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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안부가 아니다 : 아시아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 21인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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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한국사 일반
저자 안세홍
출판사/발행일 글항아리 / 2020.07.10
페이지 수 304 page
ISBN 9788967358013
상품코드 333705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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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내용
25년간 일본군 성노예 피해 아시아 여성 140명을 만나다
한국,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이 할퀸 여성 21인의 목소리를 듣다

끌려감, 감금, 성폭력, 버려짐……
‘너희가 부끄러운 거지 우리가 창피한 것이 아니야’

25년간 아시아 5개국에서 140명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만나다
이들의 기억은 토막나거나 생을 마감함으로써 사라질지 모른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안세홍은 25년여간 일본군 아시아 성노예 피해 여성들을 만나왔다. 한국,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여성 140명을 만났고(2018년 평양에 가면서 피해자 8명의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만나지 못했고, 타이완 역시 피해자 수소문을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그중 21명의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한국 4명, 중국 4명, 인도네시아 5명, 필리핀 4명, 동티모르 4명이며, 이 가운데 8명이 인터뷰 후에 돌아가셨다.
끌려감, 감금, 성폭력, 버려짐. 이 모든 것은 70~8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나라와 나이, 동원 방법과 기간 등의 피해 사례로만 그녀들의 아픔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이 문제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야기한 인권 문제로 바라봐야 하기에 저자는 아시아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피해 여성들을 만나왔던 것이다. 이 책은 범아시아적 취재와 조사를 담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하지만 일본 국민조차 한국, 중국의 피해자만 알 뿐이며, 동남아시아는 이들 여성 문제에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남겨진 기록조차 드물다.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전장의 최전선인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 등지에는 위안소가 설치되지 못해 현지 여성들을 강제 동원했다. 이때 해양 보급로까지 차단되면서 콘돔이 제공되지 않아 이들 지역에서는 임신을 막으려고 주로 생리 이전의 여자아이들을 폭력 대상으로 삼았다.
저자가 기록을 시작한 것은 1996년 나눔의 집에서 피해자들을 처음 대면하면서였다. “너희가 부끄러운 거지 우리가 창피한 것이 아니야.” 박두리 피해자의 이 말을 듣고 잊히지 않으면서 나눔의 집을 3년 동안 오가며 봉사했다. 3년 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사진으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최선이라 여겨 독립적으로 기록활동을 시작했다.
2000년에는 경남 통역에 있는 4명의 피해자를 찾아나섰다(현재는 모두 사망했다). 이곳은 다른 지역에 비해 신고된 피해자 수가 가장 많았다. 또 아시아의 피해자를 만나기 위해 일본과 현지에서 조사를 했고 2013년부터 필리핀을 시작으로 발길을 넓혀나갔다. 하지만 만난 피해자들은 소수민족에 속했고, 모두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살아 해당 국가의 언어를 다시 지역 방언으로 옮기는 등 이중 통역을 통해야 대화가 가능했다. 신뢰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여러 차례 찾아가야 했고, 몇 년의 간격을 두고 방문하면 이미 노년의 막바지에 이른 그들의 기억은 흐릿해져 있었다. 점점 단편적인 단어들만 나열하는 식으로 바뀌어 기록 작업은 쉽지 않았는데, 자녀들의 증언이나 지역 활동가들의 기록을 통해 인과관계들을 엮어나가기도 했다.
‘위안부’라는 말은 가해자인 일본 입장에서 미화된 용어로, 이 책에서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로 부른다.

