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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유죄 :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여성을 위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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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김수정
  • 출판사 : 한겨레출판
  • 발행 : 2020년 11월 11일
  • 쪽수 : 248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91160404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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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페미니즘 입문서로 자신 있게 추천할 책이 생겼다.”
│권김현영, 여성학 연구자

“n번방 사건·낙태죄 존치 논란·56년 만의 미투
직장 내 성희롱·디지털 성범죄·배드파더스 문제…”

‘낙태죄 위헌’ 이끈 변호사 김수정이
법의 언어로 말하는 페미니즘


‘낙태죄 위헌’ 판결, 혀 절단으로 방어한 ‘56년 만의 미투’ 사건 등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끝없이 싸워왔던 변호사 김수정. 이 책은 저자가 지난 20년간 법정에서 ‘여성을 위해’ 변론하며 기록한 여성 인권 투쟁기이자, 저자의 첫 단독 저작이다. n번방 사건, 직장 내 성희롱, 가정 폭력, 아동·청소년 성착취 문제, 배드파더스 사건 등 저자와 동료 변호사들이 직접 변론했거나 현재에도 변론 진행 중인 사건들을 천착해 주제별로 들여다본다. 저자는 여성에게 중대한 범죄들이 일어났을 때 왜 법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지, 우리 사회에서 여성 범죄에 대한 형량은 왜 이리 가벼운 것인지, 왜 법은 현실이 요구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지 법조인의 눈으로 적확하게 바라본다. 과연 법은 여성의 편인지, 법을 다루는 판사들은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수없이 되묻는다.

“생각해보면 여성으로서 나는 늘 긴장된 삶을 살아왔다. 학생일 때도, 어른이 되어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뒤에도, 언제 어디서 내가 여성이라는 것이 문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성희롱·성폭력에서, ‘여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나의 능력이 저평가될까 봐 긴장하고 또 긴장하며 살아왔다. … 어디 나뿐인가.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한 뒤, 연극계·문학계 등 각계각층에서 이어진 여성들의 성희롱·성폭력 피해 사실 고발과 이에 연대하는 해시태그 미투운동을 보며 나는 격려의 박수를 치기보다 속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_44쪽

출판사 서평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산다는 형량에 대하여”

20년 법정에서 기록한 여성 인권 투쟁기


이 책에는 [한겨레신문]과 [프레시안]에 ‘여성을 위한 변론’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던 칼럼들과, 코로나 시대의 여성 노동권, 일본군 위안부, 미혼모·입양 문제, 낙태죄 찬반 논란부터 위헌 판결, 그리고 2020년 낙태죄 개정안 논란까지 새로 쓴 최신 이슈 글들을 모두 수록했다. 이 책에 쓰인 사건들은 픽션이 아니며 살아 움직이는 여성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기에, 때론 그 어떤 문학 작품보다 생생하게 독자들에게 다가간다. 또한 저자는 우리 사회의 규범체계 아래 내밀하게 자리 잡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내러티브에 반기를 들며 그 규범 권력의 중심부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한 명이 당하면 우연한 사건이지만 다수가 당하면 사회현상이다. 국가는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이렇게 저자는 반복된 우연은 개별적 사안이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꼬집으며 이제는 국가와 법정이 나서서 유린되어 왔던 여성 인권을 보호할 것을 촉구한다.

