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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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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역사를 즐기고, 느끼고, 되새기기 위해서!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역사 이야기》 저자 수잔 바우어가 처음으로 청소년과 성인 독자를 위해 쓴 세계 역사 이야기. 저자 특유의 생동감 있는 이야기 구성과 매력적인 문체로 세계사 읽기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또한 서양 중심의 세계사에서 벗어나 동양과 서양이 함께 공존했던 역사를 재현한다.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저자는 한국, 중국, 일본 역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중세의 역사는 왕들의 역사이며, 국가가 형성되는 연대기의 시작이기도 했다. 또한 중세는 무엇보다 종교적인 시대였다.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선택했던 기독교는 중세를 삼켜 버렸고, 기독교 국가만이 다른 제국을 앞서갈 수 있었다.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를 믿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이끌어 갈 힘을 얻고자 했다. 기독교와 이슬람뿐 아니라 페르시아와 게르만족의 종교, 그리고 불교까지도 국가 존립의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아메리카 대륙과 일본,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따라서 중세라는 시기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현재 유럽이 겪고 있는 위기 상황, 이슬람과 서구의 길고 긴 반목의 역사,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한·중·일 삼국의 갈등과 대립, 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 바로 중세이기 때문이다.

출판사 서평

세계사 읽기의 기쁨과 즐거움
미국의 한 여성이 자녀들을 집에서 직접 가르치면서 쓴 세계사 책이 전 세계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과 지지를 받았다. 한국에서도 2004년에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역사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첫 권이 발간된 이후 매년 꾸준히 팔리면서 스테디셀러 반열에 들었다. 주인공은 바로 세계적인 홈스쿨링 교육자이자 역사 저술가, 소설가인 수잔 와이즈 바우어. 그의 세계사 책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철저하게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으로 청소년과 성인 독자를 위해 쓴 《세상의 모든 역사》(고대편, 중세편, 르네상스편) 도 마찬가지다. 노튼 출판사 편집자의 제안으로 출간된 이 시리즈 또한 세계사의 흐름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역사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도 부담 없이 술술 읽으면서 세계사 읽기의 즐거움을 한껏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시리즈 중 가장 먼저 출간되는 《세상의 모든 역사: 중세편 1, 2》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에서 시작해 제1차 십자군 전쟁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갈등부터 당나라의 등장까지, 무함마드의 출생부터 샤를마뉴 대제의 등극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무대로 무시무시하면서도 매혹적인 왕과 장군들과 그 밑에서 고통받는 민초들의 애환이 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

생동감 있고 매력적인 스토리텔링
중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카노사의 굴욕'을 저자가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다섯 살에 이탈리아 명문가의 출신인 네 살의 토리노의 베르타와 약혼한 바 있었다. 그 후 하인리히 4세의 나이 열다섯에 정식 혼례가 치러졌는데, 하인리히 4세 자신은 이 혼인에 극구 반대였다. 애초부터 신붓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데, 소녀의 외양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패기 넘치는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잡아끌기에 신부는 너무 소심하고 얌전했다. 하지만 이 혼인을 취소하면 그의 입지에 치명적 손상이 갈 거라며 측근들이 반대하는 통에 왕은 어쩔 수 없이 혼인을 강행했다.
1069년 무렵 하인리히 4세는 이 혼인은 확실히 실수였다고 결론 내리고는 베르타와 이혼할 뜻임을 밝혔다. 이에 독일 성직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에 들어갔으나 이처럼 복잡한 사안은 자신들 선에서 해결하기 역부족이라 판단하고 로마로 이 문제를 보내 해결을 요청했다. 로마에서 문제를 받아든 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하인리히 4세를 혼인 서약에서 절대 풀어 줄 수 없다고 못 박았다.(중세편 2, 718쪽)
교황의 서슬에 열아홉 살의 하인리히 4세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는 이혼 요청을 철회하고 계속 베르타와 살며 몇 년 새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았다. 하지만 교황에게서 공개적으로 질타를 당한 쓰라린 기억은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공격적이고 비타협적인 자세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모질게 깨달은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뜻을 억지로 꺽어야 했던 이 일을 잊지 않았다.(719쪽)
1073년 알렉산데르 2세가 세상을 떠나고 그레고리오 7세가 새로운 교황 자리에 올랐다.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에서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그레고리오 7세의 권력 문제에 대해 고심한 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반응을 보인다. 1076년 1월, 하인리히 4세는 왕의 서명을 넣어 서신 두 통을 작성하였는데 로마로 가는 이 편지는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한 힐난을 담고 있었다. 그가 적법한 선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교황직을 강탈해 제 주교의 권리를 짓밟았으며, 더욱 놀랍게도 마틸다라는 이탈리아 귀족층 여인을 유혹했다는 것이었다. 장문의 두 번째 편지는 가십성 기사처럼 그레고리오 7세의 추태를 훨씬 세세하게 열거하고 있었고, 이것이 교황에 대한 하인리히 4세의 저항을 정당화하는 왕실의 선전 문구가 돼 독일 전역에 퍼져 나갔다.