“부모가 있는 데서 성폭행했어”―끌려감 그리고 강간

21명의 여성은 어린 나이에 길을 걷다가, 부모가 일 나간 사이에 혼자 집에 있다가, 혹은 부모와 함께 집에 있던 중 일본군에게 무작위로 끌려갔다.
황유량은 15세 어느 가을 아침 밭에 일하러 가던 중이었는데, 길에서 만난 10명의 군인이 얼굴을 때리고 옷을 벗기며 가슴을 만졌다. 황유량은 군인의 손을 깨물면서 저항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 혼자 저녁밥을 준비하던 중에 아침에 만난 일본군 한 명이 집으로 찾아와 성폭행을 했다. 부모는 뒤늦게 귀가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총칼을 든 군인이라 항의하지 못한 채 딸을 이웃집에 하룻밤 피신시켰다. 하지만 이튿날 일본군들은 또 찾아와 딸을 내놓으라며 부모를 폭행했다. 그리고 부모가 있는 집에서 딸을 성폭행했는데, 이번에는 한 명이 아니었다. “한 명이 끝나자 또 한 명이…… 그렇게 몇 명한테 당했어요.” 이후 그녀는 군부대로 끌려갔다.
일본군이 동티모르 수아이에 공동주택을 설치하면서 갑자기 들이닥쳐 끌려간 프란시스카는 “그 짓을 하지 않으면 부모님을 죽이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라며 당시 상황을 들려줬다. 일본군은 납치가 아닌 것처럼 꾸미기 위해 형식적으로나마 부모의 허락을 받아 데려가는 척했던 것이다. “난 많은 군인을 섬겨야 했어요. 하루에 10명이 넘기도 했지요.” 그녀는 그곳에서 ‘미스 스위트’ ‘스위트 레이디’로 불렸다.
페덴시아는 할머니와 시장 가는 길에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군이 얼굴을 때리며 밧줄로 손을 묶은 채 관청으로 끌고 갔고, 거기서 강간을 당했다. 겁탈하려는 군인을 향해 그녀는 큰소리로 저항하다가 헌팅칼에 귀가 잘렸다. 다행히 열흘 만에 풀려났는데, 알고 보니 이는 게릴라 활동을 하는 그녀 가족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내 집에 온 일본군 전부가 나를 강간하려 했어요. 그들은 내가 기절했을 때조차 나를 데리고 잤어요.” 아버지 없이 혼자 집에 있을 때 여러 군인이 수시로 들락거리며 성폭행했다. 그녀에게는 엄마 같은 존재인 할머니 역시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했고, 그 뒤 살해되었다. 이후로도 한 달간 일본군은 그녀의 집에 찾아와 학대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김복득은 일제강점기 수탈한 식량과 자원을 일본으로 방출하던 통영에서 삼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느 날 낯선 남자가 “돈 많이 버는 공장에 취직시켜줄게 가자”며 접근했다. 두려운 마음에 ‘싫다’고 답하자 남자는 강제로 끌고 가 부산행 배에 태웠고 이후 다롄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방마다 여자를 한 명씩 집어넣었고, 일본군이 바지를 내리며 달려들었다. 매일 10명을 몸으로 받아냈는데, 전투를 마친 부대가 올 때면 군인들이 밀려들어 밥도 못 먹고 옷도 못 입은 채로 지냈다. 3년 뒤 김복득은 다시 필리핀으로 보내져 일본인 부부가 관리하는 위안소에서 군인들을 섬겨야만 했다. 웨이사오란은 농촌에서 아이와 함께 피신했다가 트럭에 태워져 끌려갔다. 그녀는 자기 아이를 옆에 두고 당했다. “아기가 아무리 울어도 일본군은 관심 없어. 그 짓만 할 뿐이야.” 군인 중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이 있기도 했으며, 오전에는 사병, 오후에는 계급 있는 군인, 밤에는 장교가 자고 가는 식이었다. 혹은 평일에는 하급 군관, 주말에는 일반 사병이 왔다.
그녀들은 거기서 하루에 최소 3명에서 최대 20명의 군인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땅굴을 파고 빨래를 하며 밥을 했다. 또 춤을 추고 민요를 부르면서 ‘광대’가 되었다.