“법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그저 살아남고자 했던 이들의
연대를 담은 간절한 목소리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1부에서는 여성 대상 성범죄에 관해 이야기한다. 먼저 2020년 최악의 이슈였던 n번방 사건, 웰컴투비디오 사건 등 디지털 성범죄와 성착취의 고리가 어떻게 연결되어왔는지 파헤친다. 저자는 ‘조주빈’을 키운 것은 수많은 평범한 남성들이며, 이제는 법원이 나서서 그에 응당한 처벌을 해야 할 것임을 경고한다. 또한 성희롱·성폭력에 저항하다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 처벌당한 억울한 여성의 사연과, 공무원 임용 10개월 만에 상사의 성희롱으로 죽음을 택한 여성의 사연 등을 통해 여성이 성범죄에 관해 ‘목숨 정도는 걸기를’ 요구하는 사회를 비판한다.
2부에서는 가장 ‘내밀한 곳’, 즉 가정 내에서 파괴되는 여성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가정폭력으로 도망쳐 나온 여성이 끝내 또 다른 남자에게 맞아죽고, 죽어서도 이혼하지 못한 채 폭력의 가해자에게 조롱당해야 했던 원통한 사연,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폭행당하고 성매매 업소로 팔려나가도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국적 취득조차 할 수 없었던 이주 여성의 이야기 등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들리는 비명을 외면하는 우리 사회의 위선을 고발한다.
3부에서는 여성의 몸, 여성의 자궁에 관해 이야기하며 여성의 임신 중단 권리를 절실하게 요구한다. 여성의 자궁은 쉽게 ‘도구’로 취급당하며, 임신·출산의 피해와 책임 또한 오롯이 여성들이 짊어지고 있다. 피임의 주도권이 없는 여성, 미성년자, 성폭력 피해자, 지적 장애인 등은 ‘미혼모’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간다. 이는 강제적 입양 문제, 영아 유기·살해와도 연결될 수밖에 없으며, 이제는 생명권을 말하기 이전에 여성이 자기 운명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할 때라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4부에서는 앞서 밝혔던 성범죄 문제, 가정 문제, 여성의 몸 문제에서 더 나아가, 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여성 인권에 관한 이슈들을 톺아본다. 올해 20주년이었던 도쿄 여성국제전범법정 참관 당시를 기억하며 쓴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문제, 국가 주도로 여성을 외화벌이로 이용했던 미군 기지촌 위안부 문제, 트랜스젠더 여성 강제 전역 사건을 통해 본 군대 내 성폭력·성차별 문제, 코로나 위기로 인해 조용히 치워지는 여성 노동 문제 등 은폐되고 지워진 여성 인권 현실의 부당함을 낱낱이 밝힌다.

“그녀는 매일매일 인터넷을 뒤져 자신의 영상을 삭제하면서 점점 절망해갔다. 매일 다른 이름의 파일로 다시 올라오는 영상, 지워도 지워도 좀비처럼 되살아나 그녀를 산 채로 먹어치우는 영상. 그놈이 영상을 올린 이유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놈은 그녀와 헤어진 뒤에도 심심하면 영상을 꺼내보며 낄낄거리고, 다른 사람과 같이 보기까지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여자친구와 싸우고 홧김에 예전 여자친구인 그녀의 영상을 올렸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파괴하는 일이,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파괴하는 일이 이렇게 이루어진다. 아무 이유 없이, 술김에, 홧김에, 심심해서 등.”_23~24쪽

“얼마나 더 많은 여성이 죽어야만 끝나는 싸움인가”

그럼에도 멈추지 않은 여성을 위한 변론


아침에 눈을 떠 뉴스를 들을 때마다 하루에 하나 이상, 여성 범죄에 관한 사건들이 흘러나온다. ‘전 남친’의 불법촬영 영상물 협박과 악플로 고통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연예인, 남편에게 폭행당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을 맞이한 여성, 아파트 동 대표 회장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여성 관리소장, 상관에게 성폭행당하고도 ‘꽃뱀’으로 취급받아 죽음을 선택해야 했던 여성 대위….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의 형량은 이토록 무겁기만 하다.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평생 긴장된 삶을 살아야 하며, 지은 죄가 없음에도 스스로의 무죄를 끊임없이 입증해야 할뿐더러 끝내는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하다. ‘생존자’로서 무죄를 입증하는 과정에서도 ‘피해자다워야’ 하며, ‘너무 똑똑해서’도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해서’도 ‘너무 늙어서’도 안 된다. 여성으로 태어난 죄, 이 ‘아주 오래된 유죄’를 벗기 위한 길고 지난한 싸움에서 여성은 아주 가끔 승리하며 대부분 패배한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이 죽는 현실은 흔하지만, ‘남자라는 이름은 면죄부가 되어’ 남성이 처벌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어쩌면 끝나지 않을 영원한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여성들의 이 싸움은 얼핏 시지프스의 절망 같아 보이지만, 포기하지 않은 싸움에는 늘 한발 전진이 내포되어 있기에 반복되는 고통이 아니라고. 이 싸움은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고 이 책을 통해 역설한다.