"나를 이탈리아 왕국에서 기어이 떼어 내고 말겠다는 악랄한 저의를 품고 (…) 당신은 감히 수장인 나에게 덤벼들어 지우지 못할 인상을 남겼소. 당신 자신이 말했다더군. 당신이 죽든지 아니면 내게서 내 영혼과 내 왕국을 빼앗든지 둘 중 하나라고. (…) 당신이 교황직에서 가진 허울뿐인 그 모든 권리를 나는 일체 인정할 수 없소.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적법하게 선물 받은 도시 주교좌의 이름으로, 아울러 내가 로마인들로부터 받은 맹약을 걸고 말하노니, 교황직에서 당장 내려오시오!"(722쪽)

그레고리오 7세가 이 편지를 받은 것은 1076년 2월 중순 로마를 향해 가던 길에서였다. 그레고리오 7세와 하인리히 4세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레고리오 7세 역시 협박이라면 질색이었다는 것이다. 2월 22일, 그레고리오 7세는 성 베드로의 권위에 따라 하인리히 4세를 더는 그리스도교 교회에 두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하인리히 4세가 가지는 속세의 권위를 심각하게 뒤흔드는 내용이었다.
교황의 이 공식 발표가 나오자 작센 귀족들이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들고일어났다. 이번에는 하인리히 4세도 그들을 누를 방법이 없었다. 1076년 10월, 하인리히 4세는 자기 앞에 두 가지 선택이 놓여 있음을 깨닫는다. 그레고리오 7세와의 관계를 원상 복구하느냐, 아니면 몇 년의 내전을 겪고 끝내 제위에서 강제로 물러나느냐.
하인리히 4세는 오랜 시간을 끌며 갖은 수모를 견디느니, 눈을 질끈 감고 당장 창피를 한번 당하는 편을 택한다. 황제는 한편에는 가재 도구를 챙겨들고, 다른 한편에는 아내 베르타와 두 살 난 아들이자 후계자인 콘라트를 낀 채, 알프스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참회의 여정에 올랐다. 산악 지대의 날씨는 그들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때는 1월, 몇몇 연대기 작자에 따르기로 100년 만에 가장 혹독한 추위가 닥쳐 길이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였다고 한다.(723쪽)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가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가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오는 줄로만 알고 삼중 성벽으로 에워싸인 요새 카노사로 들어가 은신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나타난 하인리히 4세는 용서를 구하는 참회자의 모습이었다. 성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하인리히 4세를 묘사한 그레고리오 7세 자신의 편지에 따르길, 그는 맨발에 거친 삼베옷을 걸치고 얼굴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를 내려놓고 인종(忍從)하는 모습에 요새 안 사람들 모두 감동했다.

"그곳에서는 (…) 누구든 그의 모습에 큰 자비심과 가련한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니, 사람들은 여러 말로 애원하고 눈물까지 흘리며 그를 위해 탄원했다"라고 교황은 썼다. "어떤 이는 지금 우리의 행태는 지엄한 사도좌의 권위를 보여 주는 게 아니라 몰인정한 전제 군주를 방불케 하는 잔혹함만 보여 줄 뿐이라고 불평했다."(724쪽)

주변의 강권에 떠밀리고 그 자신의 뜻도 있어 하인리히 4세를 용서하게 된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다시 왕의 지위로 올려 주기로 했다. 그 대신 하인리히 4세도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이 관할 교구의 주교를 임명하던 관례는 버리기로 했다. 이후 둘의 화해를 축하하며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하인리히 4세는 식탁에 앉았지만, 한 마디 말도 없이 속으로 생각에 잠긴 채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고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타닥타닥 두드리기만 했다.
이렇게 해서 하인리히 4세는 간신히 왕관은 지켜냈지만, 참회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서방 세계 전역에 한 가지 사실만은 더없이 명백하게 일깨워 주었다. 지상의 통치자와 영혼의 통치자가 서로를 향해 돌진하다 충돌했을 때, 먼저 찌그러지는 쪽은 지상의 권위라는 것을.(725쪽)