“거기가 붓고 매일 아파”―끝나지 않는 고통

“여러 명을 상대하다보니 거기가 아팠어요. 바를 약이 없어서 그냥 참기만 했지요.” 위안소 안에서의 의료 상황은 열악했다. 성병 검진을 담당하는 군의관이 없는 곳도 많았지만, 있는 곳에서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황유량과 같이 있던 여자는 피를 많이 흘렸는데 치료가 되지 않아 이튿날 죽었다.
미나 역시 “성기에 통증과 부기가 가실 날이 없다”라고 말했다. 성기는 부어올랐지만 계속되는 성폭행에 저항할 의지마저 잃었다. 일본군에게 맞서다 얻어맞아 실명한 눈을 치료하기 위해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했다. 지금도 두통과 발열, 가슴 답답증을 호소한다.
바리 역시 “생식기가 아팠어. 처음에는 무슨 병인지 몰랐어”라고 말했다. 당시 그녀가 거주하던 곳은 변방 오지로 위안소도 없고, 의약품이나 군의관이 없어 치료할 엄두도 못 냈다. 그녀는 성병에 걸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자 집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집에 와서야 가족들이 향유로 그녀의 아픈 곳을 치료해주었다.
하상숙은 일주일에 한 번 군의관에게 검사를 받는데, 그 전날 위안소 여성끼리 오리 주둥이같이 생긴 도구를 밑에 넣고 봤다고 한다. 병이 생기면 일본군을 받을 수 없어 위안소 주인이 몹시 싫어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서로 아래를 보며 솜에 약을 묻혀 바르곤 했다. 병이 심하지 않으면 군의관의 눈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몸으로 조선에 가서 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전쟁이 끝나고도 한국에 돌아가 어머니를 볼 낯이 없어 하상숙과 다른 여성들은 중국에 남아 다른 조선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지냈다.

“성병에 걸렸다고 내보내줬어”―어떻게 도망치고 풀려났나

이네스는 첫 월경 전에 일본군에게 끌려가 2년여간 위안소에 있다가 풀려났다. 그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병이 너무 깊이 들어서였다. 황유량도 2년여 뒤 위안소를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이는 삼촌이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장례식에 보내달라며 울고불고 매달렸다. 들은 체도 안 하던 관리자에게 계속 매달리고 꼭 돌아오겠다며 약속한 뒤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는 가족의 묘안으로 아버지는 산속 움막에 숨어 있었다. 이후 그녀는 멀리 친척 집에 숨어 지내다가 전쟁이 끝나고서도 한참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필리핀의 위안소에서 ‘후미코’라 불린 김복득은 한 장교와 친해져 고향으로 탈출시켜달라고 애원했다. 그 장교는 기회를 엿보자 했고 3년 만에 그녀를 빼돌려 배에 태웠다. 왕즈펑의 어머니는 딸을 빼내기 위해 할머니와 삼촌을 찾아가 30위안을 빌렸다. 거기다 집에 있는 쌀까지 메고 일본군에게 가서 사정해 딸을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왕즈펑은 부대에 있을 때 일본군이 엄살 부리지 말라며 종아리를 세차게 내리친 적이 있는데 치료를 받지 못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집에 와서 엄마가 상처를 치료해줘서 나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영원히 낫지 않아”라며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드러냈다.
루시아는 끌려간 지 두 달 되던 때에 일본군이 게릴라를 습격하러 나간 틈을 타 언니와 도망쳤다. 부모는 딸들과 재회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일본군이 탈출 사실을 알게 될까봐 삼촌 집으로 2주간 피신시켰다. 마리아 역시 일본군이 급히 지프를 타고 나간 틈을 타 일본군이 파놓은 탈출용 터널을 이용해 도망쳤다. 좁고 어둡고 습한 굴을 빠져나왔을 때는 숲 한가운데였다.
한편 런란어의 가족들은 매국노에게 돈과 먹을 것을 주고서야 딸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당시 피해자들이 위안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버리고 가거나, 아니면 일본군이나 매국노에게 피해자를 풀어주는 대가로 돈이나 가축, 식량을 주는 것이었다.

