는다. 그래도 우리 엄마가 제일 예뻐, 같이 맥락 없는 말을 뱉으면서 자꾸 미경에게 말을 걸고, 내가 즐거워한다는 걸 숨기지 않으면서 자꾸 미경에게 다가간다. 실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을 쏟아가며 자꾸 미경에게 기대한다. 내가 아는 가장 제대로 된 사랑을 나도 흉내 내보는 것이다. 현상한 필름 속 미경은 나를 보며 아기처럼 웃고 있다. 나는 메모를 열고 사진을 붙인 뒤 우리가 가진 건 과정뿐, 이라고 적어두었다.
( '1부 - 1장 ‘나의 페미니즘은 왜 엄마를 밀어내는가' 중에서)

나는 이혼가정이라는 단어가 싫지 않다. 그 단어는 내가 무엇을 겪어낸 사람인지 알려주는 동시에 내 부모가 이별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단단한 사람들만이 부서질 수 있다. 정면으로 상실해본 내 가족의 얼굴들은 부서졌지만 사라지진 않았고, 단지 이별한 자리에 남아 윤슬처럼 부드럽게 반짝이고 있다.
( '1부 - 2장 ‘이혼한 부모를 가진 이에게' 중에서)

말하자면 내가 지난 십 년간 살아온 곳은 이혼시 고추없어구 여자셋만살아동 만만한번지일 것이다. 그곳의 거주자들은 남성의 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자리를 비워둔 가난한 여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온갖 형태로 꾸준히 감각해야 했어서. 나는 곤죽이 된 마음으로 자주 미래를 의심했고 어느 새벽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 '1부 - 3장 ‘이혼시 고추없어구 여자셋만살아동 만만한번지' 중에서)

어제는 슬쩍 효원의 노트 필기를 보았다. 익숙한 글씨체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걸 볼 때마다 나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된다. 공부를 안 하는 애들이 자주 그렇듯 수험생 시절 나는 내용보다는 글씨체에 공을 들이며 공부를 했다. 효원이 그런 내 노트를 가져가 필체 연습을 한 건 나중에 알았다. 자매의 글씨체는 같다. 나를 미워하기 충분했던 시절부터 효원은 자기만을 미워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 애는 나를 늘 지독하게 짝사랑하고 있었다.
( '1부 - 6장 ‘달려라, 효원' 중에서)

영훈은 예뻤다. 드러난 영훈의 팔이고 얼굴이고 나는 자꾸 쓰다듬거나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러면서 영훈이 내가 하듯 날 욕망해주길 바랐고, 그런 내 마음은 청결하긴커녕 언제나 추잡스럽고 비위생적이었다. 살균 컵을 써봤자 말짱 꽝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영훈이 내 삶을 어떻게 위협할지도 모르면서 그와의 미래를 알고 싶었다. 기어코 무언가를 무릅써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 나는 사랑에 있어 확신을 찾거나 무해함을 메리트로 여기던 내 태도를 슬그머니 쓰레기통에 버렸다.
( '1부 - 8장 ‘페미니스트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상)' 중에서)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어떤 여성이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거나 살해당했다는 기사를 지나치게 자주 접한다. 겪었거나 겪을 뻔했거나 겪을지도 모르는 일들로 순식간에 끓어오르는 나와 달리 영훈은 어떤 이유건 간에 덤덤할 때가 있다. 같은 일을 두고도 감정의 농도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영훈이 내가 살아온 지옥을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다는 걸, 그런 우리가 동등할 리 없다는 걸 새삼 깨닫고 혼자 읊조린다. 시발…. 지 세상은 괜찮으니 상관없다 이거지….
( '1부 - 9장 ‘페미니스트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하)' 중에서)