서양사, 동양사뿐 아니라 한국사까지
서쪽에서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나는 동안 당시 동쪽에서는 여진족이 발흥하고 있었다. 여진족은 후일 만주라 불리게 되는, 고려 이북의 삼림이 무성한 평원 지대를 근거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11세기 말, 동부 여진족의 한 무리인 완안부가 주변 여진족들을 하나둘 정복해 나가기 시작한다. 국가 형성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705쪽)
이때까지만 해도 여진족은 고려를 성가시게는 했어도 군사적 위협까지는 되지 못했다. 11세기의 고려 왕들은 이들을 저지하고자 압록강 하구에서 시작해 내륙 쪽으로 장성을 건설했다. 이 천리장성은 어중이떠중이 유랑민들을 막는 데는 어느 정도 효과적이었으나, 완안부의 야욕에 밀려 고려로 도망쳐 들어오는 여타 여진 부족의 난민 물결까지 막아 내지는 못했다. 완안부에서는 이들 유민들을 되돌려 보내라는 요구를 고려에 해 왔고, 그러자 고려 장군 윤관은 '별무반'이라는 특별 부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여진족 정벌에 나섰다. 1107년 별무반은 여진족의 영토 안으로 밀고 들어가 동북 9성이라는 방어 진지를 구축해 고려의 북쪽 땅을 지켜 냈다.(706쪽)
그러나 중국을 지배하던 송 제국은 여진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했다. 송이 그간 공들여 정비해 둔 숙련된 지방군은 송 휘종의 치세를 거치며 편제가 이미 다 무너진 뒤라, 여진족은 거의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송의 방어군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1125년 말 황하를 건넌 여진족은 (공물을 요구하고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와 인질을 요구하고 또 물러나는 식으로) 여러 번 단계를 밟아수도 개봉을 정복했다.(708쪽)
송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송 황궁 유민들은 도시를 떠나오며 송 흠종의 어린 이복동생 고종을 챙겨 함께 데리고 나왔다. 그러고는 멀리 남부의 임안에 이르러 그를 황제로 선포한다. 하지만 송은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100년간 중국 남쪽을 다스린나라를 '남송'이라 일컬었으나, 그곳은 송의 무력한 잔당이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모여 있는 데일 뿐이었다.(710쪽)
이처럼 《세상의 모든 역사》는 서양사, 동양사, 한국사가 긴밀하게 얽혀 세계사라는 큰 흐름을 입체적으로 보여 주는 방식으로 서술되었다. 이러한 구성 방식은 저자 수잔 바우어의 집필 의도가 반영된 결과다. 세계사 책이라면 모름지기 서구 독자들이 잘 모르는 동양의 역사를 알려 주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중국과 일본 위주의 서술에서 탈피하여 한반도의 역사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동서양의 역사는 물론이고 한반도의 역사가 나머지 다른 세계와 어떤 연관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손쉽게 살펴볼 수 있다.

세계사의 흐름이 보이는 중세 이야기
수잔 바우어에 따르면, 중세의 역사는 왕들의 역사이며, 국가가 형성되는 연대기의 시작이기도 했다. 또한 중세는 무엇보다 종교적인 시대였다.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선택했던 기독교는 중세를 삼켜 버렸고, 기독교 국가만이 다른 제국을 앞서갈 수 있었다.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를 믿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이끌어 갈 힘을 얻고자 했다. 기독교와 이슬람뿐 아니라 페르시아와 게르만족의 종교, 그리고 불교까지도 국가 존립의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아메리카 대륙과 일본,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따라서 중세라는 시기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현재 유럽이 겪고 있는 위기 상황, 이슬람과 서구의 길고 긴 반목의 역사,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한·중·일 삼국의 갈등과 대립, 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 바로 중세이기 때문이다.