“아들이 일본놈 닮았다고 학대했어”―그녀들이 꾸리거나 꾸리지 못한 가정

프란시스카는 3년간 위안소에 있다가 일본군이 돌아간 뒤 집으로 와 결혼을 했다. 지금은 아들딸, 손자까지 모두 20명이 넘는 대가족이다. 셍아는 남편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을 수 없어 숨긴 채 시집을 갔다. 하지만 남편은 마을 주민들이 수군대는 소문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평생 아내에게 이 일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셍아는 “우리는 기쁨과 슬픔을 갖고 살아요”라며 아무리 70년 전의 고통이 있다 해도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과 행복 속에서 산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필리핀에서는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피해자의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즉 아픔을 달래기 위해 가슴속에 묻고 혼자 푸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끼리 모여 노래하고 춤추는 가운데 고통을 흘려보낸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오히려 예외에 속하며, 피해 여성들은 결혼을 못 하거나 행여 하더라도 불임의 몸이 되어 자식 없이 노년을 홀로 맞고 있다.
2003년 중국에 남겨진 박차순은 그 어느 피해자보다 생활환경이 남루했다. 처음 발견됐을 당시에는 부서져 내리는 농촌의 흙집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일본군에게서 빠져나온 뒤 중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만, 아기를 낳을 수 없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여자아이를 입양해 키웠다. 이후 그녀는 양딸 부부와 두 손자의 가족이 함께 사는 대가족을 이뤘지만, 2층의 집에 모두 각자의 방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그녀의 공간은 창고 한쪽에 천막으로 천장을 막아 꾸민 것이 전부였다.
이네스는 위안소에서 일본군의 딸을 낳았다. 하지만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위안소를 빠져나오던 중 길에서 만난 일본군에게 딸을 빼앗겼고 지금은 아기의 생존 여부조차 모른다. 황유량은 위안소를 나와 귀가했을 때 마을에는 이미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녀 자신도 그런 일을 당했다는 이유로 한센병이 있는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남자는 아내에게 잘해주었고 그들은 다섯 남매를 낳았는데, 때로 아이들이 마을에서 놀림을 당하고 들어오면 엄마 탓이라며 원망을 했다.
김복득은 결혼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웃이 남자를 소개했는데 첩 자리였고 그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밤 그 남자가 몰래 침입해 겁탈하더니 남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졸지에 첩살이가 시작되었고 두 차례 임신을 했는데 모두 유산되었다. 남편은 알코올에 중독돼 폭력을 휘둘렀는데, 의외로 본처가 그 마음을 달래주어 본처를 의지하며 살았다.
웨이사오란은 유부녀의 몸으로 일본군에게 끌려갔다가 그곳에서 일본군의 아이를 뱄다. 남자애가 태어나자 시어머니는 농사일에 부릴 수 있겠다 싶어 살려두었지만 모자의 비운은 이때부터 싹텄다. “아이가 커가면서 마을 사람들은 아이 얼굴이 일본군을 닮았다고 멸시했어.” 멸시는 점점 더 심해졌고, 아들에게까지 불똥이 튀어 아이는 평생 일하거나 무언가를 배울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마을에서는 결혼도 할 수 없어 독신으로 지내왔으며 현재 나이는 75세다. 그에게 그런 세월에 대해 울분과 원망이 없을 리 없었다. 모자는 이제 사소한 대화조차 하지 않으며, 밥도 따로 먹는 처지가 되었다.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 아들이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지난 세월 그의 울분을 엿볼 수 있었다.