여성학회 여자의 비난이 떠올라 움츠러들 때면 건네받은 그날의 언어를 가만가만 꺼내 본다. 다정한 그 말들이 여태껏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만들어준 동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 해도 나는 여전히 진짜 페미니스트의 자격이나 그에 대한 나 자신의 해당 여부는 알지 못하고, 단지 몇 가지만을 수긍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잘 빨아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성에게 들었던 말만큼이나 잘 빨아준다는 이유로 여성에게 들었던 말 역시 한 여성의 삶을 파괴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더 나은 미래로 가기 위해선 현실 속 다정함을 축적해야 가능했다.
( '2부 - 1장 ‘소화되지 않는 말과 기왕의 다정함' 중에서)

내가 혐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 때는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에게 무해하다는 편견 같은 걸 가진 사람을 바라볼 때다. 그래서 끝내 그가 면적을 논하고자 하는 내 말들을 듣지 않았을 때, 자신은 소수자이자 약자이고 그럴 리 없다고 분개했을 때 나는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신이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고.
( '2부 - 2장 ‘약자‘도’ 상처를 준다 ' 중에서)

언어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의 기본 전제다. 나는 내 부모나 운이 나쁜 친구들에게 왜 세련되게 말하지 못하느냐고 탓하지 않는다. 내가 가진 학력에서 배운 거라곤 그게 전부다. 언어는 때로 특권이며, 나 자신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방어하거나 설득할 수 있다는 걸로 말미암아 특권이 증명된다는 것. 연예인에게는 그런 세련된 지성의 언어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고인들은 알려주었다.
( '2부 - 3장 ‘K가 김희철에게 했어야 하는 건' 중에서)

무엇보다 나는 나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나’를 그 자체로 아름답게 보고 무한 긍정하라는 바디 포지티브의 주장은 내가 매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건드리면서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나는 전보다 퉁퉁한 내 팔뚝이 미웠고 잡히는 뱃살이 괜찮지도 않았다. 거리와 티브이 속에선 여전히 마른 여자들이 걸어 다녔다. 어떤 몸을 선호하거나 혐오하는 사회의 풍토를 모른 척하고서, 나를 미워하는 나를 돌보지 않으면서, 그런 게 괜찮지 않은 마음에 대해 더 충분히 들어주지 않고서 갑자기 내 몸을 긍정하고 아름답게 여기는 건 내게 가능하지 않았다
( '2부 - 6장 ‘바디 포지티브 대실패' 중에서)

그러나 어떤 동네에서는 좁은 골목 어딘가의 차에서, 어린아이의 무지를 이용해 천 원으로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사람이 있다. 어떤 동네에서는 여자아이의 자라지도 않은 가슴을 주물거리며 골목을 배회하는 다 자란 남성이 있다. 같은 동네의 골목에서마저 균형은 없다. 거기서 자란 남성은 그 골목의 정다움을 기억하고, 거기서 자란 여성은 자기 딸을 걱정한다. 미아동 내 친구는 내가 겪은 일을 모른다.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자란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불균형 속에서 자란다.
( '3부 - 1장 ‘균형 감각' 중에서)

그러나 나는 거기서조차 피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서도 종종 생각했다. 그 시절부터 느꼈던 두려움이나 무력감에 대해, 어느 성별과 가까워야 성당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던 성당의 여자들에 대해, 여전히 또 언제까지나 성모마리아는 조용히 바깥에 머물러 있던 일에 대해…. 그러니까 내가 겪을 삶의 예고편과도 같았던 그 기억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이 없는 옛 친구에게 기도하듯 묻는 밤들이 있었다. 여전히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흐린 하느님에게 말을 거는 밤들이.
( '3부 - 2장 ‘성당에서의 사춘기' 중에서)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합리적’이기 위해선 물어야 하지 않을까. 여성을 대상으로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범죄들이 뒤늦게 문제가 되는 지금, 어쩌면 범죄를 용인하고 추동해온 기존 사회란 가해자 위주의 소통 양식을 선택하고 통지해온 게 아닐까? 그들이 말하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소통의 양식은 피해자를 대변할 수 있을까? 이 사회와 사회의 시민들은 이제라도 기존의 소통이 여성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을 누락시켜
왔다는 맥락에 주목하고, 그와 다른 소통 방식을 구체화해야 하는 게 아닐까?
( '3부 - 6장 ‘N번방을 대하는 당신의 정확한 언어' 중에서)