목차

중세편 2

4부 나라와 왕국들
42장 법과 언어 ● 이탈리아, 비잔티움 제국, 불가리아 제1제국, 우마이야 칼리파국, 643~702
43장 과거를 만들다 ● 일본, 661~714
44장 여제의 시대 ● 중국, 티베트, 동돌궐, 683~712
45장 유럽 깊숙한 곳을 향한 길 ● 비잔티움 제국, 우마이야 칼리파국, 하자르족, 불가르족, 서고트족 왕국들, 프랑크족 땅, 705~732
46장 남쪽의 카일라스 ● 우마이야 칼리파국과 인도, 712~780
47장 정화 운동 ● 우마이야 칼리파국, 비잔티움 제국, 이탈리아, 718~741
48장 아바스 왕조 ● 우마이야 칼리파국, 하자르족 왕국, 알안달루스, 724~763
49장 샤를마뉴 ● 이탈리아, 프랑크 왕국, 색슨족 땅, 알안달루스, 737~778
50장 안녹산의 난 ● 중국, 유목민 부족의 북부, 티베트, 남조, 발해, 통일 신라, 751~779
51장 임페라토르 겸 아우구스투스 ● 비잔티움 제국, 아바스 제국, 불가리아 제1제국, 이탈리아, 프랑크 왕국, 775~802
52장 환생한 센나케리브 ● 비잔티움 제국, 아바스 제국, 불가리아 제1제국, 프랑크 왕국, 786~814
53장 성주와 셋쇼 ● 신라와 일본, 790~872
54장 외지인의 승리 ● 중국과 신라, 806~918
55장 제3의 왕조 ● 아바스 제국, 809~833
56장 바이킹 ● 프랑크 왕국, 비잔티움 제국, 알안달루스, 루스인 땅, 813~862
57장 장수한 왕들 ● 인도와 수마트라섬과 자바섬, 814~900
58장 외교와 내정 ● 비잔티움 제국, 게르만인왕 루이의 왕국, 모라비아, 불가리아, 856~886
59장 제2의 칼리프 왕조 ● 아바스 제국과 북아프리카, 861~909
60장 바이킹 대군 ● 브리튼섬, 865~878
61장 철관 쟁탈전 ● 이탈리아와 프랑크족 왕국들, 875~899
62장 간바쿠 ● 일본, 884~940
63장 바실리우스 ● 비잔티움 제국과 불가리아 제국, 886~927
64장 노르망디의 탄생 ● 이탈리아와 서프랑크, 902~911
65장 독일 왕국 ● 동프랑크와 보헤미아, 907~935
66장 돌고 도는 수레바퀴 ● 인도와 스리랑카, 907~997
67장 바그다드 함락 ● 알안달루스,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 바그다드 동쪽 왕조들, 912~945
68장 세 왕국 ● 고려, 요, 송, 918~979
69장 잉글랜드의 왕들 ● 스칸디나비아 왕국들과 브리튼섬, 924~1002
70장 루스인의 세례 ● 비잔티움 제국, 불가리아, 루스인 땅, 944~988

5부 십자군
71장 신성 로마 제국 ● 독일, 이탈리아, 서프랑크, 950~996
72장 성전의 고난 ● 인도, 스리랑카, 스리위자야, 바그다드 동쪽 왕조들, 963~1044
73장 불가르족의 학살자 바실리우스 ● 비잔티움 제국, 아바스 제국, 파티마 제국, 불가리아, 루스인, 976~1025
74장 천명을 수호하다 ● 중국, 979~1033
75장 새로운 땅의 발견 ● 그린란드와 아메리카, 985~1050
76장 대분열 ●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비잔티움 제국, 1002~1059
77장 데인인의 지배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스칸디나비아 왕국들, 헝가리, 노르망디, 1014~1042
78장 노르만족의 정복 ● 잉글랜드, 노르웨이, 노르망디, 1042~1066
79장 스페인의 왕들 ●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1016~1108
80장 튀르크족의 도래 ● 비잔티움 제국과 튀르크족 땅, 1025~1071
81장 잃어버린 송 ● 중국, 고려, 북쪽과 서쪽의 민족들, 1032~1172
82장 카노사에서의 참회 ● 독일, 서프랑크, 이탈리아, 1060~1076
83장 하느님의 부르심 ● 비잔티움 제국, 이탈리아, 독일, 튀르크족 땅, 1071~1095
84장 예루살렘을 건 사투 ● 비잔티움 제국과 튀르크족 땅, 1095~1099
85장 십자군의 여파 ● 스페인과 예루살렘, 1118~1129