“내 목소리를 들려드릴게요”―끝나지 않은 증언

피해 여성들은 고통을 안으로 삼키기보다 침묵을 깨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인터뷰에 응한 것도 모두 자신들의 기록이 남겨져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서이고, 일본 정부가 공식 사과와 배상을 할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바리는 몸뿐 아니라 남자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등 정신적 외상도 심해 대부분 집 안에서만 지낸다. 그녀가 침실을 벗어나 가본 곳이라고는 거실과 테라스가 전부다. 하지만 그녀는 “일본 정부가 약과 돈으로 나를 도와주길 기대합니다”라고 또렷이 요구했다. 기억도 거의 흐릿한 상태에서 꺼낸 말이다. 미나 역시 “나는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나에게 사과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런란어는 일본 정부와 적극적인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는 자국 정부도 비판했다. 위로금으로 30만 위안을 주어도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며, 정부가 나서서 그녀를 보호해야 하지만 정작 중앙정부와 성 정부를 비롯해 하위 조직까지 그녀를 외면하고 있다. “난 이 일이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중국 정부가 더 문제예요.”
웨이사오란은 2010년 12월 일본 의회가 주최한 ‘위안부’ 피해자 공청회에 참석했다. 그녀는 일본인들 앞에서 차분한 심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는데, 이때 함께 참석한 일본군에게서 낳은 그녀의 아들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그동안 담아두었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당시 일본 정부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지만 일본 측의 답은 듣지 못했다.
마리아는 2001년 2월 라디오를 통해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 인정과 사과 및 법적인 보상을 요구하는 다른 피해자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동안 품어오던 이야기를 우선 딸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그녀는 이후 롤라스 컴패니아의 다른 피해자와 만난 자리에서 피해의 고통을 공유하며 문제 해결에 자신감을 가졌다. 그녀는 명예 회복을 위한 강력한 연대감을 가지며 자신들의 문제를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 “일본 정부가 조만간 희생자들에 대해 법적 보상을 직접 할 것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들은 적어도 성노예 제도로 희생당한 여러 형태의 고통을 해소해야 합니다. 일본 정부가 짓밟은 여성들의 주장에 대응할 때, 비로소 우리는 명예를 지킬 수 있습니다.”
페덴시아는 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1992년 필리핀 ‘위안부’조사위원회에서 처음 증언을 했는데, 당시 같은 처지의 여자들이 있어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는 일본 국가와 국민이 필리핀에서 일본군이 한 행위를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녀는 최근에도 마닐라만에 있는 일본대사관에 직접 찾아가 문제 해결과 자신들의 정의 회복을 위한 시위를 이어나갔고, 일본, 중국, 한국, 캐나다 등지를 직접 돌며 증언 집회를 열면서 항변을 계속했다.
목차
1부 살다
1. 이네스 위안소에서 일본군의 딸을 낳았어요
2. 황유량 르번구냥이라고 무시했어
3. 셍아 기쁨과 슬픔을 가지며 살아요
4. 김복득 젊은 세대가 기억해야 해

2부 당하다
5. 친다 일본에 봉사하고 싶지 않았어요
6. 페덴시아 기절했을 때조차 나를 데리고 잤어요
7. 왕즈펑 거기서 피가 묻어 나왔어
8. 프란시스카 나는 개나 말하고 똑같았어요
9. 하상숙 어린애를 못 낳게 하는 주사라며 놓았어

3부 품다
10. 바리 남자들과 만나는 것이 두려워요
11. 루시아 항상 강간을 당하는 꿈이야
12. 런란어 중국 정부가 더 문제예요
13. 카르민다 기억은 잊었지만, 트라우마는 남아

4부 풀다
14. 박차순 엄마! 갖…고…싶…다
15. 마리아 명예는 훼손되지 않았어요
16. 라우린다 높은 사람이 직접 와서 봐야 해요
17. 미나 나에게 사과를 해야 해요

5부 더불다
18. 웨이사오란 아이가 일본군을 닮았다고 멸시했어
19. 이수단 이제 나랑 같이 살자
20. 이탕 모든 짓에 대해 지불하길 바랍니다
21. 파우스트 정의가 세워지길 바라요
본문중에서
“일본군 한 명이 덤비려 해서 팔로 밀쳤어요. 있는 힘을 다해…… 무언가가 허벅지로…… 순간 아픈 줄도 몰랐어요.” 일본군은 그녀를 숲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일본군 병영이 여러 개 있었다. 군인들이 하나둘 그녀를 덮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셍아의 허벅지에 3~4센티미터의 길게 나 있는 상처가 눈에 들어온다. 부대 내 일본군의 검에 찔린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녀는 일본군에게 저항했고, 화가 난 군인은 칼로 그녀의 허벅지를 찔렀다. 칼에 찔리자마자 그녀는 실신해 그 후의 기억을 잊어버렸다.
(/ p.26)