“여성들의 싸움은 가끔 승리하지만, 많은 경우 여전히 패배한다. 법정 싸움은 포기하지 않은 여성들의 최후의 싸움이고, 승리의 기약도 없이 긴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싸움이다. 책에서 다룬 사례들은 너무 고통스럽고 비참하기까지 한 예가 없지 않지만, 너무 비관적으로만 읽히지 않길 바란다. 현실은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이 책은 고통에 쓰러지지 않고,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피해를 드러내고 끝내 지는 경우에도 가장 끝까지 싸워낸 여성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을 읽고 많은 남자 사람이 여성들의 현실은 여전히 고통에 찬 것임을, 여성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남자 사람 역시 고통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작은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_11~12쪽

추천사

한국 현대사와 페미니즘 핵심 쟁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쓰인 이 책은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어떤 사회학 책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의 구체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문학적이다. 무엇보다 여성의 지위와 권리에 관해 끈질기게 붙잡아 주장·논증하며 방향을 제안한다. 페미니즘 입문서로 자신 있게 추천할 책이 생겼다.
- 권김현영 / 여성학 연구자·[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저자

책을 읽으며 다행히도 사법이 구조적 어려움에 내몰린 여성의 눈물을 닦아준 사례들도 보았지만, 그보다는 ‘사법이 끝내 이 눈물을 외면해버렸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아직 현재진행형인 이들의 이야기를 같은 사회 구성원들인 시민 모두가, 그리고 특히 이들의 법적 투쟁을 다루게 될 판사들이 읽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 류영재 / 대구지방법원 판사

이 책에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은 저자의 간절함이 곳곳에 서려 있다. 저자가 변호사로 부딪혀야 했던 장벽은 우리 법과 제도의 한계이자 우리 사회의 한계일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은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동시에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 홍성수 /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말이 칼이 될 때] 저자

목차

추천의 말
프롤로그- 법은 여성의 편인가

1부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뜬눈으로 영상 지우며 여자는 날마다 죽었다
- 일상이 지옥이 되는 디지털 성범죄

저항하다 처벌당한 피해자의 56년 만의 미투
- 혀 절단으로 방어한 성폭력 재심 청구 사건

그녀는 왜 임용 10개월 만에 죽음을 택했나
- 직장 내 성희롱이 불러온 죽음과 공무재해

15세 소녀는 왜 성매매 범죄자가 되었나
-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와 자기결정권

‘조주빈들’을 키운 사회적 자양분
- 26만이라는 충격, 텔레그램 n번방 사건

2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들리는 비명

죽어서도 조롱당한 ‘죄 많은’ 여자
- 가정 내 여성에 대한 지독한 폭력

호주제 폐지 후 정말 ‘큰일’이 났는가
- 동등하게 가족을 구성할 권리

낳아놓고 부정하는 아빠들을 추적하다
- 배드파더스 초상권 침해 주장 사건

감히 한국 남자와 만나고 헤어진 죄
- 법정에서의 결혼 이주 여성 잔혹사

3부 ‘도구’로만 존재하는 여성의 자궁

여성의 고통은 외면하며 생명권을 말하는 위선
- 여성의 건강과 권리를 위협하는 낙태죄

여성들에게도 빵과 장미를
- 계속되는 낙태죄 처벌의 위협

낳는 것도 키우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가는 미혼모의 권리

간절한 목소리 “내 아이를 찾아주세요”
- 여성과 아동의 권리는 없는 입양제도

국가와 자본이 자궁에 침투할 때
- 법 밖에 방치된 대리모와 난자 체취 문제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