본문중에서

1장 신의 이름 아래 하나의 제국을 이루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의 황제 권력을 교회의 미래와 더 단단히 결부시키리라 마음먹고 새로운 수도 건설 작업에도 돌입한 참이었다. 새 수도에는 그 초창기부터 로마 신전이 아닌 그리스도교 교회가 곳곳에 들어서게 할 작정이었다. 흑해와 통하는 연안에 위치한 비잔티움의 옛 도시를 그리스도교 도시로 재건해, 로마에서부터 그곳으로 자기 제국의 수도를 공식적으로 옮기고, 로마에 모셔져 있는 신들까지 함께 새 수도로 데려오겠다는 것이 콘스탄티누스가 전부터 죽 품어 온 복안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일순간에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됐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합법적 정치 세력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의 기치를 내걸고 처음 군대를 출정시키고자 했을 때만 해도,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전혀 생각지 못했다. 교회 또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제국이 그랬듯, 처음 얼마간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매게 된다. 교회도, 콘스탄티누스가 그랬듯, 장차 자신의 미래를 두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야 했다.
아리우스는 [제1차] 니케아공의회(325)에서 이단으로 단죄받자 부리나케 달아나 제국 동 언저리 팔레스타인 땅에 몸을 숨겼다. 이로써 아리우스주의가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자취를 감추기는커녕, 여전히 물밑에는 정통 교설에 만족하지 못하는 아리우스주의의 기류가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누이동생 콘스탄티아만 해도 니케아신조를 그리스도교의 유일한 정통 교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오빠의 명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아리우스주의의 제일 강력한 신봉자로 이름을 떨치는 형국이었다.
콘스탄티아가 그렇게까지 된 건 아마도 사무친 원한 때문이었으리라. 니케아공의회가 열린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325년의 어느 날, 남편 리키니우스를 관용을 베풀어 살려 주겠다고 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가 돌연 약속을 깨고 그를 목매달아 죽였으니 말이다. 황위에 도전하려는 자는 아주 싹부터 잘라 버리려는 듯,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조카이기도 한 누이동생의 열 살짜리 아들도 함께 교수대로 보냈다.
(/ pp.32~33)

4장 페르시아의 위협
페르시아 정도 되는 큰 제국을 경영하려면 아무래도 칼을 잘 휘두르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탁월한 행정 능력도 반드시 받쳐 주어야 했다는 이야기다. 당시에 새로운 통행 패턴을 발명해 낸 것은 혁신이나 다름없었다. 이렇듯 지적이고 영민한 샤푸르 2세였으니, 눈앞의 세상은 다 지배하고 말겠다는 계획을 세운 콘스탄티누스 1세로서는 정말 제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동의 비잔티움으로 옮긴 것은 페르시아의 동방 패권을 그대로 두고 보지만은 않겠다는 무언의 시위이기도 했다. 그래도 샤푸르 2세에게 처음 다가갈 땐 콘스탄티누스 1세도 꽤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샤푸르 2세가 주변의 섭정들을 깨끗이 털어 내자마자, 콘스탄티누스 1세는 서신을 보내 상대에 대한 존중이 담긴 꽤 분명한 어조로 일렀다. 페르시아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교도들을 더는 박해하지 말라고. "내가 〔그들 앞에서〕 당신을 칭송하는 것은 당신이 그만큼 위대해서요"라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주 약삭빠르게 썼다. "당신이 늘 사람을 아껴 왔던 그 마음으로 부디 그들도 소중히 대해 주길 바라오. 그 까닭은 그 같은 믿음의 표시가 당신 자신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덕을 베풀어 주기 때문이오."
샤푸르 2세는 자기 나라 안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자비를 보이겠다며 순순히 응낙의 뜻을 전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관용을 베풀기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서한이 당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악숨 왕국의 아프리카인 왕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악숨 왕의 그리스도교 개종은 그 자신이 천당에 가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악숨 왕국과 로마 제국의 우정을 보란 듯 만방에 공언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 pp.74~75)