내게 미투 운동의 의미는 거기 있다. 때론 정당한 그 감각을 더는 피하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는 여성들에게서, 훼손된 얼굴과 유해한 존재로도 기어이 살아가기를 선택한 여성들에게서, 그것이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한 측면임을 인정하는 여성들에게서 나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배웠는데.
( '3부 - 7장 ‘거기 무해하려고 죽은 사람이 있었다' 중에서)

그러니까, 나는 그 무엇도 네겐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싶어 충동적으로 클리닉을 찾아간 거였다. 아무것
도 필요하지 않은데? 이대로도 충분해, 당신 같은 사람을 몰라보는 사람들이 바보야 바보! 막막했던 나는 어떤 권위자가 나의 충분함을 진단해줄 거라 믿었고 그런 싸구려 대사라도 리버브되어 들릴 거라 믿었다. 나는 선량한 의사와 선량한 자본주의에 감사하며 나에 대한 믿음을 다잡는 아주 멍청한 시나리오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 '4부 - 1장 ‘어느 날의 성형외과' 중에서)

그 시기에 나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그런 따돌림은 싸우고 물리칠 수 있는 명확한 대상이 아닌, 저항할 수 없게 내려앉은 분위기 같은 거였다. 밤마다 아이팟에 하루치의 음악을 잔뜩 업로드해 놓아야 다음 날 모르는 척 간신히 버틸 수 있는 그런 거. 나는 매일 귀에 이어폰을 꽂았고, 급식 대신 싸 온 도시락을 먹거나 밥을 굶곤 했다. 그날 텅 빈 교실에서 나는 김진희의 핸드폰을 함부로 계속 여닫으며 문자를 보고 또 봤다. 임지은이 싫고 불편하다는 문자를 한 번 읽고, 임지랑 같이 밥 먹자, 그 문자를 두 번 읽고, 그렇게. 그 문자를 훔쳐보고 지옥 같았던 고3 시절을 견뎌냈다. 나중에 이 얘기를 해줬더니 김진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야, 니 뒷담화도 많이 했는데 네가 본 문자가 하필 그 문자라 다행임, 하고 제 발 저려 했다.
( '4부 - 4장 ‘내 친구 김진희' 중에서)

얼마 전 나는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지 않다고 증명해야 하거나 반대로 이상함을 증명해야 하는 관계에서는 멀리 도망가라고. 나에 대한 증거는 나뿐이니까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 어쩌면 그래서 슈에무라도 멀리 도망간 거 아닐까. 증명하지 않으려고. 그 애는 그 애 자신이 나와 같다고 증명하거나 나와 다르게 특별하다고 증명하려고 애쓰던 과정 중에 날 만난 건 아닌지. 나는 그 애의 남다름 혹은 나와 같음을 그 스스로
증명해보라며 부추기고 이용해버린 건 아닌지. 만일 그렇다면 나는 그 애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지….
( '4부 - 5장 ‘나의 게이 친구 슈에무라' 중에서)

사람들이 서비스를 말할 때마다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장사하는 사람 속은 개도 안 먹어. 다 문드러졌거든. 끊임없이 요구하는 이들에게 엄마는 지쳐 있었다. 한 손님이 12,000원어치 음식을 먹고 주정을 부리다 사라진 날이었다. 그 돈이라도 벌겠다고 나와 있지만, 그 돈 주고서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줄 모르겠다고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엄마와 막 토를 치운 참이었다.
( '4부 - 6장 ‘승객과 택시' 중에서)

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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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두꺼운 책이나 긴 드라마와 함께 방에 갇히는 일을 좋아한다.
위악이나 냉소, 무성의한 해결,
냉장고 속의 반찬이 상하는 것을 싫어한다.
현재 여러 일을 잡다하게 병행하면서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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