2000년 도쿄 여성국제전범법정을 기억하다
-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문제

생존자 ‘박 언니’, 증언자가 되다
- 미군 기지촌 위안부 국가배상 소송

대한민국은 여성을 징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 군대 내 성차별과 성폭력

코로나 시대에 ‘평등한’ 위기는 없다
- 조용히 치워지는 여성 노동자

여성으로 살고, 죽고, 싸우다
- 여성 노동자 탈의 투쟁과 ‘수지 김’ 사건

본문중에서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 사람은 그놈의 누나였다. 그놈은 누나가 건사하던 자였는데, 누나는 같은 여자로서 용서를 빌기조차 미안하다면서도 자기 동생을 한 번만 살려달라면서 울며불며 매달렸다. 성범죄 사건을 맡을 때마다, 가해자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비는 사람은 꼭 그들의 어머니이거나 누이였다. 막상 일이 터지면 뒷수습을 하는 것은 그 남자의 혈육인 여자들(부친이 나서거나, 형이 나서는 경우는 또 별로 보지 못했다)이거나 애인이나 아내 들이다.… 여자의 도움 없이 살지도 못하면서, 남자만의 이어도에서 살 수도 없으면서, 그들은 끊임없이 여자를 몰래 지켜보고, 돌려 보고, 소비한다.
(/ pp.24~25)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가 유발한 남성의 성적 충동으로 인하여 발생한다는 통념이 존재한다. 이는 종종 피해자의 행실 책임론으로 귀결되어 성범죄를 저지른 남성이 형을 감면받거나, 심지어 무죄를 받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야한 옷을 입어서’ ‘평소 행실이 방정하지 못해서’ ‘남성과 데이트를 즐기며 성관계를 허락한 것처럼 착각하게 해서’ 등 여성이 남성의 성적 충동을 유발해 성범죄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한 성폭력 재판에서 종종 나이가 많은 여성이나 ‘예쁘지 않은’ 여성에게는 남성의 성적 충동이 생길 리가 없다면서 그 사실이 앞의 판결에서처럼 혐의를 부정하는 논거로 인용된다.
(/ p.33)

이렇게 상시적인 긴장 속에서 고단하게 살고 있는 여성이 어디 나뿐인가.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한 뒤, 연극계·문학계 등 각계각층에서 이어진 여성들의 성희롱·성폭력 피해 사실 고발과 이에 연대하는 해시태그 미투 운동을 보면서 나는 격려의 박수를 치기보다 속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전히 여성의 삶은 고단하다는 사실, 그리고 오직 위안이 되는 것은 ‘나도 겪었다’고 외치는 슬픈 연대라는 사실 때문에….
(/ pp.44~45)

능욕당한 여성들을 변호하며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평범한 직장인, 학생, 공무원, 남편, 아빠 들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이들의 평범성은 더욱 크게 부각되어 정상참작 사유가 된다. 좋은 직업을 가졌거나, 가질 가능성이 보이거나, 자녀가 있으면 더욱 좋다. 장래가 촉망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인정되며, 남자라면 누구나 성적으로 일탈할 수 있다는 이유로, 나이가 어린 경우는 성장기의 당연한 호기심의 발로라는 이유로 공감까지 얻는다.
(/ p.71)

텔레그램 n번방의 ‘조주빈들’은 이런 사회적 자양분을 먹고 탄생했다. 그리고 사법부의 경미한 처벌과 입법자들의 무지는 이들을 급성장시켰다. … 피해 여성들은 죽어나가는데, 죽어서도 ‘유작’이라는 이름으로 영상이 돌아다니는데, 가해자들은 기껏 벌금을 내거나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징역을 살아도 겨우 몇 년이면 풀려나 잘 살고 있다. 응보의 효과도, 위하의 효과도 전혀 없어 성착취 영상을 제작하고, 유포하고, 소지하는 범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급기야는 수많은 n번방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 p.78)

여자친구가 변심했다고 의심하여 때리고 밀쳐 중태에 빠뜨렸다는 기사, 헤어진 여자친구와 닮았다는 이유로 길 가던 여고생의 머리를 내리쳤다는 기사, 단순히 화가 난다는 이유로 생면부지의 여성의 머리를 돌로 수차례 내리쳤다는 기사, 길 가던 여고생에게 성추행 시도 뒤 흉기로 살해 시도를 했다는 기사가 줄줄이 올라오고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이 여성들을 잠식하고 있다. 한 명이 당하면 우연한 사건이지만 다수가 당하면 사회현상이다. 국가는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 pp.92~93)

가난한 나라 여성이 한국 남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 주로 성매매를 통해 태어났을 것이라는 생각도 착각이다. 사랑이라는 외피를 쓰고, 현지에서 버젓이 살림을 차리고 심지어 결혼식까지 올리고서 남편으로 행세하다가 한국으로 잠적하거나, 연인 관계로 지내다 여자가 임신하자 도망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 이들은 부자나라 한국에 대한 동경을 품은 가난한 나라의 어린 여성을 오직 성욕 해소의 상대로 착취하고, 자신에게서 비롯된 아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 p.113)

큰돈을 주고 데려온 어린 아내가 자기가 기대한 판타지의 구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다. 아내가 도망갈 것을 우려하여 한국말을 배우지 못하게 집안에 가둬두고, 본전 생각에 과도한 노동을 강요하기도 한다. 내가 변론한 사건에서는 남편이 돈을 벌어오라고 이주 여성 아내를 성매매업소에 팔아넘긴 사건도 있었다. 집안 남자들(시아버지, 시동생)의 성욕 해소 대상으로 이용한 경우도 있었다. 이 여성은 여성단체의 도움으로 탈출했으나,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위자료 청구 소송만을 변호사들에게 맡기고 자국으로 돌아갔다.
(/ pp.126~127)