7장 왕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다
소수림왕(371~384)이 왕위에 올라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서역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한 불교 승려가 고구려 왕실을 찾았다. 순도라는 이 승려는 왕에게 올리는 각종 헌상물과 함께 한 손에는 불경을 쥐고 있었다. 불교의 가르침이 곧 고구려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 줄 힘이 되리라는 확신과 함께. 소수림왕은 순도를 환대하며 그가 들려주는 말들을 경청했다. 372년, 소수림왕은 흔쾌히 불교를 자신의 신앙으로 삼았다. 아울러 중국의 유교 원리에 바탕을 둔 국립 유학 교육 기관인 태학을 나라 안에 설치했다.
불교와 유교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종교였지만 곧 하나의 혼합체를 이루어 고구려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소수림왕을 비롯한 그 가신들에게 순도는 불만족, 불행, 야욕, 두려움 같은 것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상태로, 실상은 그 존재가 없는 이른바 '상스크리타'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따지면 고구려라는 왕국 역시 '상스크리타'에 불과해 궁극적 실체가 따로 없었다. 이 이치를 소수림왕과 그의 관료들이 진정 이해하게 된다면, 그들은 ([타이완의] 불교 대선사(大禪師) 성옌[1931~2009]의 말마따나) "이 세상과 눈앞의 현상들이 실상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머리에 새기고 이 세상 속에서 오롯이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이 진실을 안다면 이익, 안전, 행복을 갈구하는 마음에 좌우되거나 또 때 묻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이제 고구려는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의 위태위태한 나라가 더는 아니었다. 자칫 무너질 뻔했던 고구려를 소수림왕이 간신히 추슬러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고구려가 정복이나 영토 확장 전쟁에 나설 수 있을 만큼 그 기반이 단단히 다져진 건 또 아니었다. 그러기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 pp.128~130)

14장 굽타의 쇠락
명문에 따르면, 막판에 가서는 굽타 왕조가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승리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 시기의 굽타 왕조는 만사가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쿠마라굽타 1세 치세 말년에 만들어진 동전들만 봐도 더는 은이나 금으로 주조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 시절 동전들은 대체로 구리로 주조됐는데, 표면에 얇게 은을 도금해 안의 하급 금속 재질이 드러나지 않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당시 굽타 왕국의 국고는 완전히 동이 나 버린 상태였다.
455년 쿠마라굽타 1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겪던 문제들을 고스란히 스칸다굽타(455~467)가 물려받은 셈이 됐다. 우선 스칸다굽타는 또 한 번 에프탈족의 침략을 격퇴하지 않으면 안 됐다. 당시 일을 기록한 승전비에 따르기로, "스칸다굽타는 적군의 자존심을 뿌리부터 짓밟아 놓았다"라고 한다. 하지만 이때의 전쟁으로 스칸다굽타도 엄청난 인명 손실을 입기는 마찬가지였다. 스칸다굽타가 즉위하고 몇 년 동안은 굽타 왕조 내에 각종 사건이 불거지며 정국이 어지럽게 돌아갔지만, 가중되는 이 혼란이 어떤 식이었는지는 혼미하게 그려질 뿐이다. 백성들은 빈곤에 허덕이고, 관료 간에는 알력 다툼이 빈발하고, 제국 언저리에서는 전쟁 군주들 및 소왕들이 반란을 일으켜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는 것만 알뿐이다. 스칸다굽타는 치세 내내 쉴 새 없이 싸움을 벌여, 굽타 제국이 갈래갈래 쪼개지는 것만은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460년대에도 내내 옛 굽타 제국 전역에는 스칸다굽타의 승전비가 계속해서 세워졌다.
이런 승전비가 맨 마지막으로 세워진 게 467년이었다. 그 이후로는 증거가 앞뒤가 맞지 않아 다소 혼란스러운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이해에 스칸다굽타가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굽타 제국 안에서는 제위를 둘러싼 전쟁이 발발해 외우와 내란이 겹치는 상황이 전개된 듯하다. 처음에는 스칸다굽타의 형제가 제위를 주장하더니 나중에는 조카까지 가세했다. 종내 제위에 올라앉은 이는 스칸다굽타의 둘째 조카 부다굽타(c. 467~497)였다. 부다굽타는 30년 동안 제위에 무사히 앉아 있을 수는 있었지만, 굽타 왕조의 왕으로서 제국 비슷한 무언가를 통치한 것은 그를 마지막으로 더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 pp.223~224)