중국인은 전쟁을 겪은 동일한 입장에서 약자에 대한 배려나 상흔에 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정 내, 개인적 문제로 들어왔을 때는 폭력과 이웃의 멸시 등 입장이 180도로 바뀌었다. 몇몇 피해자는 가정 내 폭력 때문에 홀로 경로원에 들어가거나 경제적 빈곤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의 후유증에서인지, 중국에서 만난 피해자 13명 중 11명은 아기를 낳지 못했다. 젊어서는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며 살아갈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홀로 남겨졌다.
(/ p.59)

“나는 개나 말하고 똑같았어요. 내가 하는 말은 진짜예요.” 그녀는 위안소에서 전리품으로 취급되며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다. 말끝마다 자신이 하는 말은 진짜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위안소 안에서는 쌀이 아닌 옥수수만 먹었다. 일본군에게 당한 대가로 그 무엇도 받지 못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 10명이 넘는 군인을 상대하느라 아팠지만, 약도 치료도 받을 수 없었다.
(/ p.103)

한중 수교가 맺어진 이듬해인 1994년 한국정신대연구소는 우한에 남겨진 피해자 조사를 위해 방문했고, 30여 명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러나 이미 철도에서 자살한 여성, 약을 먹거나 암으로 죽은 여성이 20여 명에 달했다. 생존자 10여 명만이 겨우 남아 있었다. 2003년에 내가 또다시 방문했을 때는 하상숙, 백넙데기, 김의경, 박차순만이 살아 있었다. 하상숙은 호적 조사를 통해 한국 예산에 있는 이복 남동생을 찾았다. 2003년 그녀는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우한 인근 서커우에 살던 백넙데기와 모국으로 귀향했고 서울 상도동에 월세를 얻어 살았다. 처음에는 예산 동생의 집을 방문하며 가까이 지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소원해졌다. 찾아오는 이도 드물어 둘이 방 안에서만 지냈다. 우리말을 할 수 있었지만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시장에서 장 보는 것도 꺼렸다. 보살핌의 부족과 가족들의 외면으로 3년 만에 딸들이 있는 중국 우한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 p.122)

아시아의 피해자를 찾기 위해 일본과 현지에서 조사하면서 피해자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파악했다. 2013년부터 필리핀을 시작으로 피해자를 찾으러 다녔다. 만나러 가는 동안에도 몇몇은 세상을 등졌고 어렵게 만난 이들조차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건강하지는 못했다. 피해자의 기억이 토막난 채로 이야기가 전달되어 왔다. 아흔 살 전후의 나이에 모든 것을 기억하길 바라는 것은 무리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원된 장소, 시기, 방법, 일본군의 수 등 그녀들의 답변은 점점 단답형으로 바뀌어간다. 두세 번 찾아가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전에 듣지 못한 부분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여러 번에 걸친 방문을 통해 이야기를 듣는 방법으로 뒤죽박죽 토막난 기억을 시간순으로 재편해 증언을 맞춘다.
(/ p.205)

저자
안세홍
사진가. 대학 시절부터는 장애인, 일본군 성노예, 인권 등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하고 있다. 1996년부터는 한국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필리핀, 중국 등 아시아에서 현지 피해 여성 140여 명을 기록하고 있다. 2012년에는 일본 도쿄 니콘살롱에서 피해 여성들의 사진전을 진행했으나 니콘 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피해 여성들의 기록과 지원을 위한 ‘겹겹프로젝트JUJU project’를 한국과 일본에서 진행하면서 사진으로 사람들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꾸며 공공예술로써 문제 해결의 또 다른 실마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 한국, 미국, 독일 등지에서 50여 회 이상의 사진전을 열었고 강연활동도 하고 있다. 또한 일본비주얼저널리스트협회JVJA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눈 밖에 나다』 『겹겹-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와 일본에서 출간된 Otsuki Shoten, 『<자숙 사회> 극복, ‘위안부’ 사진전 중지 사건과 ‘표현의 자유’』 등이 있다.
   겹겹 | 안세홍 |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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