낙태를 하는 여성도, 낙태에 찬성하는 여성도, 그 누구도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배 속의 태아일 때든 태어난 뒤든, 아이를 감당해야 할 ‘이미 태어난 사람’인 여성이 자기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일 뿐이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온갖 어려움은 오롯이 여성에게 짊어지게 하면서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고귀함만을 내세우는 것은 위선이다.
(/ p.139)

‘과거의 낙태 처벌 범위와 비교해보면 낙태 허용사유가 많이 확대되었으므로 뭐가 문제냐’ ‘태아의 생명권이 더 중요하다’ 등의 이야기들이 오르내린다. 여전히 여성의 결정은 생명을 경시하는 이기적이고 못 믿을 결정으로 취급되며, 처벌하겠다고 위협하면서 태아의 생명보호의무와 책임을 여성에게 떠넘기고 있다. 임신 후기 낙태의 형사처벌은 보호와 지원이 가장 필요한 미성년자, 성폭력 피해자, 지적 장애인 등 취약한 여성들에게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
(/ pp.145~146)

“위안부는 더러운 이름이다” “위안부가 세계 여성에게 해를 끼친다면 미안하다” “위안부 누명을 벗고 싶다”며 이용수 할머니의 입에서 통제되지 못하고 저 깊은 단전 어딘가에 가시처럼 박혀 있다 튀어나온 말들, 그 말들에서 스스로를 피해자보다 인권운동가로 불러달라 하시면서도 피해자로서 겪은 고통에서 헤어 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뼈아프게 느낀다. 할머니의 이런 말들은 진정 누구를 겨누고 있는가. 그동안의 위안부 운동인가, 사과도 배상도 하지 않는 일본국인가. 지금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무능한 대한민국 위정자들인가.
(/ p.198)

2017년에는 만 18세에 미성년 부사관으로 입대한 한 여군이 부대 내에서 수차례 성추행과 성희롱을 당한 끝에 극단적 선택을 했으나, 다행히 사망에 이르지는 않은 일이 있었다. 부서 내 유일한 여군이었던 이 부사관은 회식자리에서의 성추행, 일상적 성희롱, 단체 카톡방에서의 음란물 공유 등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2019년 5월에는 여성 해군 대위가 직속상관에게 여러 차례 성폭행을 당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pp.216~217)

직장 내 성희롱, 고용 차별, 여성 노동의 비정규직화, 남녀 임금격차를 드러내는 각종 통계치들은 노동에서의 젠더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지만, 남녀평등고용법, 여성발전기본법, 그리고 각종 노동법제의 제도화는 노동 영역에서 젠더 평등이 실현되고 있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착시라도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싸워왔던가. 코로나 위기는 여성 노동의 젠더 불평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더 이상 법과 제도가 주는 착시로 세상이 나아졌다고, 살 만해졌다고 퉁칠 수 없게 된 것이다.
(/ pp.231~232)

초등학교만 마친 채 상경하여 버스 안내양을 하고, 미8군에서 일하고, 일본인과 결혼하여 홍콩으로 이주하기까지, 그리고 윤태식을 만나 살해당하기까지 수지 김은 온갖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런 그녀가 어느 순간 호스티스 출신의 행실이 문제인 여자, 간첩이 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죽어 마땅한 여자’가 되고 만 것이다. 뒤늦게 홍콩 경찰이 시신을 발견하고 그녀가 살해당했음을 알렸지만, 안기부와 윤태식은 그녀의 죽음이 북한이나 조총련의 보복살인일 것이라면서 이를 은폐했다.
(/ p.242)

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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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지향 구성원 변호사. 두 딸의 모자란 엄마로 주업은 작은 로펌의 월급쟁이. 호주제 및 낙태죄 위헌 소송의 대리인,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전문위원, 이주여성인권센터 법률지원단으로 20여 년간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자, 이주여성 등에 대한 법률 지원을 꾸준히 해왔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들 곁에서 손잡아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자 했고, 앞으로도 되고 싶은 열혈 변호사. 지은 책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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