27장 아메리카 대륙
가뭄과 홍수는 두 아메리카 대륙을 이어 주는 중앙아메리카의 가교 전체에 영향을 끼쳤지만, 사포텍족이 수도로 삼고 있던 몬테알반은 악천후로 인한 결과를 추적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테오티우아칸의 경우 각종 제식에 쓰였던 건물에 방화를 한 걸 보면, 예전에 도시 안으로 끌려가다시피 했던 주민들이 통치자들에게 꽤나 큰 원성을 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은 평상시 전제적이고 고압적인 통치를 견디며 살아가야 했고, 기근이라도 덮치는 날엔 당장 벌 떼처럼 들고일어날 기세였을 것이다. 사포텍족도, 테오티우아칸의 왕들처럼, 그렇게 온화하고 신사적인 통치자는 되지 못했다. 몬테알반에 남아 있는 제식 건물의 부조 작품들만 봐도, 부족장 여럿이(아마도 오악사카에서 더 멀리 떨어진 외지 출신이었던 것 같다) 부족민들에게 사로잡혀 길거리를 알몸으로 행진하는가 하면 신체를 절단당한 모습이 묘사돼 있다. 그래도 사포텍족 통치자들은 자기 도시 주민들을 어느 한군데로 몰지는 않았다(테오티우아칸은 주민들을 한군데로 몰았기 때문에, 식량 공급이 불안정해지자 기근과 질병에 쉽사리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사포텍 주민들은 훨씬 넓은 지대에 퍼져 있었고, 그런 만큼 굶주림과 참사가 닥쳤다고 해서 어느 한 곳에서 폭력 난동이 불붙는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울러 '해독 가능한' 상형 문자의 범위에서 봤을 때, 사포텍족이 쇠락에 들어섰다는 연대 기록 역시 지금은 나오지 않고 있다...
마야족이 세웠던 도시들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명확히 파악하기는 앞의 두 도시보다도 훨씬 더 어렵다. 마야족이 세운 도시들은, 중앙아메리카의 다른 이웃들과 달리, 시종일관 독립을 유지해 나갔다. 이들 도시는 여간 자율적인 게 아니어서 서로 동맹을 맺고 공조할 때도 많았지만 그 지역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일도 그만큼 잦았다. 마야족과 관련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인명과 행적은 다음의 몇 가지가 고작이다. 하늘의 증인이라 불린 통치자가 10년 동안 5만 명이 넘는 칼라크물의 주민을 다스렸다는 것, 물의 군주라고도 불린 카라콜의 왕이 바로 옆에 이웃한 티칼의 왕을 쳐부순 뒤, 562년경에 그를 제물로 바쳤다는 것. 한편 현재 남아 있는 유적들은 마야족이 건축가로서 얼마나 뛰어난 감각을 지녔는지 확인시켜 준다. 웅장한 규모의 황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아메리카 대륙 한편에 우뚝 서 있는 칸쿠엔이 바로 그런 사례다. 치첸이트사에는 마야족이 세웠던 모든 도시를 통틀어 가장 정교한 구기 경기장이 건설돼 있는데, 이곳에서 선수들은 삶과 죽음을 대표하는 양편으로 나뉘어 돌로 만들어진 링에 공을 메다꽂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는 아마도 신성한 의례의 일부였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지금으로서는 대강 짐작만 할 뿐 확실한 것은 없다(그렇지만 선수들의 목이 잘려 나간 모습을 묘사한 부조 조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편 선수들은 사활을 걸고 일전을 벌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 pp.425~427)

28장 위대하고 거룩한 황제 폐하
이즈음 아프리카, 엄밀히 말하면 나일강 바로 옆 동 땅에서는 악숨 왕국의 군대가 아라비아반도로 치고 들어가기 위해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번 전쟁의 목표는 아라비아반도에 자리한 왕국 힘야르로, 홍해를 사이에 끼고 악숨과 정면으로 마주보는 나라였다. 힘야르가 아라비아 남부에 터를 잡은 지는 600년. 이제 힘야르는 서서히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해 아라비아반도 남서부의 자기 옛 땅은 물론이요 일명 킨다족으로 불리는 아라비아반도 중앙부 일대의 부족에게까지 저 나름의 패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악숨 왕국과 힘야르 왕국은 바다를 사이에 끼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인종 구성에선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 사이의 비좁은 해협을 통해 벌써 수 세기 동안 이주가 이루어진 터라, 바다 양편에도 서로 비슷한 성격의 아프리카-아라비아 왕국이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악숨 왕국은, 한때 그곳을 다스린 에자나 왕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친교를 맺은 이래 그리스도교 왕국으로 자리매김한 지가 벌써 200년이 지난 데다, 그렇게 우의를 쌓은 이후로는 죽 로마인들의 동맹 역할을 해 왔다.1
힘야르의 백성 대부분은, 이와 반대로, 여전히 아랍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사실 아랍의 전통이라는 이 구호만큼 제각각에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는 제 민족의 관습을 아우르는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510년에 접어들자 아랍인은 아라비아반도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 외엔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됐다. 이뿐 아니라 그 정의마저 북으로 올라갈수록 점차 퇴색해지는 감이 있었다. 아라비아반도 북 땅은 페르시아 및 로마 관할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던 까닭이다. 그렇지만 도시들은 죄다 연안 일대 아니면 이 북 지역에 몰려 있었고, 아라비아반도 사막 지대에는 베두인족이라 불리는 여러 갈래의 유목민들이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이들 베두인족과 도시 주민들은 계통상 대체로 조상은 하나였지만, 자원을 두고 옥신각신하고 서로의 생활 방식까지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이였다.
(/ pp.429~430)

38장 당의 패권
이제 광활하게 뻗은 당 제국의 영토는 저 멀리 페르시아 국경에까지 가 닿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듯 당의 위세가 막 절정에 오르려는 찰나, 황제 고종이 몸져눕고 만 것이다. 당대 사료에 따르면, 이 무렵 당 고종은 극심한 두통과 어지럼증에 시달린 데다 한동안은 시력까지 잃을 정도로 병이 위중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뇌졸중을 일으킨 게 아닌가 싶은데,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 황제가 의지한 사람은 다름 아닌 총명함에 유교적 소양까지 겸비한 무측천이었다. 당 고종은 병석에 누운 채로 국무를 처리할 수 있게 공문서를 그녀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하는가 하면, 자기 이름으로 이러저러한 결정을 내릴 권리까지 그녀에게 주었다.12
한반도에 자리 잡은 신라에서 사절단이 파견돼 당 황궁을 찾아간 것이 바로 무측천이 이와 같은 식으로 당의 실권을 쥐고 있을 때였다. 이 무렵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무열왕(654~661)이 다스리는 신라가 가장 강력한 위세를 자랑했지만, 이웃국인 고구려와 백제가 일본의 왜와 돈독한 우의를 다지는 상황이라 무열왕으로서는 그들 사이의 삼각동맹이 자못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무측천은 신라의 백제 정벌에 당나라 병사 13만 명을 대 주기로 결정했고, 이어 신라와 백제 사이의 국경 지대인 황산벌에서 대규모 전투(660)가 벌어져 백제가 참패를 당했다. 백제 의자왕(641~660)은 얼마 못 가 나당 연합군에 백기를 들고 투항해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됐다. 정작 그를 데려간 나라는 신라가 아니라 당이었다. 당시 무측천은 한반도의 정세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는데, 당나라 원군을 파견한 이 일을 계기로 한반도에 은근슬쩍 발을 들이밀 수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무열왕은 이제부터 신라와 백제는 자신이 맡아 다스린다고 선언했지만, 그러는 사이 백제 반군들도 바삐 움직여 항전을 위한 조직 구성에 들어갔다. 황산벌전투에서 용케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일단 도망치듯 일본으로 건너갔다. 의자왕은 생포돼 중국에 넘겨졌지만 슬하의 아들들은 진작부터 일본에서 생활해 왔었기 때문이다. 애초 백제의 왕자가 일본에 가게 된 이유는 하나, 두 나라 사이의 동맹을 굳건히 지키고자 일종의 볼모이자 보증으로 잡혀간 것이었다.
백제 유민들은 바로 이 왕자[부여풍]가 잡혀 있던 곳을 찾아가, 야마토 왕조의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부디 자신들이 살던 나라를 다시 되찾을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 pp.636~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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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수잔 와이즈 바우어(Susan Wise Bauer)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69~
출생지 미국 버지니아
출간도서 34종
판매수 61,420권

1968년 버지니아에서 태어나 초중고 과정을 모두 홈스쿨링으로 이수했고, 문학과 언어 부문 미국 최고의 대학인 윌리엄 & 메리 대학을 대통령 전액 장학생으로 조기 입학했다. 다중 전공으로 영문학, 미국 종교사 석사, 미국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동 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랍어, 프랑스어, 한국어를 구사하며 다방면의 장서를 넓고 깊게 읽는 다독가이자 자신의 지식을 쉬운 문체로 풀어쓸 줄 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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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에서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고, 주로 인문 분야의 영문 도서를 맡아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더 타임스 세계사』(예경)와 『문명이야기 1, 4』(민음사), 『바른 마음』(웅진지식하우스), 『인포그래픽 세계사』(민음사), 『수잔 바우어의 중세사』(부키)(출간 예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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